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에는 놀라거나 도망칠 때 비명을 꽤나 질렀던 것 같은데 어른이 되고 나서는 내지르는 것보다는 꿀꺽 삼키는 것이 어른다운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간이 콩알만큼 작은 나로서는 어른이 되어서도 비명을 지르고 도망가고 싶은 적이 셀 수 없이 많았지만 그러지를 못했다. '넌 괜찮아야 해' 하니까 '괜찮아야 하나보다' 해서 '괜찮은 척' 하는 거였지 사실은 '안 괜찮은 거'였다. 39살 어른이 되어도 나는 여전히 무섭고 두려운 것들 투성이다.
이만하면 내가 성숙해지고 단단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어처구니없게도(가사처럼) 으스스한 게 날 쳐다보면 아직도 전혀 안 괜찮다. 오히려 어린 시절보다도 여러모로 가진 게 많아진 탓에 내가 가진 것을 잃어버릴까 봐 훨씬 더 무섭다. 울라프의 비명은 나의 삶에 그대로 녹아있다.
가진 것의 많고 적음의 기준은 누구의 잣대로 재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나의 기준으로 내 것을 세어보자면 생각보다 가진 것이 많다. 그중 셀 수 있는 것 중에는 물건, 옷, 차, 집(30년 되었더라도) 돈(?)등이 있고 셀 수 없는 것 중에는 자신감, 자만심, 열등감, 우월감, 나태함, 긴장감, 두려움, 자책하는 습관, 열정, 성실함, 잡다한 생각 등도 있다. 이중 단연코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내 머릿속 한편에서 나를 좀 먹고 있는 '쓸데없는 생각'이다. 나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것의 싹을 잘라내기 위해 그간 많은 것들을 시도했다.
어른이 된 뒤 스스로 돈을 벌어 모든 것을 살 수 있다는 기쁨에 사로잡혀 물건들을 모으기 시작했었다. 물건의 의미들이 공허함과 외로움 그리고 마음속 가난의 징표였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몸도 마음도 생각도 물건도 옷도. 그땐 모든 것이 허기가 졌다. 그땐 그랬다.
머릿속같이 복잡했던 집의 물건들을 참 많이도 버렸다
더 이상 몸이 자라지 않는 나는 계절에 맞는 새로운 옷을 사지 않았고 사더라도 검은색(내가 제일 좋아하는 색이다)으로 똑같은 디자인의 옷을 2개를 사서 번갈아 입기 시작했다. 화장품도 스킨과 오일 두 개로 줄였고 샴푸와 바디로션 폼 클렌져를 없애고 도브 비누 하나로 해결했다. 되도록이면 배달음식은 줄이고 번거롭더라도 있는 것으로 만들어 먹으려 노력하기도 했다.
환경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면서부터 물건과 옷, 크고 작은 기업에서 외치는 없으면 안 된다는 생필품과 안 먹어보면 안 된다는 다양한 음식들이 나를 만족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했고, 최소한의 물건으로 살면서 어수선한 마음을 다잡고 싶기도 했다. 외부에 신경을 쓰고 쏟아부을 에너지를 온전히 나에게 집중해서 쓰고 싶은 마음이 커진 탓도 있었지만 신랑에게 외벌이로서의 모든 금전적인 역할을 떠 맡기는 상황에서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 싶어 집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다 보니 최소한의 금액으로 살 수 있는 상황을 만들면 좋겠다는 도전정신도 한몫했다.
씀씀이 때문에 생계가 곤란해지면 현실을 살아내야 하는 나로서는 그만큼 살아가는 게 버겁다는 생각이 들 테고 그러다 보면 비웠던 머릿속이 또다시 복잡해질 상황이 올 것이 분명했기에 선택한 일이었다. 이런 행동들이 쌓이다 보면 멋진 어른이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가득했다. 어른 흉내를 내는 내가 아닌 내 머릿속 있는 '생각하는 참 어른'이 되고 싶었다. 머릿속이 산뜻하게 비워진 그 무엇도 곱씹지 않고 꼭꼭 씹어 소화시킬 수 있는 그런 어른이 되고 싶었다. 내가 누구인지 명확히 알고 나답게 사는 그런 어른이 되고 싶었다.(아직은 아니지만 말이다)
요즘도 나는 매일 눈을 뜨면 무엇을 비워낼지부터 생각한다. 눈에 띄게 많은 양을 버리는 것은 아니지만 남아있는 물건과 옷가지 등 눈에 보이는 것들을 하나둘씩 비우기 시작하면서 더불어 내 내면에 있는 모습들을 조금씩 꺼내어 먼지를 털어 내고 있는 중이다. 옷가지와 물건들처럼 버릴 수 있는 것은 버리고, 다듬어 쓸 수 있는 것은 깨끗이 닦아서 제자리에 가지런하게 정돈하고 있다. 마음을 정돈하면서 스스로 내 역할을 규정짓고 그역할에 맞는 임무를 수행하느라 소비했던 나의 시간들도 이와 함께조금씩 내려놓으려 하고 있다.
나는 우리 부모님의 딸이고, 우리 아이들의 부모이기도 하고,나의 신랑의 아내이기도 하다. 나의 언니 오빠의동생이기도 하고, 누군가의 언니이며, 조카고, 고모고, 이모고, 친구고, 그들의 지인이고 사촌이고, 이웃사촌이기도 하다. 동네에서는 이웃의 누구네 집 딸이고, 상점에 가면 누군가의 손님이며, 고객이고, 배우는 곳에서는 회원이며, 친구들 사이에서는 동창이다. 또한 건너 건너 아는 사람이 되기도 하고, 시댁에 가게 되면 며느리고,올케이며, 제수씨고,그 누군가에겐일면식도 없는 스치는 완벽한 타인이기도 하다.
나를 정의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동안 나는 꼭 누군가가 되거나 되어야만 나인 줄 알았다. 정해진 내 역할과 정해진 내 성격 그대로 살아야만 되는 줄 알았다. 슬플 때도 밝은 성격을 유지해야 하는 줄 알았기에슬픈데도 밝은 척했다. 화가 나도 괜찮은 척했고, 서운해도 쿨한척했다. 있는 그대로 표현하면 나답지 않은 건 줄 알았다. 나와 나를 아는 사람이 정한 나다운 기준을 벗어나는 게 무서웠다.
'어린아이는 어둠을 무서워하지만 정작 어둠 속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그때는 까맣게 몰랐다.
'사람들은 당신의 이름을 알지만 당신의 스토리는 모른다. 그들은 당신이 해온 것들은 들었지만 당신이 겪어 온 일들은 듣지 못했다. 따라서 당신에 대한 견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말라. 결국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아니라 당신에 대한 당신 자신의 생각이다. 때로는 자신과 자신의 삶에 최고의 것을 해야만 한다.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최고의 것이 아니라'
(새는 날아가면서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류시화/더숲)
이제부터 나는 더 이상 그 누군가의 누구가되지 않기로 했다. 내역할을 모두 버린다는 뜻은아니다.
이것은 타의든 자의든 나에게 붙여준 그 이름표에 나 스스로를 옭아매지 않겠다는 의미이다.
이 또한 내가 진짜 어른이 되기 위한 과정 중 하나이기도 하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우리 스스로를 끊임없이 규정짓는다. 멀리갈 필요도 없이 가까운 가족부터 나를 '나의 이름세 글자'안에 옭아매는 게 현실이니까 말이다.내가 아닌 다른 이들은 모두 과거를 통해 나를 판단하고 현재를 통해 나를 규정짓는다. '왜 그래? 너답지 않게'라는 말로 말이다. 현재의 나는 과거의 산물이긴 하지만 그 과거가 현재의 나라고 판단하기에는우리 마음은 꽤나 복잡하다.
나는 과거를 지우개로 싹싹 지워버리는 과정 중에 있다. 과거가 축척되어 정해졌던 네가 알던 내가 아니라 앞으로 너도 모르고 나도 모르는 지금의 나로 살겠다는 결심이다. 누군가 과거를 빗대어 나를 판단한다면 '그때는 그랬고 지금은 이렇습니다'라는 말이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을 뿐이다. 과거에 발목을 잡히지만 않는다면 그 무엇도 될 수 있는 지금 현재의 나만이 남는다. 그렇기에 이제는 나를 스스로 내 의지대로 자유롭게 놓아 두려 한다. 세상이 바라는 그 누군가가 되지 않겠다는 의미이자 나만의 다짐이다.
누군가의 현재를 아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인간 존재는 계속 자라고 가지를 뻗는 나무와 같아서 매일 변화하고 껍질을 벗을 가능성을 언제나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날마다 만나는 관계이거나 친밀한 사이라 할지라도 지난밤 혹은 오늘 아침 내가 어떤 내적 변화를 체험하고 낡은 옷을 벗었는지 알 길이 없다.
(새는 날아가면서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류시화/더숲)
오해와 오해만이 가득한 세상이다. 그런데 이곳에서 나는 오만하게도 내 영역을 넓혀 인정받고 싶어 했다.
화려하게 살고 싶어 했고 뒤쳐지는 게 그 누구보다 두렵고 자존심 상해했고 긴장했다. 나는 그들이 될 수 없고 그들도 내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들보다 낫다는 말을 듣고 싶어 상대를 깎아내리며 우월감을 느끼기도 했고 되려 내가 그 대상이 되어 초라해지는 상황이 겪으며 모르는 척경쟁을 했다. 그것도 매우 치열하게 말이다.
그 누구도 경쟁하자고 하지 않았는데 나 혼자그들과 경쟁했다.그것만이어른이 되는 길이라 생각했다.
이제는 그누 구라도 나를 판단하거나 규정짓는 것에 대해 신경 쓰는 일을 줄여나가고 있다.
그 생각들은 그들의 몫이지 나의 몫이 아니기 때문이다.
'누군가 나를 깎아내린다고 해서 내가 훼손되는 것이 아니며 누군가 나를 추켜세운다고 해서 내가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의 뜻을 이제야 어렴풋이 알겠다.
나에게 어른이 된다는 건
타인이 사회가 살라고 요구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만의 고유한 색깔을 가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생김새, 키, 성격, 성향, 건강, 환경. 모두 다르게 태어났다. 애초에 사회가, 세상이, 타인이,가족이, 자신들만의그 잣대를 들이댄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 아닐까.
나의 알맞은 그릇의 크기를 알고 내 내용물이 넘칠 때와 줄어들 때가 언제인지를 아는 것.
내가 왜 이런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매번 꼬박꼬박 짚고 넘어 가는 것.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깊이 있게 들여다보고 내가 원하는 진짜 내 것을 찾는 것.
같은 구절의 책을 읽어도 각자가 느끼는 감정이 다르듯이 그때마다 느꼈던 미묘한 감정선을 놓치지 않고 내것으로 만들어보는것... 등등이다.
생각보다 인생은 짧다.
우리는 늘 죽음의 그림자와 함께 살아가고 있고 사람마다 주어진 시간은 다 다르다는 것을 생각하며
'당장 알 수 없는 미래는 저항하지 말고 받아들이겠다는 마음가짐을 갖는 것' 외에는 오늘 이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한 치 앞도 모르는 나의 앞날에 어두운 그림자를 가져와 심각하게 살고 싶지도 않고
미리 계획을 세워놓고 폭죽을 터트리는 긴장 속에서더 이상은 나를 다그치고 싶지도 않다.
(과거에 철저한 계획왕이었다는 사실을 꼭 알려주고 싶다.)
과거나 미래에 가지 않고 지금 현재를 사는 것. 어렵지만 스스로가 생각하는 내 나름의 어른이 되는 과정을 지금도 차곡차곡 밟아가고 있다. 아무도 모르지만 그 투명한 발자국을 나는 안다.
앞으로는 내 마음속에 새겨진 한발 한 발의 발자국이 새겨진 그 길의 의미를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조차 규정짓지 않는 날을 기대해본다. 그럼 지금보다 더 자유로울 수 있지 않을까.
사람의 가치는 입고 있는 옷, 두른 값비싼 액세서리로 정의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돈을 벌고 빚을 내면 누구나 옷을 사고 스스로를 꾸밀 수 있다. 하지만 고유의 창의성, 통찰력, 재능, 강인한 체력, 신체와 정신의 아름다움은 돈 주고 살 수 없고 신용카드 몇 번 긁는 일로 해결되지 않는다. 꾸준한 노력과 몰입, 축척된 시간이 빚어내는 자질들은 그 어떤 가치보다 과정이 쓴 만큼 나를 더 빛나게 한다. (조그맣게 살 거야/진민영/책 읽는 고양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