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식 08 : 감정이입

감정이입은 어떻게 이뤄지는 걸까?

by 이기원

내 어릴 적 별명은 '안방 샌님'이었다. 지극히 내성적이라 밖에 나가 놀지 않고 집에 처박혀 있어서 붙은 별명이었다. 집에서 나는 책만 줄곧 읽어댔다. 하지만 그리 넉넉한 집안이 아니어서 맨날 같은 책을 보고 또 보아야 했다. 이것이 내 유년 시절의 모습이었다.


당시 내가 제일 부러웠던 사람은 집에 책이 많은 아이들이었다. 나는 그런 아이들과 친구가 되기 위해 어렵게 용기를 내곤 했다. 그래서 친구의 집에 놀러 갈 때면 너무 행복했다. 저녁이 되어 집으로 돌아가야 할 때까지 정말 열심히 책을 읽었다. 친구 엄마는 놀러 와서 장난을 안 치고 친구까지 책을 읽게 만드는 나를 기특하게 여겨주시기도 했다.


초등학교 2학년 때에는 정말 어렵게 우리 반 반장을 친구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반장은 우리 학교 고학년 담임 선생님의 아들이었다. 다른 친구들의 집에 있는 책들은 주로 형이나 누나, 또는 삼촌의 책들이었지만, 반장의 집에는 선생님 엄마의 교육열 때문인지 새 책들이 많이 있었다. 나는 집에 한 번 놀러 가고 싶다고 반장에게 여러 번 졸랐고, 결국 성공했다. 반장은 엄마가 사준 세계문학전집을 보여줬다. 반짝반짝 광채가 나는, 지문조차 묻지 않은 올 컬러판이었다.


저녁이 되었고, 반장의 엄마가 퇴근해서 오셨다. 나는 책을 읽다 말고 벌떡 일어나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그러나 선생님의 표정은 차가웠다. 나를 보고 반장을 보았는데, 내 앞에는 이미 읽은 책들이 쌓여 있었고, 친구 앞에는 집짓기 블록이 놓여있었다. 선생님은 내 손에 있던 책을 매몰차게 빼앗더니 다른 책들과 함께 장롱 속에 넣고는 열쇠로 잠가 버렸다. 그리곤 늦었으니 가라고 했다.


반장의 집에서 우리 집까지는 꽤 멀었다. 나는 울면서 집으로 돌아왔고, 엄마를 보자마자 서럽게 울었다. 울먹이며 내가 자초지종을 말하자 엄마는 나를 안아주었고, 당신도 우셨다.


몇 달 후 엄마는 곗돈을 타셨고, 그 돈으로 내게 30권짜리 고학년용 세계문학전집을 사주셨다. 그 책은 초등학생 시절 내내 나의 가장 소중한 보물이었다. 전집 중에서 <명탐정 홈즈>, <로빈슨 크로소우>, <15 소년 표류기>, <몽테크리스토 백작>, <레미제라블>은 정말 외울 정도로 읽었다(거기서 딱 한 번씩 밖에 안 읽은 책이 있었는데, 그것은 <소공녀>와 <빨간 머리 앤>이었다).


한 번은 전집 중에서 <레미제라블>을 학교에 가져가서 수업 시간에 읽다가 걸려서 선생님한테 압수를 당했다. 교과서 안 쪽에 넣고 보면 안 걸릴 줄 알았던 것이 오산이었다. 선생님한테 울면서 싹싹 빌면서 돌려달라고 했지만, 선생님은 결코 내 책을 돌려주지 않았다. 그 선생님은 한 번 압수한 물건을 단 한 번도 돌려준 적이 없는 그런 사람이었다.


나는 수업시간에 책을 봤던 일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책꽂이에서 '영구결번'이 된 <레미제라블> 자리를 볼 때마다 가슴이 쓰렸다. 전집이라 한 권을 따로 구할 수도 없었다. <장발장>이란 단행본을 사서 그 자리에 꽂아놓아 봤지만, 결코 위안이 되지 않았고 오히려 아픈 기억만 떠오르게 할 뿐이었다.




나는 어느 때부터 수많은 작법서들에 왜 '감정이입'을 다룬 챕터가 없는지 의아하게 생각해 왔다. 감정이입은 관찰자가 어떤 대상에게 자신의 마음을 투사하여 일체감을 느끼는 정신 행위로 정의된다. 따라서 감정이입은 우리가 이야기를 접할 때 그 안에 빠져들게 되는 매우 중요한 요소가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주로 주인공에게 자신의 마음을 투사해서 일체감을 느낀 뒤 그의 입장이 되어 이야기의 롤러코스터에 올라타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야기를 보면서 감정이입이 되지 않으면, 이야기에 집중도 되지 않을뿐더러 재미도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작품을 감상함에 있어서 가장 필수적인 요소가 감정이입인데, 다수의 작법 책들이 다루지 않고 있다는 것은 저자들의 책임 방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어쩌면 그들은 감정이입이 작법의 영역이 아니라, 심리학이나 인문학의 영역이라 생각했을 수도 있다. 아니면, 역시나 감정이입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저절로 알고 있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거나. 어쨌든 감정이입은 작법적 측면에서 매우 중요하고, 또한 작법서에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그나마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본격적으로 감정이입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자.


감정이입은 나와 인물 간의 동일시에서 시작되며, 동일시의 최소 요건은 인물에 대한 호감이다.


여기서 호감은 매력의 아래 등급이지만, 매력의 공식(동질감+동경심, 연민+동경심)으로 설명될 수 있다. 인물에게 강력한 매력을 느끼면 더 좋겠지만, 호감 정도만 느끼는 선에서도 충분히 동일시되며 감정이입이 이루어진다.


이 장의 앞부분에 배치했던 내 유년시절의 이야기를 보자.


책을 좋아하는 가난한 아이에게 여러분은 호감을 느꼈을 거라 생각한다. 그 나이 때 여러 분도 분명 책을 좋아했을 테니까. 하지만 더 많은 책을 읽기 위해 전략적으로 친구를 사귀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이 여러분과는 다른 그에게 있어서 동경할만한 요소이다. 여러분은 그 아이에게 호감을 느꼈을 것이고, 때문에 감정이 이입되기 시작했다. 이제 여러분은 그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궁금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우리가 감정이입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인간의 뇌에는 거울 뉴런(Mirror Neurons)이 있기 때문이다. 거울 뉴런은 관찰 또는 간접경험만으로도 마치 내가 그 일을 직접 하고 있는 것처럼 반응한다는 신경세포이다. 즉, 슬픈 장면을 보면 눈물이 나고, 에로틱한 장면을 보면 흥분이 되며, 액션 장면을 보며 통쾌한 기분이 드는 것이 모두 이 거울 뉴런의 존재 때문인 것이다. 그리고 그 기저에는 감정이입이라는 필요조건이 깔려있어야 한다.


내가 작법서들에 감정이입을 다룬 장이 꼭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계기가 된 것은 마이클 티어노의 <스토리텔링의 비밀>을 보고 난 후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노골적으로 리메이크한 이 작법서에는 '감정이입'이란 챕터도 없고, 감정이입이라는 용어도 없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인용한 말로 인간이 언제 감정이입을 하는지 소개하고 있다. 그 내용을 내 식으로 정리하면 이렇다.


우리는 인물이 연민을 자아내게 하거나, 공포를 느낄 때 그 인물에게 감정이입을 한다. 연민은 누군가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 생기고, 공포는 우리도 그런 불행을 겪을 수 있다고 느낄 때 생긴다.


내 유년시절의 추억담으로 돌아가 보자.


반장의 집에 놀러 가 저녁때까지 책을 보던 아이는 선생님인 반장 엄마가 돌아왔을 때 봉변(?)을 당하고 만다. 읽고 있던 책을 빼앗긴 것도 모자라, 보는 앞에서 모든 책들이 장롱 속에 넣어지는 수모를 당하고, 집에서 내쫓기기까지 한다.


이 부분을 읽었을 때 여러분의 머릿속에는 이런 생각이 스치지 않았을까?


'책 도둑은 도둑도 아니라는데, 훔친 것도 아니고 아들보다 조금 먼저 봤기로서니 그런 짓을 하다니! 못 됐다. 게다가 그 엄마의 직업은 학교 선생님이 아닌가!'


만약 이랬다면, 그 아이에게 감정이입이 된 것이다. '이런 XX!'하고 욕설을 내뱉었다면 감정을 과몰입한 것이고.


이렇듯 아리스토텔레스 말마따나 우리는 '연민'을 자아나는 사람, 즉 부당한 대우를 받는 인물에게 감정이입을 하는 것이다. 우리가 접하는 이야기 중에 대부분은 이처럼 주인공에게 호감이 생길만하면 바로 부당한 대우를 받는 장면이 나온다. 직장 상사에게 아이디어를 빼앗기거나, 억울하게 누명을 쓰거나, 힘이 센 자에게 이유도 없이 맞거나, 문자 메시지로 해고를 당하기도 한다. 그 이유는 단 하나.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을 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감정이입을 시키는데, '공포'를 느끼게 하는 것은 매우 쉬우면서 효과적인 방법이다.


한 밤 중에 주인공이 귀가를 하는데 어둠 속에서 누군가 칼을 들고 쫓아온다면 우리는 주인공에게 알려주고 싶어서 안달이 날 것이다. 학교에서 쉬는 시간에 옥상에 불려 간 주인공 주위에 일진들이 둘러쌀 때 우리는 두려움에 가슴 졸일 것이다. 또한 아르바이트로 이삿짐을 나르다가 귀중한 도자기를 깨뜨렸을 때 우리는 주인공의 입장이 되어 망연자실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공포를 통한 감정이입의 결과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시학>에서 가장 강력하게 감정이입이 되는 상황을 알려줌으로써 화룡점정한다.


자신이 저지른 일로 인해 자신이 그 대가를 치를 때 사람들은 가장 강력하게 감정이입을 한다.


내 유년 시절의 이야기 끝부분을 보면, 아이는 책을 너무 읽고 싶은 나머지 해서는 안 되는 짓을 하게 된다. 수업 시간에 교과서가 아닌 책을 읽다가 압수당하는 대가를 치른 것이다. 그 대가는 매우 혹독했다. 다시는 돌려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자기가 저지른 일로 자신이 대가를 치르는 것이 왜 강력한 감정이입의 조건이 되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이런 것일 것이다. 부당한 대우가 불러오는 연민은 일회적이다. 어느 순간 잊혀진다. 하지만 나 자신의 선택에 의해 대가를 치른 일은 두고두고 후회가 되고 회한으로 남는다(나는 지금도 수십 년 전에 압수당한 책에 대한 회한이 있다. 그때 수업시간에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영구결번'은 없었을 텐데).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자신이 한 일로 대가를 치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늦잠을 잔 탓에 시험장에 못 들어가는 대가를 치렀거나, 노래방에서 노느라 어머니가 교통사고 났다는 소식을 못 받았거나, 잘못된 판단으로 전재산을 날렸거나 하는 등 말이다.


이런 식의 두고두고 후회가 되는 경험을 해본 사람은, 자신이 저지른 일로 인해 대가를 치르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본능적으로 안다. 그리고 그 후유증이 얼마나 오래 가는지도. 때문에 강력한 감정이입의 조건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야기 전체를 통틀어 끊임없이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의 기술을 계속 걸어야 할까?


그렇지는 않다. 도입부에서 주인공에게 충분히 감정이입을 시켜놓으면, 그다음부터는 주인공이 캐릭터에 맞게 선택과 행동을 잘하면 된다. 물론 가끔씩은 주인공임을 잊지 않게 하기 위해서 감정이입을 시켜줘야 하지만, 과도하면 주인공이 어리석어지는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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