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이입을 모르면 작가가 될 수 없다
이제 '감정이입'에 관한 이야기를 할 차례이다.
당신이 지금까지 이 책을 쭉 읽어왔다면 '감정이입'이 극작술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눈치챘을 것이다. 허구의 이야기를 '불신의 자발적 정지'해서 실제처럼 받아들이는 것의 근간은 바로 감정이입이다. 캐릭터의 매력도 감정이입을 통해야만 비로소 느껴진다. 뿐만인가. 감정이입은 캐릭터를 좋아하는 것을 넘어서 응원하게까지 되고, 호기심을 이끌어 내 스토리를 끝까지 따라가게 만든다.
감정이입의 사전적 의미는 무엇인가?
감정이입은 관찰자가 어떤 대상에게 자신의 마음을 투사하여 일체감을 느끼는 정신 행위이다.
감정이입은 우리가 이야기를 접할 때 그 안에 빠져들게 되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우리는 주로 주인공에게 자신의 마음을 투사해서 일체감을 느낀 뒤 그의 입장이 되어 이야기의 롤러코스터에 올라탄다. 때문에 이야기를 보면서 감정이입이 되지 않으면, 이야기에 집중도 되지 않을뿐더러 재미도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 이 전의 나의 강의를 통해서 여러 차례 감정이입에 대해 언급했다. 따라서 당신은 감정이입이 무엇이고, 어떻게 일어나는지 알게 되었을 것이다. 때문에 이번 강의는 새로운 것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가 몇 회에 걸쳐서 얘기해 왔던 것을 정리하는 게 될 것이다.
감정이입은 나와 인물 간의 동일시에서 시작되며, 동일시의 최소 요건은 인물에 대한 호감이다.
인물에게 강력한 매력을 느끼면 더 좋겠지만, 호감 정도만 느끼는 선에서도 충분히 동일시되며 감정이입이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호감은 매력의 시작점이자 전제 조건이며 기준점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야기를 감상할 때 제일 먼저 주인공의 캐릭터에서 동질감을 찾는다. 그래서 호감이 느껴지면, 그다음 단계로 동경할 것 또는 동정할 것을 찾는 것이다. 물론 순서가 바뀌기도 하고, 동시에 보이기도 한다.
결국, 호감에서 시작해서 매력까지 느끼게 되면, 감정이입이 확실하게 된 것이라 보면 된다. 그다음부터 시청자들은 즐기는 일만 남는 것이다.
사실 캐릭터에 호감을 느낀다거나, 매력을 느낀다거나, 감정이입이 된다는 것은 '불신의 자발적 정지'적 측면에서 볼 때 거의 같은 것이다. 하지만 이들 간의 온도차이는 존재한다.
호감은 매력의 부분집합이고, 매력은 감정이입의 부분집합이다.
즉, 호감 < 매력 < 감정이입
이는 시청자가 감정이입을 하는 데 있어서 매력 외의 요소가 있다는 뜻이다
그 매력 외의 감정이입의 요소에 대해서 설명하기 전에 내 유년 시절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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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릴 적 별명은 '안방 샌님'이었다. 지극히 내성적이라 밖에 나가 놀지 않고 집에 처박혀 있어서 붙은 별명이었다. 집에서 나는 책만 줄곧 읽어댔다. 하지만 그리 넉넉한 집안이 아니어서 맨날 같은 책을 보고 또 보아야 했다.
그때 제일 많이 읽었던 책이 그림이 곁들여진 이순신 장군의 전기였는데, 늦은 나이에 무과에 급제하는 대목부터 왜구와 싸우는 해전에서 연전연승하는 장면이 너무 재미있고 감동적이었다. 그러다 원균의 모함으로 나무 감옥에 수레에 갇혀서 한양으로 끌려갈 때는 너무 억울하고 분했고, 백의종군해서 다시 전장에 나갈 때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하지만 노량해전에서 전사하는 장면은 매번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때문에 전사하기 직전에서 멈추고, 다시 무과에 급제하는 부분으로 돌아가기 일쑤였다.
나는 이 전기를 무려 백 번 가까이 읽었던 것 같다. 엄마가 그만 보라고 빼앗아 장농 속에 감추기까지 했는데, 그것을 몰래 꺼내서는 다락에 숨어서 보다가 들켜서 혼났던 기억도 난다.
당시 내가 제일 부러웠던 사람은 집에 책이 많은 아이들이었다. 나는 그런 아이들과 친구가 되어야 할 때만 어렵고 힘들게 용기를 내곤 했다(욕망이 행동을 부추긴다). 그래서 친구의 집에 놀러 갈 때면 너무 행복했다. 나는 저녁이 되어 집으로 돌아가야 할 때까지 정말 열심히 책을 읽었고, 때론 읽은 책의 줄거리를 친구에게 이야기 해주기도 했다. 친구 엄마는 놀러 와서 장난을 안 치고 친구까지 책을 읽게 만드는 나를 기특하게 여겨주시기도 했다.
그 시절, 나는 이른바 '도장 깨기'가 아니라 '책장 깨기'를 했던 것이다.
초등학교 2학년 때에는 정말 어렵게 우리 반 반장을 친구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반장은 우리 학교 고학년 담임 선생님의 아들이었다. 다른 친구들의 집에 있는 책들은 주로 형이나 누나, 또는 삼촌의 책들이었지만, 반장의 집에는 선생님인 엄마의 교육열 때문인지 새책들이 많았다.
"너 <몽테크리스토 백작> 읽어봤어?"
"아니."
"아직 그것도 안 읽었단 말이야? 그건 말이야. 블라블라."
책을 가진 친구에게 접근할 때 이런 식으로 했다.
결국, 나는 반장의 집에 놀러갈 수 있었다. 그 집에서 표지가 번들번들한 하드커버 세계문학전집의 실물을 영접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그중 한 권을 손에 들었고, 미친 듯이 이야기 속으로 빠져 들었다.
저녁이 되었고, 반장의 엄마가 퇴근해서 오셨다. 나는 책을 읽다 말고 벌떡 일어나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아들에게 이렇게 멋진 전집을 사주시는 선생님이야 말로 진정한 이 시대의 위인이십니다. 그런 마음이었다.
그러나....
선생님의 표정은 차가웠다.
선생님은 나를 보고 반장을 보았는데, 내 앞에는 이미 읽은 책들이 쌓여 있었고, 친구 앞에는 집짓기 블록이 놓여있었다. 다음 순간, 선생님은 내 손에 있던 책을 매몰차게 빼앗더니 전집 전체를 장롱 속에 넣고는 열쇠로 잠가 버렸다. 그리곤 늦었으니 가라고 했다.
반장의 집에서 우리 집까지는 꽤 멀었다. 나는 엉엉 울면서 집으로 돌아왔고, 엄마를 보자마자 더 서럽게 울었다. 내게 자초지종을 들은 엄마는 나를 안아주었고, 당신도 우셨다.
몇 달 후 엄마는 곗돈을 타셨고, 그 돈으로 내게 국민서관에서 나온 30권짜리 고학년용 세계문학전집을 사주셨다(있는 집에서는 50권짜리 계몽사 세계문학전집을 보유하던 시절이었다). 그 전집은 초등학생 시절 내내 나의 가장 소중한 보물이었다. 전집 중에서 <명탐정 홈즈>, <로빈슨 크로소우>, <15 소년 표류기>, <몽테크리스토 백작>, <레미제라블>은 정말 외울 정도로 읽었다(거기서 딱 한 번씩밖에 안 읽은 책들이 있었는데, 그것은 <소공녀>와 <빨간 머리 앤>이었다).
한 번은 전집 중에서 <레미제라블>을 학교에 가져가서 수업 시간에 읽다가 걸려서 선생님한테 압수를 당했다. 교과서 안 쪽에 넣고 보면 안 걸릴 줄 알았던 것이 오산이었다. 선생님한테 울면서 싹싹 빌면서 돌려달라고 했지만, 선생님은 결코 내 책을 돌려주지 않았다. 그 선생님은 한 번 압수한 물건을 단 한 번도 돌려준 적이 없는 그런 인간이었다.
나는 수업시간에 책을 봤던 일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책꽂이에서 '영구결번'이 된 <레미제라블> 자리를 볼 때마다 가슴이 쓰렸다. 전집이라 한 권을 따로 구할 수도 없었다. <장발장>이란 단행본을 사서 그 자리에 꽂아놓아 봤지만, 결코 위안이 되지 않았고 오히려 아픈 기억만 떠오르게 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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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나의 어린 시절 에피소드를 당신과 함께 분석해 보고자 한다.
우선, 당신은 내 고해성사를 읽으면서 책을 좋아하는, 어린 시절의 내 모습에 호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 나이 때 여러 분도 분명 책을 좋아했을 테니까(동질감 획득). 하지만 가난해서 읽고 싶은 책을 맘껏 볼 수 없었던 내게 연민도 느꼈을 것이다. 만약 당신도 어린 시절 가난했었다면 동질감을 한 번 더 느꼈을 것이고.
하지만 당신은 더 많은 책을 읽기 위해 전략적으로 친구를 사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것이 여러분과는 내가 다른 모습이고, 당신이 나를 동경할만한 요소이다. 여러분은 그 동경할 만한 요소 때문에 그 아이에게 매력을 느꼈을 것이다.
이제 여러분은 그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궁금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우리가 감정이입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인간의 뇌에는 거울 뉴런(Mirror Neurons)이 있기 때문이다. 거울 뉴런은 관찰 또는 간접경험만으로도 마치 내가 그 일을 직접 하고 있는 것처럼 반응한다는 신경세포이다.
우리는 이 거울 때문에 슬픈 장면을 보면 눈물이 나고, 에로틱한 장면을 보면 흥분이 되며, 액션 장면을 보며 통쾌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 거울 뉴런은 우리가 감정이입을 하게 만드는 우리의 뇌의 한 부분인 것이다(거울 뉴런에 대해 더 설명하고 싶지만, 그것은 작법의 영역이 아니기에 자제토록 하겠다).
사실 내가 작법서들에 감정이입을 다룬 장이 꼭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계기가 된 것은 마이클 티어노의 <스토리텔링의 비밀>을 보고 난 후였다(작법책을 읽다 보면, 참 거지 같은 것들도 많은데, 이 책은 정말 읽어볼 만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이 작법서에는 '감정이입'이란 챕터도 없고, 감정이입이라는 용어도 없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인용한 말로 인간이 언제 감정이입을 하는지 소개하고 있다.
그 내용을 내 스타일로 정리하면 이렇다.
우리는 인물이 연민을 자아내게 하거나, 공포를 느낄 때 그 인물에게 감정이입을 한다. 연민은 누군가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 생기고, 공포는 우리도 그런 불행을 겪을 수 있다고 느낄 때 생긴다.
내 유년시절의 추억담으로 돌아가 보자.
반장의 집에 놀러 가 저녁때까지 책을 보던 아이(나)는 반장 엄마가 돌아왔을 때 봉변을 당하고 만다. 읽고 있던 책을 빼앗긴 것도 모자라, 보는 앞에서 모든 책들이 장롱 속에 넣어지는 수모를 당하고, 집에서 내쫓기기까지 한다.
'부당하다'라고 생각되지 않는가?
이 부분을 읽었을 때 당신 머릿속에는 이런 생각이 스쳤을 것이다.
'책을 훔친 것도 아니고, 아들보다 조금 먼저 봤기로서니 그런 짓을 하다니! 나쁜 년! 니가 그러고도 선생이냐?'
당신은 분노했을 것이고, 거기에 염장을 지르고 기름을 들이부은 건 그 엄마의 직업이 학교 선생님이라는 사실이었을 것이다.
'아니, 학교 선생님이면 더욱 더 그래선 안 되는 거 아냐? 너한테 배우는 학생들이 불쌍하다, 불쌍해!'
이렇게 한껏 분노한 뒤, 당신 앞에 어린 내가 있다면, 이렇게 얘기했을지도 모른다.
'괜찮아, 괜찮아. 내가 이 아저씨(아줌마)가 책 사줄게.'
즉, 도와주고 싶고, 응원해주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은, 감정이입의 완성은 매력을 너머 그 캐릭터를 응원하고 싶게 만드는 데 있다는 것이다.
정리하면,
동질감에서 호감이 생기고, 그 호감에 동경심이나 동정심이 더해져서 매력이 되고, 그 매력을 가진 이가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 응원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기억을 떠올려 보자.
당신이 그 동안 보아왔던 수많은 작품들에서 주인공이 초장부터 왜 그렇게 부당한 대우를 받았는지 말이다.
그게 다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을 시키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우리가 접하는 이야기 중에 대부분은 이처럼 주인공에게 호감이 생길만하면 바로 부당한 대우를 받는 장면이 나온다. 직장 상사에게 아이디어를 빼앗기거나, 억울하게 누명을 쓰거나, 힘이 센 자에게 이유도 없이 맞거나, 문자 메시지로 해고를 당하기도 한다.
그 이유는 단 하나.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을 시켜서 응원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감정이입을 시키는데, '공포'를 느끼게 하는 것은 매우 쉬우면서 효과적인 방법이다.
한 밤 중에 주인공이 귀가를 하는데 어둠 속에서 누군가 칼을 들고 쫓아온다면 우리는 주인공에게 알려주고 싶어서 안달이 날 것이다. 학교에서 쉬는 시간에 옥상에 불려 간 주인공 주위에 일진들이 둘러쌀 때 우리는 두려움에 가슴 졸일 것이다. 또한 아르바이트로 이삿짐을 나르다가 귀중한 도자기를 깨뜨렸을 때 우리는 주인공의 입장이 되어 망연자실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공포를 통한 감정이입의 결과이다.
그리고 이것도 결국 '응원'이라는 키워드로 설명될 수 있다. 위험에서 빠져나오기를 응원하고, 고난에서 탈출하기를 응원하고, 환란에서 벗어나기를 응원하는 것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시학>에서 가장 강력하게 감정이입이 되는 상황을 알려줌으로써 화룡점정한다.
자신이 저지른 일로 인해 자신이 그 대가를 치를 때 사람들은 가장 강력하게 감정이입을 한다.
내 유년 시절의 이야기 끝부분을 보면, 아이는 책을 너무 읽고 싶은 나머지 해서는 안 되는 짓을 하게 된다. 수업 시간에 교과서가 아닌 책을 읽다가 압수당하는 대가를 치른 것이다. 그 대가는 매우 혹독했다. 다시는 돌려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자기가 저지른 일로 자신이 대가를 치르는 것이 왜 강력한 감정이입의 조건이 되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이런 것일 것이다. 부당한 대우가 불러오는 연민은 일회적이다. 어느 순간 잊혀진다. 하지만 나 자신의 선택에 의해 대가를 치른 일은 두고두고 후회가 되고 회한으로 남는다(나는 지금도 수십 년 전에 압수당한 책에 대한 회한이 있다. 그때 수업시간에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영구결번'은 없었을 텐데).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자신이 한 일로 대가를 치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늦잠을 잔 탓에 시험장에 못 들어가는 대가를 치렀거나, 노래방에서 노느라 어머니가 교통사고 났다는 소식을 못 받았거나, 잘못된 판단으로 전재산을 날렸거나 하는 등 말이다.
이런 식의 두고두고 후회가 되는 경험을 해본 사람은, 자신이 저지른 일로 인해 대가를 치르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본능적으로 안다. 그리고 그 후유증이 얼마나 오래 가는지도. 때문에 가장 강력한 감정이입의 조건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야기 전체를 통틀어 끊임없이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의 기술을 계속 걸어야 할까?
그렇지는 않다. 도입부에서 주인공에게 충분히 감정이입을 시켜놓으면, 그다음부터는 주인공이 캐릭터에 맞게 선택과 행동을 잘하면 된다. 물론 가끔씩은 주인공임을 잊지 않게 하기 위해서 감정이입을 시켜줘야 하지만, 과도하면 주인공이 어리석어지는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
즉, 일단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을 시켜 놓은 뒤에는 그를 이해할 수 있게 하면 되는 것이다.
자, 그럼, 유명한 작품들이 어떤 식으로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을 시키는지 알아보는 기회를 갖도록 하자.
영화 <테이큰>을 보자.
브라이언 밀스(리암 니슨)는 시작부터 딸바보라는 보통의 아빠 콘셉트로 시작한다. 딸의 생일을 위해 선물을 고심해서 고르고 직접 포장하는 장면 등에서 우리는 브라이언 밀스라는 캐릭터에 호감을 느낀다. 혹자는 매력까지 느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의 딸 사랑은 보통의 딸바보인 우리보다 좀 더 앞서 있으니까. 따라서 존경심(동경심)이 들 수도 있다. 아니면, 그가 이혼남임에도 불구하고, 딸의 생일을 지극정성으로 챙기는 것을 보고 연민을 느껴서 캐릭터에 빠져들었을 수도 있다(사실 그의 진정한 매력은 팝스타를 경호하는 과정에서 흉악범을 퇴치할 때 녹슬지 않은 기량을 선보이며 드러난다).
이제 호감도 느꼈고, 매력도 느꼈다. 그러니 이제는 캐릭터를 응원하게 만드는 '부당한 대우'를 받는 부분과 '자신이 한 일로 대가를 치르는' 부분을 체크해 보자.
브라이언 밀스는 딸에게 선물을 전달하기 위해 전부인의 대저택에 간다. 그러나 문 앞에서 경비원이 제지를 한다.
"나 오늘 생일인 아이의 아빠야."
"아빠는 이 집주인님이신데..."
"그 사람은 계부고, 나는 친부야."
"됐고, 못 들어가니까 저기 선물을 두고 가쇼."
대충 이런 대사를 나눈다.
작가이자 감독인 뤽 베송은 왜 이런 씬을 넣었을까?
그렇다. 주인공 브라이언 밀스가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으로 당신의 감정이입을 유도해서는, 당신으로 하여금 딸바보 아빠를 응원을 하게 만들기 위해 그런 것이다.
당신의 마음속에서는 이런 감정들이 마구 생겨난다. 아무리 계부의 녹을 먹고사는 경비원이라 해도 친부를 이렇게 대해도 되는 거야? 뭐? 선물을 두고 가라고? 딸 얼굴을 보지도 못하고? 이렇게 부당할 수가!
이 장면을 보며, 당신은 브라이언 밀스가 좀 더 나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 생각하고, 슬금슬금 응원을 할 채비를 하게 된다. 왜? 당신은 좋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세상이 불이익을 받는 사람 없이 공평해야 하고, 선이 악을 반드시 이겨야 하며, 좌절한 사람이 다시 일어나 성공하길 바라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테이큰>에서 내가 저지른 일로 내가 대가를 치르는 부분은 어디에 있을까?
브라이언 밀즈는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결국, 딸의 파리 여행을 허락하고 만다. 신나서 여행을 간 딸은 국제 인신매매범에게 납치당한다. 그의 책임은 아니지만, 아빠라면 다르다. 내가 허락을 했기 때문에 딸이 납치 당했다는 자책이 드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파리로 날아가 딸을 구하려 죽을 둥 살 둥 자신이 저지른 일(허락)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되는 것이다.
영화 <끝까지 간다>를 보자.
영화가 시작하면 형사 고건수(이선균)는 어머니의 장례식장을 지키다가 말고 경찰서로 운전해 가고 있다. 어머니의 장례보다 중요한 일이 무엇이 있을까? 있다. 그가 근무하는 경찰서에 내사팀이 들이닥칠 예정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책상 서랍을 열어 뇌물로 받은 돈을 찾아낸다면 고건수의 경력은 그것으로 끝이 날 것이다. 그는 내사팀이 오기 전에 경찰서에 도착해서 돈을 치워야 한다.
<생생하게 살아있는 캐릭터 만드는 법>이란 작법서를 보면 착한 사람에게 감정이입을 한다고 했는데, 이 영화를 보면 고건수는 착한 사람이 아니다. 비리 형사일 뿐이다. 그런데도 당신은 고건수를 응원한다.
따라서 당신은 나쁜 놈한테도 감정이입을 시키는 방법도 알아야 한다.
옛날에는 주인공이 무조건 착해야만 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선과 악을 모두 가진 주인공들이 매력적인 시대가 되었고, 그런 현실을 반영하는 캐릭터가 선호되고 있다.
그렇다면, 악인을 어떻게 시청자로 하여금 감정이입을 하도록 하는가.
똑같다. 감정이입 공식을 쓰면 된다.
일단, 호감을 찾아보면, 운전 중에 고건수는 장례식장을 비우고 어디 갔냐는 동생과 통화를 한다. 경황이 없는 와중에서 그는 딸이 뭐하고 있냐고 묻는다. 그때 운전석 옆 작은 액자에 딸의 독사진이 보인다. 그것으로 시청자는 비록 비리 형사지만 딸에게는 애틋한 아빠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딸 사진만 있는 것을 보고, 아내와는 이혼했구나 하는 것까지 파악하는 사람도 있다).
그의 매력은 그가 교통사고로 죽은 시신을 어머니의 관에 합장(?)하는 데에서 나온다. 그의 이 황당한 행동은 향후 그가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헤쳐나갈 수 있는 능력의 맛보기이다. 즉, 매력의 핵심 요소인 동경할 요소인 것이다. 그 장면은 또 다른 핵심 요소인 연민도 함께 준다. 오죽했으면, 엄마의 시신 속에 외갓 남자의 시신을 넣는단 말인가(우리 엄마가 이 영화를 보셨다면, 이런 쳐 죽일 놈! 하셨을 것 같다).
그렇다면, 감정이입의 끝인 응원하는 마음은 언제 어느 장면에서 이뤄지는가?
시작부터 감정이입이 이뤄지고 있다. 고건수는 자신이 저지른 짓(뇌물을 받아 숨겨놓은 것) 때문에 대가(장례식장에서 뛰쳐나와 경찰서로 가는 것)를 치르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인가? 교통사고를 낸 뒤 신고를 하지 않고 차에 숨김(저지른 일)으로 인해 어머니 관에 시체를 숨기는 대가를 치르게 되고, 영화 내내 그로 인해 연쇄적으로 발생하는 대가를 치르게 된다. 즉, 자신의 저지른 일로 점점 더 큰 대가를 치르는 내용이 줄거리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당한 대우는?
비리 형사에게 무슨 부당한 대우가 있겠냐고 반문할지도 모르지만, 그게 그렇지가 않다. 고건수는 불의의 교통사고 때문에 제 시간에 경찰서에 도착하지 못하고, 내사팀이 그의 서랍을 강제 개방해서 다량의 현금 다발과 비리 장부를 찾아낸다. 비리 장부는 고건수뿐만 아니라, 그가 속한 팀 전체의 비리가 담겨 있었다. 이제 고건수뿐만 아니라, 그의 팀 전체가 비리 장부로 아작 나기 일보 직전이 된 것이다
이제 좌절한 고건수는 장례식장으로 되돌아 돌아오고, 그런 그에게 경찰 동료들이 단체로 조문을 온다. 하지만 그들의 목적은 조문이 아니다. 고건수에게 이번 사건을 모두 뒤집어쓰라는 말을 하러 온 것이었다. 이러다간 우리 다 죽는다, 근데 너 혼자 뒤집어 쓰고 죽어주면 우리는 살 수 있다.
고건수 입장에서 이 얼마나 부당한 일인가!
비리의 과실은 다 같이 나눠 먹고, 그것을 고건수 혼자 다 뒤집어쓰라니. 자신은 비리 사실을 들키지 않으려고, 모친상 중에 경찰서로 가다가 교통사고를 내서 사람까지 죽였고, 그 시체가 지금 차 트렁크 안에 있는 상황이기도 하다. 블랙 코미디스럽지만, 고건수 입장에서는 정말 부당한 일이 아닐까.
이렇게 악인을 주인공을 내세울 때에도, 호감, 매력, 응원으로 이어지는 감정이입의 법칙이 그대로 적용됨을 확실하게 인지하기 바란다.
미드 <브레이킹 배드>의 파일럿 역시 감정이입 설계가 아주 잘 되어 있다.
프롤로그의 '빤스런' 시퀀스는 주인공 월터가 자기가 저지른 일로 그 대가를 치르는 장면이다.
시청자들은 그 시퀀스를 보고,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대체 무슨 짓을 저질렀기에 저 지경이 된 거지? 대체 저 인간은 뭐 하는 인간인 거야? 근데 월터가 비디오카메라에 대고 유언 같은 것을 말한다. 뭔가 일이 꼬인 것이고, 저 상황이 가족 때문인 것 같은데... 대체 뭐지? 궁금하다...
그런데, 프롤로그가 끝나고, 월터의 실체가 나오면 시청자들은 다시 한번 깜짝 놀란다.
그는 노벨 화학상 수상에 관련된 중요한 연구를 한 사람이지만, 그의 현실은 평범한 고교 화학 교사이다(친구들은 그의 연구를 발판으로 엄청난 부자가 됐다). 그에게 연민이 생기면서 응원을 시작한다.
하지만 이 드라마 크리에이터 빈스 길리건은 그 정도 응원으론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박봉으로 생활비가 부족한 그는, 방과 후 세차장 카운터 알바를 한다. 근데 세차장 주인이 세차 직원이 그만뒀다며 월터에게 세차를 하라고 시킨다. 이는 명백한 부당한 대우가 아닌가. 시청자는 여기서 응원을 한 번 더 보탠다.
돈이 아쉬운 그는 이렇다 할 저항도 못하고, 물이 흥건한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스포츠카의 바퀴를 비눗물로 닦는다. 그때 그 차 주인이 나타나는데, 그는 바로 그의 재수 없는 제자이다. 게다가 그는 애인까지 대동하고 있다. 그 제자와 애인은 세차를 하고 있는 월터를 내려다보며 한심해하며 비아냥거린다. 천부당만부당, 부당하다!
시청자는 여기서 월터에게 강력하게 감정이입을 한 뒤 응원을 하게 된다.
그런데 그가 폐암(하늘도 무심하시지, 이것조차 그에게 너무 부당하다)에 걸리자, 생활비를 위해 마약을 제조하기 시작한다.
아, 이것이 바로 그가 저지른 일(마약 제조)이 되는구나! 그래서 사막에서 빤스런을 하는 처절한 대가를 치르는구나!
이런 상황에서 당신에게 이제 남은 것이라곤, 그를 응원하기 위해 정주행하는 것 밖에 없는 것이다.
<겨울 왕국>에서는 아렌델 왕국의 엘사와 안나 공주 자매에게 확실하게 감정이입을 시켜 버림으로써 대박 흥행에 초석을 다져 놓는다.
성인 주인공에게 어떤 불행으로 감정이입을 시켜놓는 것보다 그 주인공의 어린 시절에 감정이입을 시켜놓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다. 성인이 될 때까지 그 불행으로 인해 고통을 받아왔을 거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즉, 감정이입의 깊이가 달라지는 것이다.
실제로는 안나가 주인공이지만 엘사가 주인공처럼 보이는 이유는, 비극의 주인공으로서 시청자들이 엘사에게 심하게 감정을 이입하기 때문이다.
선천적으로 스노우를 만드는 능력을 가진 엘사, 이것은 기프트일 수도 있지만 저주일 수도 있다. 그래서 숲 속의 요정 트롤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마법은 타고 난 건가요, 저주받은 건가요?"
엘사가 가진 마법은 안나와 재밌게 놀 때는 신의 선물이지만, 그것으로 인해 안나가 피해를 입었을 때부터 저주로 변한다. 엘사는 안나에게 피해를 주려는 의도가 결코 없었다. 오히려 안나가 위험한 순간에 처했을 때 구하려다 그렇게 된 것이다.
안나는 또 어떤가? 그는 철없는 아이이고, 언니와 하는 놀이가 위험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우리는 안나에게도 죄를 물을 수 없다.
그들은 신의 저주로 인한 피해자일 뿐이다.
그런 공주 자매들에게 '부당하기 이를 데 없는' 진짜 저주가 내려진다.
"안나는 쉽게 고칠 수 있다. 하지만 안나가 알고 있는 엘사의 마법의 기억은 잊어버릴 것이다. 다만 언니에 대한 즐거운 기억은 살아있다. 엘사의 능력은 점점 강해질 것이고, 그것은 위험 요소가 될 것이다."
엘사는 안나를 위해 커다란 강당 안에 스스로 고립되는 길을 택한다. 왕실의 공주로 한창 즐겨야 할 나이에 말이다. 너무 부당하지 않는가? 동생과 놀아주다가 조그만 실수를 한 번 한 것 가지고? 독방에 갇히다니!
신의 저주를 받는 것은 그 자체로 엄청나게 부당한 요소이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와 <굿 닥터>의 자폐증도 이 경우에 속한다. <비밀의 숲> 주인공의 선천적 뇌질환도 그렇다.
엘사의 저주받은 능력은 점점 강해지고, 결국 왕국 전체를 얼려버릴 정도가 된다.
안나 역시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 언니에게 좋은 기억만 갖고 있는 그녀는 강당 밖에서 대답 없는 언니를 그리워한다. 그러면서 때론 서운해하고, 때론 원망하기도 한다. 그날의 사건에 대한 기억이 사라진 것은 그녀에게 부당하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그들 자매에게 또 다른 불행(신에게 당하는 부당한 대우)이 찾아온다. 왕과 왕비가 해외 순방을 갔다가 죽고 만 것.
이때 장례식에도 참석 못한 엘사는 또 한 번 부당함을 당한다.
엘사가 성인이 되어 왕위를 물려받게 되어서야 자매는 드디어 상봉을 한다. 즉위식에서 왈가닥으로 성장한 안나는 처음 본 남자와 결혼하겠다고 고집을 부린다. 부모가 살아계서서 제대로 가정교육을 받았다면, 과연 저럴 수 있을까? 게다가 언니랑 지금껏 함께 커 왔다면, 그러지 못했을 텐데... 황당함과 동시에 연민을 주는 씬이다.
그런데, 결혼을 반대하는 엘사와 고집하는 안나가 다투는 과정에서 안나로 인해 엘사의 마법의 봉인이 풀려 버린다. 이 일로 자매는 다시 한번 대가를 치르게 된다. 동생은 언니를 강당이 아닌 얼음 성에 갇히게 만든다. 언니는 언니대로 감정을 통제하지 못해 왕국 전체를 얼려버린다.
<겨울 왕국>이 흥행에 대박을 터트린 이유는, 신의 저주로 부당한 대우를 받고 태어난 엘사와 그로 인해 공교롭게도 피해자이자 가해자가 된 안나, 그리고 그들이 부모에게 사랑받고, 백성들에게 추앙을 받아야 하는 한 나라의 공주들임에도, 운명의 장난으로 지속적으로 부당한 대우를 받아, 관객들의 감정을 치명적으로 이입시켰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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