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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더 잘 쓰게 된다 10

<하우스> 케이스 스터디

by 이기원

지금까지 우리는 주제와 로그라인, 하이컨셉, 그리고 주인공과 매력, 감정이입, 딜레마, 조력자/적대자/멘토 같은 개념들을 배우면서 다양한 작품들을 인용했다. 그러한 각각의 예시는 개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지만, 여러 나라의 지도들에서 관광 명소만 따로 오려내 가지고 있는 느낌도 받았을 것이다. 그래서 한편으론 불안하기도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하나의 작품 안에서 그 모든 요소들을 반영한 스토리를 구축해야 하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제는 하나의 지도를 펼쳐놓고, 그 안에서 우리가 배운 이론들을 구체적으로 짚어보는 케이스 스터디를 하려 한다. 그래야만 그 개념들이 어떻게 서로 맞물려 돌아가고, 실제 드라마 속에서 어떤 유기적인 효과를 만들어내는지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케이스 스터디를 당신은 주변의 문우들과 함께 해보는 것을 추천한다. 작품에 따라 위의 모든 요소들이 완벽하게 들어있는 것들도 있지만, 몇 개 요소가 빠져있는 것들도 있다. 완벽한 작품은 완벽한대로 배울 점이 있고, 그렇지 않은 작품은 당신이 대안을 생각하는 계기를 만들어 줄 것이다.


지금까지 배운 내용을 점검하는데 있어서 <하우스(House M.D.)〉는 더없이 좋은 교본이다. <하우스>는 2004년에 시작해서 2012년까지 총 8 시즌 173개의 에피소드를 방송한 레전드 메디컬 드라마이다. 이 드라마의 1화는 시즌형 드라마의 특성상 주제와 로그라인, 하이컨셉을 강하게 드러내고, 주인공과 조력자, 적대자, 멘토들이 잘 세팅되어 있다. 또한 주인공의 매력과 딜레마, 그리고 인물에 대해 어떻게 감정이입을 시키는지에 관한 캐릭터의 원칙들이 완벽하게 녹아들어 있다.


미국에서 시즌형 드라마의 경우 1회를 파일럿이라고 하는데, 미국 메인스트림 방송국에서는 파일럿 극본을 보고 제작 결정을 내리고, 완성된 파일럿을 보고 정규 편성을 확정하는 시스템을 갖고 있다. 때문에 파일럿은 그 자체로 시리즈의 승패를 가늠할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하다 할 수 있겠다. 파일럿에서 실패하면, 그 다음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니까.


파일럿에서 가장 중요하게 보는 것은 바로 캐릭터이다.


파일럿을 평가하는 사람들은 보통 주인공 캐릭터가 100회 이상 이끌어갈 인물인지 아닌지를 판단한다. 물론 주인공이 만나는 사건도 중요하다. 하지만 시즌 드라마가 주로 의학물, 법정물, 형사물 등등인 것을 보면 소재는 일단 무궁무진한 것으로 친다. 때문에 그 사건들을 주도적으로 헤쳐나가는 주인공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휴 로리가 맡았던 닥터 그레고리 하우스는 불멸의 캐릭터라 할 수 있다. 하우스라는 캐릭터가 있었기에 8시즌까지 시리즈가 제작될 수 있었다.


<하우스>의 하이콘셉트는 '셜록 홈즈의 메디컬 버전'이다.


당신이 만약 이런 하이콘셉트를 생각해 냈다면, 작가로서 그 다음에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나는 수업 중에 멋진 하이콘셉트를 잡아놓고서는, 그 사실에만 도취되어 후속조치를 거의 하지 않은 학생들을 너무나 많이 봤다. 어떤 학생은 뭔가 후속조치를 취하려 했지만 뭘 해야 할지 몰라서 전전긍긍하기도 했다. 아마 당신도 그들과 그리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크리에이터 데이비드 쇼어는 <하우스>의 하이콘셉트를 구현하기 위해 어떤 고민을 했을까?


<하우스>가 메디컬판 셜록 홈즈이니 일단 셜록 홈즈의 캐릭터를 가진 의사를 창조했을 것이다. 그리고 셜록 홈즈 짝꿍인 왓슨의 캐릭터도 만들어야 한다. 작가라면 보통 이 정도까지는 다 한다. 당신도 이 정도까지는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 이상이 있어야 한다.


데이비드 쇼어는 셜록 홈즈를 메디컬로 끌어들이면서 단순히 캐릭터만 가져온 것이 아니라, 그가 사건을 해결하는 방식도 가져왔다.


<하우스>의 로그라인을 생각하면 그 답은 쉽게 찾아진다.


<하우스>의 로그라인은 '의사 셜록 홈즈는 환자의 병을 추리해서 치료할 수 있을까?'이다.


로그라인의 핵심은 호기심이나 궁금함이 담겨야 한다는 것이다. 보고 싶다는 욕망을 자극해야 좋은 로그라인인 것이다. 근데 이 로그라인은 엄청 궁금하다. 어떻게 추리를 한다는 거지?


닥터 하우스는 원래 신장내과와 감염내과 전문의 출신으로 이 두 전공이 합쳐져서 희귀하고 복잡한 질병을 다루는 진단의학 전문의가 된 인물이다. 즉, '희귀병 탐정'으로 다른 의사들이 풀지 못한 난해한 증상을 퍼즐 맞추듯 해결하는 캐릭터인 것이다. 셜록 홈즈가 만약 의사라면 딱 그럴 것 같은 그런 인물 말이다.


아마도 크리에이터인 데이비드 쇼어는 <하우스>를 피칭하는 자리에서 셜록 홈즈처럼 까탈스러운 천재 의사가 환자들 병의 원인을 추리함으로써 환자들을 치료하는 스토리라고 했을 것이고, 그에 호기심을 느낀 방송 관계자들로부터 파일럿 대본을 요구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끝내주는 파일럿 대본이 나오자 정규편성을 전제로 파일럿 제작을 할 수 있게 했을 것이다.


이에 데이비드 쇼어는 <유주얼 서스펙트>의 브라이언 싱어 감독을 데려다가 파일럿을 제작하기에 이르렀고, 그것이 장장 8년 동안 175개의 에피소드가 방영된 <하우스>의 시작이 되었다.


<하우스>의 파일럿에는 100회 이상을 담보하는 닥터 하우스의 캐릭터와 스토리의 청사진이 들어있다.


바로 <하우스>의 파일럿을 분석해 보도록 하자.


화면이 열리면...


유치원 여선생님 레베카가 등장한다. 유치원에 늦지 않게 가까스로 도착한 그녀는 천진난만한 아이들과 함께 수업을 시작한다. 아이들과 인사를 나누던 중 레베카는 갑자기 언어 장애가 와서 말을 할 수 없게 되자, 칠판에 Call the nurse(간호사를 불러!)라고 쓴 뒤 의식을 잃는다.


하우스가 치료해야 할 환자를 소개하는 프롤로그이다. 하우스는 이런 식으로 매 번 에피소드 앞부분에 환자를 소개하는 프롤로그를 배치한다.


당신이라면 이 프롤로그에서 독특한 의학적 케이스가 핵심이라 생각하겠지만, 선수(나를 포함해서)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선수들에게 어려운 의학적 케이스는 당연한 것이고, 그들이 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환자에 대한 감정이입이다. 즉, 환자를 연민하게 만들어 꼭 살려줬으면 하는 마음을 시청자들이 갖게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행복에 정점에 있는 환자에게 불치의 병에 걸리게 하는 식으로 말이다. 단, 그것을 노골적으로 설명하면 안 되고 어디까지나 은근슬쩍의 묘를 살려서 표현해야 한다. 이 프롤로그도 따지고 보면, 행복의 정점에 불치의 병에 걸리는 콘셉트이다. 그런 환자는 시청자들로 하여금 감정이입을 하게해서 쾌유를 응원하게 된다.


레베카가 어떻게 호감을 일으키는지 잠깐 보고 가자.


레베카는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간신히 도착한 뒤 동료 선생과 대화를 한다. 동료 교사가 늦은 이유가 남자 친구 때문이냐는 말에 레베카는 미소만 지을 뿐 대답을 해주지 않는다(시청자도 괜히 같이 궁금해 하기 시작한다). 교실로 들어가면 천진난만한 아이들이 그녀를 맞이해준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선생님이라면 우리는 당연히 호감을 느낀다. 그런 선생님이 동료가 물었을 때 말해 주지 않았던 얘기를 아이들에게 들려준다. 주말에 멋진 친구가 생겼다고(시청자는 알아차린다. 내 그럴 줄 알았다니까. 그러면서 그녀의 현재 감정 상태를 이해하게 된다). 근데 다음 순간, 선생님에게 언어장애가 찾아오고... 말을 할 수 없게 되자 기지를 발휘해 칠판에 간호사를 불러달라고 쓰고는 쓰러져 버린다.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행복의 정점에 가까운 상태에 있던 인물이 그 행복을 제대로 누려보지도 못하고, 위급한 상황에 처하는 것이다. 시청자들은 생각한다. 얼른 누가 와서 저 선생님을 살려줬으면.


프롤로그에 이어 타이틀롤이 나오고...


불쌍한 선생님을 살려줄 구세주가 등장한다. 근데 여기에서 선수들은 이런 고민을 한다. 어떻게 등장시켜야 시청자들을 붙잡아 두는데 유리한가. 슈퍼맨처럼 짜잔 하고? 아니면 바보처럼 찌질하게?


당연히 후자이다. 전자는 왠지 환자를 쉽게 뚝딱 고칠 것만 같다(더 이상 안 보고 싶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후자는 고치지 못할 것 같다. 따라서 시청자는 불안해 진다. 이 불안함은 시청자들이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게 만든다. 불안감은 공포에서 온다(공포는 연민과 함께 감정이입의 두 가지 핵심 요소가 아닌가!).


스티븐 킹은 독자를 불안하게 만들어 몰입하게 만드는 것이 자신의 글쓰기 비법이라고 말했다.


당신들은 어떤 작품을 본 뒤 '심장이 쫄깃했다'는 표현을 여러 번 썼을 것이다. 그 심장의 쫄깃한 근원은 바로 '불안감'이다. 당신이 시종일관 시청자들을 불안하게 만들 수 있는 테크닉을 터득하게 된다면, 당신은 가문의 영광이 될 것이고, 당신으로 인해 3대가 먹고살 수 있을 것이다.


하우스는 지팡이를 짚고 다리를 절면서 등장하면서 투덜거린다. 사람들은 자신을 환자라고 생각한다고. 이에 왓슨 역할을 하는 제임스 윌슨(존 왓슨과 이니셜이 같다)이 병원 규칙에 맞게 가운을 입으라고 한다. 그러자 하우스는 환자들은 아픈 의사를 싫어한다고 말한다. 병원에서의 자신의 정체성 즉, 자신의 캐릭터가 아웃사이더임을 스스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어 자신의 사촌인 레베카에 대해 신경을 써달라는 윌슨의 말에 뇌종양이라 단정적으로 말하며 곧 죽을 거라고 시큰둥하게 말한다. 보통은 동료 의사가 자신의 가족에 대해 부탁을 하면 신경을 좀 더 써주는 것이 인지상정일진대 하우스는 얄짤없는 성격이다. 하지만 말은 그렇게 해도 나중에는 신경을 써주는데, 그것이 바로 주인공이 가져야 할 덕목이다.


후반부에 레베카는 윌슨의 사촌이 아님이 드러난다. 윌슨은 하우스가 환자에 신경을 써서 치료해 주기를 바라서 그렇게 했다고 한다. 이렇듯 윌슨은 하우스에게 어떻게든 환자를 푸시해서 치료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는 캐릭터이다. 그는 매우 훌륭한 조력자이다.


"선생님은 정말 명성에 걸맞은 진단 전문의시군요. 뭐가 잘못되었는지 찾아보지도 않고 그렇게 다 안다는 듯이 말씀하시니까요."


윌슨은 비아냥 거리는 식으로 하우스를 소개한다. 그렇다. 하우스는 시리즈 내내 '뭐가 잘못되었는지 찾아보지도 않고 그렇게 다 안다는 듯 말씀'을 한다. 셜록 홈즈처럼.


잠시 하우스와 윌슨은 의학적인 견해로 잠깐 말다툼을 하다가 하우스가 세 명의 유능한 의사를 모아 팀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얘기하며 일 좀 하라고 채근한다. 이에 하우스는 진통제를 꺼내 먹는다. 이 진통제를 먹는 행동은 닥터 하우스의 '시그니처 무브'이다.


이어 하우스가 자신이 직접 뽑은 세 명의 엘리트 의사와 환자의 병에 대해 논의를 한다. 이 세 명의 의사들은 조력자들로 세팅된 인물들이다.


한 의사가 환자와 만나 문진을 해야 하지 않냐고 하자 하우스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사람(환자)은 거짓말을 한다."


전형적인 형사 마인드인데, 이게 바로 셜록 홈즈적 태도인 것이다. 그는 수사관처럼 범죄자의 진술을 신뢰하지 않고 오직 증거로만 병명을 밝혀내고 싶은 것이다. 이런 면이 <하우스>라는 드라마가 다른 메디컬 드라마와 다르게 보이게 만든다.


증거(?)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하우스는 용의자(환자)를 굳이 만나려 하지 않는다.


"환자를 치료하는 게 우리가 의사가 된 이유가 아닌가요(환자를 치료하려면 환자를 만나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아니, 병을 치료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의사가 된 이유지. 환자를 치료하는 거는 대부분의 의사들을 비참하게 만드는 거지(나는 환자에는 관심 없어. 질병을 어떻게 치료할까만 생각하지. 환자에게 감정적으로 빠지는 일은 피곤한 일이야)."


"그래서 치료에 있어서 인간애를 배제하려고 하시는 건가요( 환자가 의사를 만나야지 치료에도 믿음도 생기고 그런 거 아닙니까. 의사도 환자를 꼭 살려야겠다는 마음도 생기고요)?"


"환자들과 얘기를 안 하면 환자들이 거짓말을 할 수도 없지. 우리 또한 거짓말을 할 수가 없고. 인간애라는 게 것은 너무 과대평가 돼 있어(어떤 환자들은 자기 증상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해. 때문에 오히려 의사가 오진할 가능성도 있어. 나는 증거(증세)로만 진단하고 처방을 하지. 의사랍시고 휴머니스트인 척하지 마)."


서브텍스트가 풍부하게 들어간, 끝내주게 잘 쓴 대화문이다.


이쯤 되면 닥터 하우스는 감정이란 도통 없는 소시오패스에 가깝다. 하지만 실력은 매우 뛰어나다.


이렇게 작가는 하우스의 캐릭터를 두 개의 제법 기다란 씬으로 보여준다.


첫 번째 씬에서는 가장 가까운 존재인 윌슨과의 대화를 통해 그들이 어떤 관계인지를 보여준다. 적어도 하우스는 삐딱하고 냉소적이어도 윌슨의 말은 들어주는 사람이다. 두 번째 씬에서는 그의 팀과의 대화를 통해 하우스의 실력을 보여주고, 그가 환자에게 어떤 태도를 갖고 있는지를 심화학습을 시켜준다.


하우스는 치명적인 매력의 소유자이다. 동정적 요소(다리가 불편하다)와 동경적 요소(천재적인 의사)를 동시에 갖추고 있다. 동정과 동경 사이의 간극이 클수록 매력적인 인물이 된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나 <굿닥터>의 주인공처럼.


이렇게 작가는 하우스와 가까운 사람부터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는가, 그들에 대한 하우스의 스탠스는 무엇인가 설명해 나간다. 이게 다 작가의 전략이다.


그다음은 가장 거리가 먼 원장과의 관계를 보여준다. 퇴근할 때 복도에서 원장을 발견했을 때 하우스가 급하게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는 행동을 함으로써 별로 마주치고 싶지 않은 상대임을 알려준다. 원장은 하우스를 보자마자 갈구기 시작하고, 서로 기싸움을 한다. 하우스를 해고할 수 있는 원장과 종신재직권을 갖고 있는 하우스. 창과 창이다.


첫 만남은 무승부로 끝나지만, 이내 원장의 판정승. 하우스의 환자가 받아야 할 검사를 원장이 직권으로 막은 것이다. 환자를 볼모로 원장은 하우스의 항복을 받아낸다.


이는 감정이입의 대표 공식인 '주인공이 부당한 대우를 받은 것'에 해당한다. 주인공이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 시청자는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을 하게 돼 있다(아리스토텔레스가 한 말인 것은 안 비밀).


이 부분은 딜레마로도 해석할 수 있다. 환자를 만나지 않는 자신의 신념을 깰 것인가? 신념을 깨고 병을 치료하기 위해 환자를 만날 것인가? 하우스는 자존심을 꺽음으로써 까탈쓰럽고 싸가지 없지만, 그래도 환자를 위하는 마음이 있는 의사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원장은 병원 시스템을 상징하는, 하우스 입장에서는 적대자이다. 적대자는 강력해야 제 맛인데, 이 원장은 그다지 강력함을 보이지 않는다. 그 이유은 시리즈를 통 털어 가장 큰 빌런은 하우스 매번 맞닥뜨려야 하는 희귀병들이기 때문이다.


초보자들의 극본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대부분 착한데, 요즘은 그런 착한 주인공은 매력이 없고, 뻔해서 대부분은 폐기 처분된다고 보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착해 빠진 주인공인 극본을 써서 공모에 제출한다면, 당신은 참가하는데 의미를 두는 것 외에 할 게 없을 것이다.


상대적으로 볼 때 착한 사람을 주인공으로 만들어야 한다.


밸런스가 중요하다. 모든 인간들은 선과 악이 있다. 주인공에게 선과 악을 동시에 주되, 중심추가 선 쪽으로 살짝 기울게 묘사를 하는 것이다. 하우스가 바로 그런 인물이다.


그리고 주인공보다 좀 더 나쁜 빌런을 등장시키면 캐릭터가 선역으로 상대적인 보강이 된다.


중요한 것 하나. 빌런의 행동에 납득할 만한 이유를 줘야 한다. <하우스>에서의 원장처럼 말이다. 그녀는 환자를 볼모로 삼는 짓을 저질렀지만, 닥터 하우스로 하여금 의사로서 본분을 다하게 하려는 의도였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원장은 멘토 역할도 함께 하고 있다. 그것은 윌슨도 마찬가지다. 원장은 병원이라는 시스템 안에서 하우스가 환자를 치료할 수 있게 이끌고, 윌슨은 하우스의 도덕과 윤리적 경계를 넘지 못하게 제어한다. 이렇게 두 명의 캐릭터가 멘토를 겸하고 있기 때문에 독립적인 멘토는 등장하지 않는다.


이렇게 주요 등장인물의 세팅을 마쳤다. 주인공으로부터 가까운 사람부터 먼 사람 순으로.


여기까지가 총 러닝타임 44분 중에서 11분 지점으로 나는 데이비드 쇼어가 경이로운 속도로 세팅을 마쳤다고 생각한다. 내공 있는 작가들은 세팅을 빠른 시간 내에 이렇게도 완벽하게 해낸다. 공모작 심사를 해보면, 많은 대본이 세팅하는데 시간을 너무 허비한다. 원고의 절반까지 하는 것은 물론이고, 거의 3분의 2 지점까지 세팅을 하기도 한다(물론 심사위원이 거기까지 읽지는 않겠지만).


크리에이터 데이비드 쇼어는 이렇게 하우스의 성격을 규정하고는, 그로 하여금 팀과 함께 레베카를 치료하는 여정을 떠나게 한다. 이제는 하우스가 한 달 동안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태인 여선생님을 고쳐줄 시간이다. 33분에 걸쳐.


레베카는 검사 시작부터 기도가 막혀 죽을 뻔하지만, 하우스는 그럼에도 그녀를 만나지 않는다. 캐릭터는 이렇게 일관성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원장에게 판정패 당한 여파로 그녀가 오더 내린 환자들을 억지로 대면 진료를 하게 되는데, 여기서 하우스의 메디컬 셜록 홈즈로서의 면목이 유감없이 드러난다. 왜 셜록 홈즈를 보면, 의뢰인을 한 번 보는 것만으로, 그가 마차의 어느 쪽에 앉았는지, 어느 지방 사람인지 다 맞추지 않는가. 첫 환자를 대면한 자리에서 하우스는 환자의 상태를 진단해 주는 대신, 와이프가 바람을 피운다는 사실을 추리해 내고 좋은 변호사를 선임하라고 충고한다.


다음 환자를 보는 상황에서 하우스는 레베카의 치료법이 떠오르고, 죽을 날이 며칠 안 남은 뇌종양 환자인 레베카에게 스테로이드를 투여하라는 처방을 내린다. 하우스 팀의 의사들은 아연실색하고, 환자 역시 황당해한다. 심지어 원장까지 나서서 문제를 제기하고 더 이상의 투여를 막으려 하는데, 환자는 기적적으로 호전된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원장은 운이 좋았다고 평가절하하고, 그 와중에도 하우스는 환자를 만나려 하지 않는다. 캐릭터는 이래야 한다.


이렇게 환자가 쉽게 치료되면, 재미가 없다. 곧바로 반전이 일어난다.


레베카는 앞이 안 보이기 시작하면서 심장마비가 온다.


백약이 무효인 상황에서 하우스 팀의 의사인 에릭은 하우스의 무언의 지령(?)을 받고 동료와 함께 환자의 집에 몰래 침입해서 범죄 현장(?)을 조사한다. 의사가 아니라 무슨 수사관 같은데, 이것이 다른 메디컬 드라마와 <하우스>가 다른 점이다. 여기서부터 하우스 팀의 의사들의 캐릭터가 하나씩 나오기 시작한다. 캐릭터들의 소개를 앞부분에 회의를 할 때 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면 하우스에 대한 집중도가 떨어지기 때문에 일단 얼굴만 알려놓고, 차차 이야기의 흐름 속에서 소개하는 전략을 짠 것이다.


에릭은 할렘가 출신으로 범죄를 저지른 경력이 있는데, 하우스가 그것을 알고 에릭이 열쇠 없이 환자의 집에 침입하도록 유도한다. 분명 도덕적으로는 나쁜 짓이지만, 하우스의 캐릭터를 보면 이해 못 할 일도 아니다. 하우스가 그렇게 하라고 한 것은 누군가의 허락을 받으려 할 때 생길 수 있는 다양한 '범죄 현장'의 오염을 막기 위함이었다.


하우스는 환자의 집을 조사하고 온 에릭 등과 대화 과정에서 환자의 뇌에 촌충이 있을 거라 추리해 낸다. 드디어 환자를 치료할 수 있는 단서를 찾은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환자가 치료를 거부한다. 그러자 환자기피증이 있는 하우스가 직접 환자 앞에 나타나게 된다.


이 장면이 중요한데, 그 이유는 하우스가 신념을 꺾을 때는 환자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이 그것밖에 없을 때뿐이기 때문이다. 앞서 원장에게 판정패당할 때도 신념을 꺾었고, 지금도 그런 이유로 신념을 꺾은 것이다.


레베카는 뇌에 촌충이 있다는 증거를 요구한다(뇌에 있는 촌충은 영상의학 사진에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면서 추리에 의존한 치료에 응하지 않겠다고 한다. 하우스가 한 방 먹은 것이다.


이 씬은 환자에 대한 씬이지만, 작가는 하우스의 씬으로 만들어 버린다.


드디어 드러나는 하우스의 비밀.


환자는 하우스에게 왜 다리를 저느냐고 묻는다. 하우스는 허벅지 근육에 경색이 온 것이라고 말한다.


"치료 방법이 없었던 건가요?"


"아주 많았어. 진단을 제대로 내리기만 했다면... 하지만 증상은 단순한 통증 외엔 없었어. 근육이 죽어나가는 병을 경험하는 의사는 많지 않으니까."


"당신이 죽는다고 생각했나요?"


"죽었으면 하고 생각했지."


"그래서 사무실에 숨어서 환자 얼굴 보기를 거부하시는군요. 사람들이 그렇게 쳐다보는 게 싫으니까요."


하우스는 자격지심이 강한 인물인 것이다. 자신이 최고의 의사면서 자신의 병명을 알아내지 못해 다리를 절게 된 아이러니. 그게 너무 부끄러운 사람. 남을 그렇게 잘 치료하면서 정작 자신은 치료 못한 의사. 그래서 그는 환자 앞에 나서지 못하는 것이다.


여기서 감정이입의 공식 중 하나를 떠올려 보자.


아리스토텔레스 형님께서, 자신이 저지른 일로 인해 자신이 대가를 치를 때 시청자는 가장 강력하게 감정이입을 한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나 . 하우스는 '중이 제 머리 못 깍는다'는 말처럼 자신의 병을 제대로 치료못해 다리에 장애를 가진 인물인 것이다. 강력하기 이를 데 없다.


또한 주인공은 결함을 지니고 있어야 하는데, 하우스의 결함은 '모든 환자들은 거짓말을 한다'는 부정적인 생각이다. 이는 의사이면서도 자신의 병을 제대로 진단하지 못하여 다리를 절게 된 과거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컴플렉스 때문에 환자를 못 만나는 것인데, 그것을 환자들의 거짓말이라고 쉴드를 쳐온 것이다. 이 사실이 드러나는 순간부터 시청자는 하우스를 시리즈 내내 응원하기 시작했다.


이야기의 주제는 주인공의 결함과 연결돼 있다.


하우스의 주제는 간단하게 말하면, 결함을 고치는 것이 고치지 않는 것이 낫다인데, 이것을 그럴 듯하게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인간은 결함투성이지만, 그 결함을 인정하고 직면할 때 비로소 구원받는다.


하지만 <하우스>의 주제는 구현될 듯 말듯하면서 구현되지 않는다. 시즌형 드라마의 경우, 주제가 구현돼 버리면 그것이 곧 마지막 회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닥터 하우스의 캐릭터 구축은 마침표를 찍는다.


이후 이야기는 여전히 레베카는 치료를 거부한 상태에서 하우스 닥터 팀은 몸에 촌충이 있다는 증거를 제시하고, 고작 알약 두 알로 레베카의 병을 완치시킨다.


에필로그 두 개.


병원에 기부금을 많이 내는 환자(하우스가 이혼 변호사를 알아보라 했던)가 원장을 만나 하우스 얘기를 꺼내자, 하우스를 해고하라는 걸로 지레 짐작한 원장은 그 어떤 일이 있어도 하우스는 해고하지 않을 것이며, 그 이유는 하우스가 최고의 의사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원장의 캐릭터도 멋지다(그녀는 멘토를 겸하고 있다). 근데 사실은 그 환자는 하우스 말대로 이혼을 하고 온 것이다. 하우스도 멋지다.


또 하나는 하우스가 장난으로 처방한 알약(사탕)을 재처방받으러 온 환자. 플라시보 효과를 본 그 환자에게 다시 알사탕을 처방하기 위해 윌슨에게 1달러를 빌리는데서... 파일럿 끝.


정말 충격적으로 잘 쓴 대본이었다. 우선 이 많은 내용을 44분의 파일럿 대본 안에 욱여넣은 것이 정말 놀라운 수준이다. 또한 한 회에 걸쳐 캐릭터를 정말 잘 구축했다. 내가 심사위원이라 했어도, 이걸 보면 에피소드가 100개 이상 나올 거라 판단했을 것이다.


이래서 파일럿을 쓰는 사람을 크리에이터라 하는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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