한국에서 혼외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밥속 돌멩이, 새는 바가지로 길러졌다.

by 단짠

10살.

엄마 집을 떠나 아빠의 집으로 왔다.

무려, 4명의 남매가 있었다. 내 위로 셋, 나와 생일이 한주 차이가 나는 남자애 하나.

아버지의 아내를 포함한 자식들은 돌이 씹히는 밥을 먹는 것처럼, 나를 대했다.

할 수 있다면 뱉어내고, 또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는 차라리 다른 것을 먹는 것 처럼.

그 집에서 지내온 13년의 시간은 철저히 배제되고, 못생긴데다가 공부도 못하는 아이, 말도 제대로 못하는 아이, 눈치보는 아이로

딱지가 붙여졌다. 명절이 제일 괴로웠다. 내가 속해 있을 곳이 없었다. 모두가 함께 앉아있는 거실에서 나는 앉을 자리를 찾다가 구석어딘가 바닥에 앉았다.

그리고 가능한 방안에 있고 싶었다. 친엄마가 보낸 내 책상이 내가 가진 유일한 안식처였다. 그 위에 나는 늘 덩그랗게 앉아있었다.

아버지는 내게 화를 냈다. 명절인데 왜 방에 박혀 있냐고. 교회가 유일한 숨통이었다. 그런데 그것 역시 나의. 오산이었다.

집안이 다 다니는 교회는, 내가 누구인지 다 알고 있었다. 숨길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그나마 남들 사이에 있는 것이 내 입장에서는 가장 편한 곳이었다.

그렇게 어린시절을 보냈던 나는, 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대학이 내게 아무런 희망이나 즐거움이 되지 못했다.

어떻게든 돈을 모아서, 이 나라를 떠나야 겠다고 생각했다. 3개월을 버틸 수 있는 돈을 만들었다. 영국이 파운드를 쓴다는 것을 몰랐던 나의. 아버지는

내가 가진 돈을 달러로 환전해서 주었다. 싸구려 작은 가방 하나를 사주었다. 지금 생각하면 이해할 수가없다. 환전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멀리 떠나는 내게 고작

2박 3일 용 캐리어를 사주는 것은 내가 못버틸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건지, 당신의 이해도가 그 것 뿐이었는지 알방도는없다.

그래도 그 가방 안에 나는 이전과 다른 것, 설렘, 용기, 라는 것을 담았다.

떠나기 전날, 아버지의 아내는 내게 100만원을 주었다. 애써써 모은 돈이라는 말을 덧붙혔다. 나는 그 돈을 다시 돌려줬다.

그리고는, 아버지의 둘째 딸이 내게 따지듯 물었다. 집에서 새는 바가지가 밖에서도 새는데, 니가 뭔데 유학을 가냐고. 대학졸업했으면 집에 보탬이 될 생각을 해야지. 엄청 격앙된 목소리로 내게 화를 냈다. 나는 그 때 처음으로 눈을 똑바로 마주치고 말했다. 내가 너한테 십원한장이라도 받아가냐?

아버지의 자식들 그 누구도 내게 잘 다녀오란 말 조차 하지 않았다.

2025년 현재, 50대 중반일 그 둘째 언니는 서울대 박사과정을 마치고 지방대 강사로 일한다고 언젠가 전해들었다.

2025년 현재, 그들의 밥속 돌이었던, 새는 바가지였던 나는 글로벌 기업에서 이사로 재직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