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지를 만나다
드디어 책 제목에 나오는 데이지 등장 ㅎㅎ
세상에 운명이란 진정 존재하는 걸까?
어떤 만남은 예기치 않게 우리 앞에 찾아온다. 그리고 어떤 만남은 자신이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음을 미리 암시하기도 한다. 그리고 어떤 만남은 스쳐 지나간다. 그리고 어떤 만남은 인연으로 이어진다.
모래알을 발견하기 전 내가 보았던 해변의 소녀는 어떤 만남에속할까?
해변에는 소녀와 나 둘 뿐이었다. 그녀는 오랜 시간 바다 너머를 보고 있었지만 결국에는 내 쪽을 눈을 돌렸다. 주변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일까. 우리는 눈이 마주쳤다.
눈이 마주친 순간은 중요하다. 그것은 첫인상이 정해지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눈빛은 부드러웠고 낯선 사람으로 하여금 경계를 풀게 하는 힘이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서 왠지 모를 친근감을 느꼈다. 조금 더 운명론적으로 표현하자면 그녀와 나의 만남이 예정되어 있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안녕.”
“안녕.”
자연스러운 인사가 오갔다.
나는 기묘하게도 그녀가 나에게 중요한 존재가 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그녀에게서 느낀 첫인상은 외모에 대한 것이 아니라, 성격에 대한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일 것 같다는 것이 아니라, 어떤 계급에 속한 사람일 것 같다는 것이 아니라, 나와 가까워질 것 같다는 것이었다. 새로 만난 사람에게 이런 느낌을 받는 건 처음이었다.
“난 데이지야.”
소녀의 이름이었다.
나는 그 이름을 듣는 순간 광장의 이야기꾼이 준, 그리고 그 이후로 계속 가방 속에 지니고 다니는 한 송이 꽃이 떠올랐다. 천진난만하고 사랑스러운 꽃. 평화를 뜻하는 꽃. 데이지라는 이름의 꽃.
그녀의 이름이 데이지라서 더 운명처럼 다가왔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어떤 이름이던 상관없이 우리는 가까워질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 여하튼 중요한 건 우리가 친구가 되었다는 것이다. 여하튼 중요한 건 우리가 서로에게 속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데이지와 나는 동갑이었다. 우리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는데 둘 다 꽃을 좋아하고 꽃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둘 다 감성이풍부한 소녀였다.
다른 점도 있었다. 나는 여행 중이라는 것과 그녀는 여행을 떠나본 적이 없다는 것. 나는 불공평한 나라의 경쟁 속에서 자라왔다는 것과 그녀는 공평한 나라의 평온 속에서 자라왔다는 것.
살아온 환경이 달라서인지 우리는 자주 삶의 문제에 대한 철학적인 대화를 나눴다. 그녀와 얘기할 때면 나는 언제나 내 자신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내보일 수 있었다. 진정한 친구에게는 상대가 날 어떻게 바라볼지에 대한 걱정이 필요하지 않으니까.
하루는 불공평한 나라와 공평한 나라가 다른 근본적인 이유에 대해 토론한 적이 있었다.
"시선의 문제가 아닐까?"
데이지가 말했다.
"시선?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되물었다.
"내가 말하는 시선은 그러니까, 사람들이 무엇을 바라보며 사느냐 하는 것 말이야. 시선에 따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우선시하는 것이 바뀔 수 있으니까.”
데이지가 말을 이었다.
“쉽게 예를 들면 쿠키를 굽는 사람이 여럿 있다고 해봐. 똑같이 쿠키를 굽는다고 해도 돈을 벌기위해 쿠키를 굽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맛있다는 칭찬을 듣고 싶어 쿠키는 굽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그저 쿠키 굽는 것 자체가 즐거워서 굽는 사람도 있을 테고, 자기가 구운 쿠키를 사람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이 보고 싶어 굽는 사람도 있을 수 있잖아. 같은 행동이어도 마음속에 바라는 일은 다 다를 수 있으니까. 마음 속에서 바라는 것이 그 사람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곳이 되는 거야. 그리고 사람의 마음은 밖으로 표현되어 그 사람의 분위기가 되는 거지."
"무슨 말인지 알 것도 같아."
나는그녀의 말을 곱씹어보았다.
‘결국 마음이로구나. 결국 작은 것이 큰 것이 되는 거였어.’
시원한바람이 부드럽게 두 뺨을 스치는 것을 느끼며 나는 잠시 고요한 시간에 생각의 흐름을 맡겼다. 데이지도 나와 같은 공간에 생각의 흐름을 맡겼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침묵의 공유였다. 그렇게 순간을 생각으로 채우며 영혼이 어느새 마음에 둔 것으로 서서히 채워지는 것을 느꼈다.
"나의 시선은어디를 향하고 있을까?"
침묵을 깨고 내가 입을 열었다.
데이지가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무엇을위해 살아가고 있는 걸까?"
나는다시 물었다.
"글쎄, 그 답을 찾고 싶어서 여행을 하고 있는 것 아니었어?"
"그랬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나도 모르겠어. 만약에 말이야, 혹시라도 내가 여행을 통해서 얻은 무언가로 나의 등급을 높이는데 목적이 있다면 어떡하지? 여행을 통해서 나에게 유익한 무언가를 얻고 싶어 하는 게 나의 목표라면…… 내가 태어나고 자라온 곳은 불공평한 나라이고 나는 어찌됐든 그 곳에 속해있으니까. 기존에 가지고 있던 사고방식을 바꾸는 게 쉽지는 않잖아.”
데이지는 나의 이야기를 들었고 나는 내 마음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을 질문으로 내뱉었다.
“내 말은, 나의 시선이 차가우면 어떡하지?"
우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다시생각에 잠겼기 때문이리라.
“너무 두려워할 필요는 없어. 그냥 눈을 감고 너 자신에게 집중해봐”
이번에 침묵을 깬 건 데이지였다. 그녀는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네가 추구하는 것이 ‘나에게 유익한가’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유익한가’인가 한번 생각해보는 게 좋을 것 같아. 똑같이 유익을 구하는 거지만 다른 사람을 위한다면 함께 따뜻해지는 거니까.”
“시선의 차이 하나로 함께 따뜻해진다라……”
나는 새삼 여행을 하면서 '따뜻'이란 단어를 많이 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공평한 나라 사람들은 따뜻하다는 말을 참 많이 사용하는구나. 항상 마음 속에 지니고 있으니 자연스레 나오는 것이겠지?'
이 나라의 따스함을 부러워하는 나에게 데이지가 걱정 없다는 투로말했다.
“하지만 너는 이미 따뜻한 걸. 너에게서 느낄 수 있어. 그런 걱정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네가 따뜻한 사람이라는 걸 증명한다고 생각해.”
그것은 그 순간의 나에게 최고의 칭찬이었다. 나도 조금씩 변하고 있는 걸까.
이 날 이후로 나는 이따금씩 ‘따뜻’이란 단어를 속으로 되뇌는 습관이 생겼다.
불공평한 나라라고 또는 공평한 나라라고 해서 모두 그 나라에 속한 자들만 살아가는 건 아니었다. 현자가 이야기한 큰 바위 또한 스스로 작아지고자 했지만 불공평한나라에 속해 있었다.
그가 내린 결정은 어려운 것이다. 왜냐하면 불공평한 나라에서는 다들 큰 바위처럼 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큰 바위는 남들과 다른 길을 가기로 결정했다.
그는 강하고 홀로 서있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는 그만큼 깨질 위험에 많이 노출되어 있었다. 그는 그만큼 이곳 저곳 부딪히기 쉬웠고 또 상처 입기 쉬웠다. 그런 반면 모래알은 작은 존재이지만 깨지기는 쉽지 않다. 그 이유는 작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어쩌면 모래알이 바위보다더 견고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지혜를 어리석게 여기는 불공평한 나라에서 큰 바위의 결정은 충분히 이질적인 것이었다.
공평한 나라에도 이 곳에 어울리지 않는 존재가 있었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 나는 데이지와 함께 꽃으로 가득한 정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우리는 욕심쟁이 꽃을 만났다.
데이지와 나는 꽃들이 가까이서 자세히 볼수록 더 큰 아름다움을 선사한다는 꽃에 대한 진리를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우리가 둘 다 꽃을 좋아했고 꽃을 바라보는 시간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 진리는 꽃의 종류나 크기와는 상관없는 것이었다.
꽃에는 여러 종류와 크기가 있고, 작은 꽃도 큰 꽃도 모두 자기 나름의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게 크고 작은 꽃들이 모여 이루어진 정원은 빛과 색깔의 조화를 이루며 아름다움을 뽐냈다.
우리가 걷던 정원은 그런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런데 그 곳에서 다른 꽃들보다 더 많은 물과 햇빛을 얻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는 욕심쟁이 꽃을 발견하게 되었다.
“안녕.”
나는 꽃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
꽃이 마주 인사해주었다.
“너는 너에게 너무 많은 햇빛과 물을 주려 하는구나.”
내는 걱정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커지려면 그럴 수밖에 없지.”
꽃이 대답했다.
“커진다고?”
“그래. 난 훨씬 커지고 싶거든. 내가 커질수록 더많은 사람들이 나의 아름다움을 보게 될 테니까. 그러려면 더 많은 햇빛과 영양분이 필요해.”
“많은 사람들이 너를 봐주길 원하는구나.”
나는 꽃의 말을 들으며 나의 과거를 떠올렸다. 등급의 존재를 피곤하게 여기면서도 그것을 추구했던 나의 지난 모습을.
그 때 꽃이 바로 대답했다.
“맞아. 나는 나의 아름다움을 많은 이들이 알아주길 원해.”
내가 보기에 꽃은 이미 충분히 아름다웠다. 그리고 주변 꽃보다 커진 크기 때문에 나와 데이지가 그러했듯 이미 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있었다. 하지만 욕심은 당사자가 멈추기로 결심하지 않는 이상 끝이 없는 법이다. 그것은 나에게는 너무 익숙한 모습이었기 때문에 나는 꽃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가슴이 아팠다. 옆의 꽃보다 잘나고 싶어하는 마음은 주변의 꽃들을 모두 비교대상으로 만들어버린다. 욕심쟁이 꽃에게는 확고한 목표가 주어진 셈이지만 그로 인해 그녀는 주위를 둘러볼 능력을 잃게 되었다. 욕심쟁이 꽃은 다른 꽃들과 함께하기 보단 다른 꽃들을 경쟁상대로 둠으로써 그들을 이기는데 집중하는 삶을 살기로 선택했다. 정원의 모든 꽃들 중 가장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것. 그것이 욕심쟁이 꽃의 마음이 향하고 있는 곳이었다.
나는 고향에서의 삶을 생각해보았다. 목표에 한 단계 한 단계 다다를 때마다 느껴지는 상대적인 우월감. 그것은 찰나의 희열과 같은 기쁨이었다. 다른 사람을 아래에 두고 자신을 더 크게 키우는 것. 그것에는 중독적인 힘이 있었다.
그 끝이 외로움이라는 것을 알아버린 나는 그 꽃을 그냥 지나칠수가 없었다. 나는 욕심쟁이 꽃이 듣길 바라며 말했다.
“있잖아, 꽃아. 너는 존재 자체만으로 이미 충분히아름다워. 물론 네가 커지면 많은 사람들이 너를 유독 바라보게 될 거야. 그리고 동시에 너를 더욱 자세히 보게 되겠지. 너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네가 숨기고 싶어하는 부분까지도 말이야. 너는 결국 모두의 시험대에 오르고 말 거야. 그리고 그 시험대 위에서 너는 혼자 버텨야 해. 왜냐하면 네가 정원의 다른 꽃들과 함께 조화를 이루며 지내길 거부했기 때문이야. 그들과 함께 하기보단 혼자 있기를 선택한거지. 그건 생각보다 고독하고 힘든 일이야. 그러니 혼자커지며 외로움으로 스스로를 몰아넣기 보단 주변의 꽃들과 조화롭게 지내려 노력해봐. 모두가 하나로써 아름다움을 뽐낸다면 그건 정말이지 너에게도 행복한 일이 될 거야.”
꽃은 나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지만 사실은 듣고 있는 것 같지않았다. 그녀는 욕심을 버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난 그꽃을 이해했다. 본래 변화란 어려운 것이니까. 그것이 마음속 깊은 곳의 변화일수록. 그리고 원하는 것에 머리가 뜨거워져 있을수록 보아야 할 것은 보이지 않고 들어야 할 것은 들리지 않는 법이니까. 그 말이 쓴 소리일수록 더더욱.
데이지는 나와 욕심쟁이 꽃의 대화를 옆에서 가만히 들었다. 그녀는 내가 꽃에게 한 말을 듣고 내심 놀랐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는 내가 불공평한 나라에서 태어난 것이 나에게 유익이라고 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내가 물었다.
“네가 불공평한 나라에서 태어난 게 유익이라는 거?”
“그래. 나는 공평한 나라가 좋아. 이 곳의 가치관이 좋아. 사람에게는 따뜻함이 필요하잖아. 그런데 어째서 내가불공평한 나라에서 태어나고 자란 게 나에게 좋다는 거야?”
나의 질문에 데이지는 살짝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네가 그 나라에서 태어난 덕분에 욕심쟁이 꽃을 이해할 수 있었잖아. 너는 그 곳에서 태어난 덕분에 더 많은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거야.”
데이지의 말을 듣고 나는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사실 여행을 떠난 뒤로 나는 줄곧 공평한 나라의 사람들이 부러웠다. 나도 이 나라에서 태어났으면 하고 수백 번도 넘게 바랐다. 그런데 그와 정반대되는 이야기를 듣게 되다니.
데이지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너와 닮은 사람을 한 명 알고 있어. 너와 아주 상황이 같은 건 아니지만 그도 여러 사람을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야. 너에게 그를 소개시켜주고 싶어.”
데이지의 눈빛에 진실함을 느낀 나는 그녀의 제의에 흔쾌히 응했다. 그녀가 소개시켜줄 사람이 누구일지 내심 궁금해하며.
-8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