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파일링 리뷰 : 휴민트

휴민트는 왜 재미가 덜할까?

by 이기원

오랜만에 프로파일링 리뷰를 해봅니다.


프로파일링 리뷰는 작가 입장에서 화제의 영화 시나리오가 왜 그렇게 쓰여져야만 했는지 제 뇌피셜로 추측해 보는 리뷰입니다. 저는 이 리뷰를 위해 영화를 단 한 번 밖에 보지 않았으며, 조금의 사실 확인도 하지 않았음을 밝힙니다. 그냥 재미로 읽어주시라는 뜻.


저는 <휴민트>를 보면서 조인성이 시나리오를 쓰기 전에 캐스팅 되었을 수도 있다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인성은 이미 <모가디슈>와 <밀수>에서 류승완 감독과 호흡을 맞춘 바 있죠. 류 감독은 <밀수>를 끝낸 뒤 주연이 아님에도 출연해서 영화를 빛내 준 조인성에게 이런 얘길 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내가 차기 작품으로 <휴민트>를 생각하고 있는데, 주연으로 조배우를 생각하고 있는데 어때?"

"그게 무슨 영화인데요?"

"국정원 직원이 블라디보스톡에서 자기 휴민트인 북한 여자를 탈출시켜주는 얘기야. 액션을 살벌하게 보여줄 생각이야."

"오, 좋아요!"


이렇게 주연배우를 확정해 놓으면, 제작 투자를 받는데 매우 유리합니다. 이런 상태에서 류감독은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지만 원래 생각했던 대로 시나리오가 흘러가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써놓고 보니, 박정민이 맡은 북한 요원이 더 주인공 같은 겁니다. 왜냐하면, 주인공은 하나의 스토리를 통해서 가장 크고 많은 문제들을 해결하는 사람이거든요. 박정민은 한 때 결혼까지 생각했던, 현재는 외화벌이 콜걸을 하고 있는 신세경과 지난 감정을 해결함과 동시에 블라디보스톡에서 탈출을 시켜야 하고, 빌런인 영사관과의 대결도 해야 하는 인물이잖아요.


근데 조인성은 딸랑 휴민트인 신세경을 구하는 문제 밖에 없는 겁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스토리를 다 뒤집고 조인성을 중심으로 다시 써야하는데, 그러면 이야기의 근간이 흔들리게 되어 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럴 때 작가(감독)가 흔히 쓰는 방법은 주인공의 멋짐을 위한 시퀀스나 출연 분량으로 보상하는 겁니다.


그래서 프롤로그에 태국에서 휴민트(다른 여자)를 구출하려다 실패하는 에피소드를 넣은 게 아닐까 합니다. 그런데 이 프롤로그도 좀 아깝습니다. 휴민트가 정말 자기 목숨을 걸고 모든 정보를 넘기면서도 헌신했음에도 구하지 못했다면 그 트라우마가 컸을 텐데, 정보를 얻어내는 도중 갑자기 흥분한 휴민트가 발작을 하면서 산통이 깨지거든요. 이유가 어떻든 간에 여자의 잘못(!)도 있기 때문에 관객이 느끼기에 조인성이 가지는 트라우마에 깊게 동의못하는 측면이 있을 것 같아요.


좀 심파이긴 하지만, 그 죽은 휴민트는 조인성에게 선물로 팔찌까지 준 사람이잖아요. 기왕에 팔찌 에피소드를 썼으면, 그 휴민트가 조인성을 좋아했었고, 정말 위기에 순간에 자기를 버리고 조인성에게 목숨을 살리라고 보내줬으면 어땠을까 싶습니다. 그랬다면, 그 프롤로그는 조인성에게 트라우마로 깊게 남아있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지금의 그 프롤로그는 굳이 있어야 할 필요가 없었을 것 같습니다. 그 정도의 프롤로그라면, 나중에 누군가 조인성에게 그냥 대사 한 마디로.


"너 전에 태국에서 휴민트를 못 살렸던 것 때문에 지금 이러는 거 아냐?'

"아니야! (강한 부정)"


이런 식으로 처리해도 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랬다면, 한국에 돌아와서 보고하고, 블라디보스톡으로 근무를 떠나는 그다지 영양가가 있어 보이지 않는 브릿지 시퀀스도 필요없었을 거구요.


어쩌면, 류감독은 박정민을 주인공으로 애써 쓰지 못한 이유는 북한 요원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것이 흥행적인 측면에서 좋지 않을 거라 생각을 했을 것 같습니다. 충분히 이해가 가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조인성을 계속 주인공을 밀어부치는데, 조인성이 블라디보스톡에 와서 딱히 하는 일이 없는 게 문제입니다. 기껏해야 신세경을 휴민트로 포섭해서 정보를 얻어내는 건데, 그 정보라는 것이 관객들이 보기에 그리 대단해 보이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신세경이 대단한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아리랑 식당의 여급이면서 외화벌이 콜걸이니까요. 즉, 조인성이 하는 일이 뭔가 대단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것은 주인공의 매력도를 떨어뜨리는 이유가 됩니다. 주인공은 정말 중요한 일을 하는 것처럼 보여야 합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류감독은 후반부에 서로 적대적인 남과 북의 요원이 합심하여, 결국엔 신세경을 러시아 마피아로부터 구출해 내는 엄청난 액션 시퀀스 30분 동안 보여주면 될 거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정말이지, <휴민트>의 라스트 액션 시퀀스는 정말 입이 쩍 벌어질 정도로 끝내줬습니다. 역시 명불허전 류승완이라는 말이 절로 나왔습니다.


근데, 그 액션 시퀀스가 끝나고...


왠지 모를 공허감이 몰려들더라구요. 그러면서 재미가 왠지 덜하다라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저는 재미있으면 왜 재미있는지, 또 재미없으면 왜 재미없는지 생각해 보는 버릇이 있어서 한참을 생각해 봤습니다.


그리곤 나름의 결론을 내렸습니다.


근데, 그 결론을 말하기 전에 미국 프로레슬링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저는 한때 미국 프로레슬링에 빠져 있었습니다. 매주하는 프로레슬링을 보는 것은 공짜입니다. 레슬러들은 단순히 경기만을 하는 게 아니라, 갈등을 쌓아갑니다. 프로레슬링에는 부커라는 각본가들이 있는데, 이들이 각본을 짜는데, 그 각본이 실로 절묘합니다. 레슬러의 현실과 픽션을 절묘하게 섞거든요. 가령, 누가 자기 애인인 여자 레슬러와 몰래 바람을 핍니다. 그것을 알게 된 피해자(?)는 바람피는 상간남의 경기에 난입해서 경기를 지게 만듭니다. 그러면 그 상간남이 이번엔 피해자를 지게 만드는 식으로, 서로 주고 받으며 여자를 두고 갈등을 쌓아가고, 그 골을 깊어만 갑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시청자들은 애인도 뺐기고, 경기도 지게 되는 피해자를 응원하게 됩니다. 상간남이 애인과 합세해서 그의 경기를 망쳐놓거든요. 그러다 그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피해자가 링에서 마이크로 상간남을 불러냅니다.


"너 나랑 다음 주에 있는 경기 <노 머시>에서 한 판 붙자."


<노 머시>는 페이 퍼 뷰(pay for view)로 돈을 내고 보는 프로그램입니다. 지난 몇 주 동안 갈등을 쌓아왔던 두 레슬러가 드디어 결판을 내기로 했는데, 돈을 내고 봐야 하는 겁니다. 피해자 레슬러에 감정을 이입했던 시청자들은 기꺼이 돈을 지불하고 페이 퍼 뷰를 봅니다. 그러면서 피해자와 상간남의 피터지는 레슬링을 보면서 스트레스를 제대로 풀게 되는 거죠.


만약, 갈등을 제대로 쌓아올리지 못하고, 레슬러에게 감정이입을 제대로 못 시켰다면, 시청자들이 돈을 내고 그 결판을 보려할까요? 아마 본다 하더라도 그다지 재미를 못 느꼈을 겁니다.


자, <휴민트>를 보겠습니다.


신세경을 구출하러 갈 때 두 주인공인 조인성과 박정민에게 갈등이 있었을까요? 둘은 서로 만난 적조차 없었습니다. 둘의 남과 북이라는 적대성만 가지고는 갈등이라고 말하기엔 너무 미약합니다.


그런 상태에서 액션에 들어가는데, 이것이 만약 레슬링처럼 페이 퍼 뷰라면, 관객들이 거기서 돈을 내고라도 볼까요?


관객들은 액션을 보고 싶어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액션에 실린 감정을 경험하고 싶어합니다. 주인공이 총을 쏴서 적을 죽이면 내가 그런 거 같아 희열을 느끼고, 총에 맞으면 내가 맞은 것처럼 고통스러워 합니다. 그리고 감정이입은 한 명에게 국한되지 않습니다. 우선 순위가 있겠지만, 여러 명에게 감정이입을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조인성과 박정민이 이야기 시작부터 갈등을 쌓아왔고, 그러는 과정에서 관객이 감정이입을 했는데, 둘이 신세경 때문에 러시아 마피아 본부로 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신세경을 구출하는 것도 구출하는 거지만, 그 중에 조인성과 박정민이 서로를 먼저 죽이지 않을까 걱정되지 않을까요?


스티븐 킹이 말했습니다. 내 이야기의 비결은 주인공을 불안하게 하는 것이라고요.


그런데, <휴민트>를 보면 조인성이 가고, 박정민이 가니까, 이제 구출되겠네하고 안심이 되더라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첩혈쌍웅에서처럼 서로가 총을 겨누는 장면에서 '어머, 어떡해?'하는 감정이 나오지 않고, '저거 첩혈쌍웅 우리까인데.'하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원래, 스토리는 결말부터 생각하고, 그 결말에 가장 효과적인 프롤로그를 쓰는 겁니다.


그렇다면, <휴민트>는 어떻게 프롤로그를 썼어야 했을까요?


태국에서 휴민트를 놓고, 조인성과 박정민이 대차게 싸우는 시퀀스였으면 어땠을까요? 그 과정에서 휴민트가 죽고, 박정민에게 총까지 맞아 부상당한 조인성이라면요. 그러면 휴민트를 죽게 만든 트라우마와 박정민에 대한 개인적 원한이 동시에 충족되겠죠.


조인성이 블라디보스톡에 왔을 때 신세경만 가지고 정보를 빼낼 게 아니라, 빌런인 영사관(박해준)과도 대립을 해야 했습니다. 그래야 박정민에게 몰빵된 갈등을 일부 가져올 수 있으니, 좀더 주인공처럼 보일 수 있거든요. 그리고 박정민은 박해준을 조사하러 온 게 아니라, 박해준이 조인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북에서 불러온 요원 정도면 어땠을까요? 관객들은 그 둘의 재회를 기대하게 되지 않을까요?


그 둘이 만나 한딱까리 하면서 더 갈등을 키운다면 어땠을까요?


게다가 박해준은 이미 신세경이 박정민이 애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서, 박정민을 불러 이용한다면, 결국 그는 박정민에게도 적이 되는 거죠.


그러면 후반부 대 액션 시퀀스에서 조인성과 박정민 사이의 갈등이 어떻게 터질까 걱정이 되고, 그 사이에서 신세경의 운명도 불안해지고, 나중에 공동의 적인 박해준을 제발 죽여줬으면 하는 바램까지 더해져 더 극적이지 않았을까요?


<휴민트>를 보고 나서 한참 머리를 굴려보니, 이런 생각이 들더라 이 말입니다.


어디까지나 저의 뇌피셜이었습니다.


이의가 있으시면, 당신이 옳습니다. 저는 이 글로 당신과 논쟁하고 싶지 않습니다.


뱀발. 여성 관객들을 분노케 했던 러시아 마피아가 투명 부스에 여자를 넣어서 경매에 부치는 아이디어는 리암 리슨의 테이큰에서 나왔던 장면의 우라까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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