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부터 박정희 대통령의 기지촌 정화 운동의 일환으로 미군 성매매 여성들에 대한 대대적인 성병 검사가 진행되었다. 성병 검사를 해 달라는 요구는 미군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미군들 사이에서 심하게 성병이 유행하자 주한 미군은 군인 사기에 악영향을 끼친다고 결론짓고 한국 정부에게 요구한 사항이었다.
성병 검사는 보건소에서 한국인 의사나 검사원들이 했다. 미군 근처 기지촌에서 성매매를 하는 여성들은 미군 출입을 허가받은 클럽에 신원을 등록하고 정기적인 성병 검사를 주 2회 받아야 했다. 성병이 없다고 판명받으면 패스에 체크를 했는데 이게 없으면 클럽을 드나들며 미군을 상대로 정식으로 성매매를 할 수 없었다. 검진 패스를 가지지 않은 여자들이 많으면 클럽은 오프 리밋 (Off-Limit) 즉 영업 정지를 당했다.
영업 정지는 클럽 입장에서 치명타였고 드나드는 성매매 여성들이 검진 패스를 가지고 다니도록 강제했다. 실제로 70년대 동두천 기지촌 클럽에서 기도(문 앞을 지키는 수위)로 일했던 조해일 작가는 문으로 들어가는 모든 아가씨들의 검진 패스를 검사했다고 소설 속에 썼다. 클럽에 등록되지 못한 성매매 여성들은 대부분 검진 패스를 지니지 못했고 ‘히빠리’라 불리며 거리에서 미군을 유혹해야 했다.
성병 검진에서 떨어지면 낙검자 수용소 (성병 관리소)에 가야 했다. 1970년대 수용소는 전국에 약 40개가 위치했던 것으로 나온다. 동두천 소요산 입구와 보산동, 고산동 일대, 파주 장파리, 선유리, 연풍리 등 기지촌 일대, 평택 안성천과 안정리 기지촌 일대, 양주, 포천, 전북 군산, 경부 칠곡 일대 기지촌 부근에 있었다. 주로 기지촌에서 도보나 차량으로 이동 가능한 외진 언덕이나 격리된 곳에 위치했다. 그래서 여성들 사이에서는 ‘언덕 위의 하얀 집’이라는 은어로 불리기도 했다. 현재는 동두천 소요산 밑에 오직 하나 유일하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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