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말하듯이 쓴다 / 강원국> 리뷰 -1
누구나 그렇지 않은가?
나는 움직이기 위해 연식이 오래된 자동차처럼 예열이 필요하다. 비단 육체적인 움직임뿐만 아니라 정적인 행위에도 준비운동을 해야 한다. 독서를 시작할 때면 눈을 한 곳에 두고서 다른 생각을 저편으로 치워내야 한다. 글을 써야겠다 마음먹으면 멍하니 않아 깜빡이는 커서를 보거나 공책 줄이 몇 개 인지 세어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본격적으로 읽고 쓰고 말하고 듣는데 적어도 오분은 걸린다. 오분을 겨우 버텨도 정작 몰입하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그리고 곧 다른 행동으로 넘어간다. 천성적인 기질일까, 고칠 순 없을까 매번 고민한다. 그리고 실패한다. 이런 고민조차 뭉게뭉게 없어지고 만다. 이것이 성인도 겪는다는 ADHD가 아닐까 싶었다. 슬펐다.
나는 멀티가 되는 인간인 줄 알았다. 뇌과학은 말한다. 인간은 멀티가 불가능하다-라고. 맞다, 나는 인간이었다. 그럼에도 꾸역꾸역 부정했다. 결국 착각임을 알고 절망했다. 나는 그저 산만했을 뿐이다.
조언을 구할까. 치부를 드러내기 싫어 인터넷에게 물었다. 꽤 많은 방법론은 산만함은 제 스스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이라 말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ADHD 성향은 유난히 관성이 센 모양이다.
조사대상을 바꾸었다. 산만함을 극복할 방법보다는 산만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찾았다.
여럿을 듣고 보니 절망까지 할 일은 아니었다. 산만함은 대부분의 인간이 가지고 있는 기질임을 알았다. 악을 쓰면서 까지 고쳐야 할 문제가 아니라 원래 그런 것이란다. 아주 심각할 정도가 아니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작은 고민들이라며 다독였다. 하긴 그간 쌓인 기록을 보면 나는 그렇게까지 병적으로 산만하지 않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안심한 건 둘째치고 욕심이 있었는데, 글쓰기 모드에는 되도록이면 빠르게 돌입하고 싶었다. 산만함을 제치고 단숨에 몰입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고민했다. 요새 글쓰기 책을 옆구리에 끼고 있다. 개 중 예열하는 방법이 눈에 띄어 단락 하나를 가져왔다.
글을 쓰기 전 어떤 스타일로 빠져들어야 한다. 내 방법은 나태주 시인의 시를 읽는 것이다. 시간이 없을 때는 한두 편, 여유가 있으면 열 편 정도 읽는다. 그러면 글을 쓰는 호흡이 만들어진다. 시에는 고유의 리듬이 있고, 시인마다 독자적이고 규칙적인 운율이 있다. 작곡가이자 가수인 송창식이 시를 노래 가사로 만들기 어렵다고 한 이유다. <나는 말하듯이 쓴다, 강원국>
정말 그랬다. 다른 곳에서 입을 풀어놓아야 말을 반드시 해야 할 자리에서 만족스러웠다. 어렵지 않은 책을 가볍게 읽은 직후에는 글이 잘 나왔던 기억도 있다. 글 꽤나 쓴다는 사람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고 하니, 모처럼 개운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니, 착각은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써야 한다는 강박에서 오는 좌절, 그 칙칙하고 어두운 곳에 적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하는 부담은 암전에 들어서야 할 사람이 가진 불안감이었고, 이는 곧 산만함의 근본적인 이유였다. 과자봉지를 쉽게 트기 위해 비닐에 홈이 파여있는 것처럼 무언가에 몰입하기 위해서는 그것과 느슨한 관계가 있는 어떤 장치를 준비할 필요가 있었다. 어두운 곳으로 들어서기 위해 어둑함에 익숙해지는 과정을, 간단한 방법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데서 안도했다.
글을 쓰기 위해 자리를 잡는 건 고역이다. 하고 싶지만 귀찮다. 힘들걸 경험으로 알기 때문이다. 써야 하는 이유를 찾는데만 오랜 시간이 걸렸고, 쓰지 않을 핑계만 늘어놓았다. 버릇을 조금 고칠 수 있게 되어 기쁘다.
글을 써야 하는 이유를 어느 정도 찾은 것 같으니 이제는 자주 엉덩이를 붙일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글쓰기 책에는 유려한 글을 쓰는 방법이 들어있기보다, 얼마나 오래 자주 앉을 수 있는지에 대한 동기가 들어있다. 읽는 동안에는 자신의 태도를 의식하게 된다. 자신을 끊임없이 바라보게 되는 효과가 있다. 바라보면 고칠 것이 보인다. 여러 번의 시도 끝에 버릇을 습관으로 만드는 데 성공한다. 태도 변화를 꾀한다, 이것이 방법론이 낭자된 글쓰기 책을 고상하게 다루는 방법이다.
방법론이 죽 나열된 책을 별로라 여기는 취향이 조금 묻어난 또 다른 '방법론'이 되어버렸는데, 이것은 믿음의 영역이니 넘어가겠다.
여럿을 읽었고 책과 책 사이의 내용이 겹치면 지루하다. 그러나 읽고 있는 행위 자체에 의미를 두는 건 어떨까. 일단 앉아, 쓰게 해주는 강력한 동기가 된다. 같은 말을 반복하는 글쓰기 책일지라도 나를 움직이게 한다. 물론 강원국의 책은 이러한 방법론을 줄줄이 나열하는 방식을 택하지 않고 오히려 쓰라고, 또 쓰라고 호소하는 솔직한 말들이 곳곳에 있었기에 다른 것들과는 확실히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