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tel's Tea Time_Ep.2
영감의 시발점은 카피에 있다
나는 똥을 만드는 사람이었다
처음 마케팅, 광고 쪽에 관심을 갖고 일을 시작했을 때 느꼈던 좌절감은 여전히 생생하다. 마케팅 뭐, 대충 트렌드에만 익숙하면 뚝딱뚝딱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카드뉴스? 포스터? 그냥 보기 좋고 깔끔하게만 만들면 된다고 생각했었다. 나름 트렌드에 익숙하고 머리도 쌩쌩 잘 돌아가던 스무 살이었고, 미술 수행평가에서 매번 A를 맞았으니 이 정도면 디자인 감각도 충분히 있을 거라는 요상한 근자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들 예상했겠지만 그 자신감은 생애 첫 포스터를 만들 때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냉정하게 말해서 나에게는 디자인적인 재능도, 감각도 없었다. 그땐 정말 20년 동안 자신해왔던 모든 것이 무너져내리는 기분이었다. 평소에 PPT를 제작하고 발표하는 것에 익숙했기에 '포스터? 별거 아니지ㅋㅋ'라고 쉽게 생각했던 게 실수였다. 어쩌자고 내가 홍보부에 와서. 막상 포스터를 만들려니까 점 하나도 찍지 못한 채 멍하니 1시간이나 보냈다. 뭔가 단단히 잘못됐음을 느꼈다.
그래도 나에겐 일주일이라는 기간이 주어졌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아이디어가 떠오르겠거니 하며 마음을 놨는데, 그렇게 고민 고민하다가 만들어 낸 게 똥이더라. 그런데 그런 엉망진창인 내 포스터를 보고, 당시 부서 총책임자였던 선배가 10분 만에 뭔가를 톡톡 건드리며 그럴싸한 포스터를 만들어내는 과정을 목격했을 때의 충격 또한 생생하다.
세상에 같은 궁서체는 없다
미세하게 뉘앙스만 건드렸다고 생각했는데 한층 깔끔해진 포스터의 분위기와 퀄리티에 정신없이 질문을 던졌고, 그때 선배가 했던 말. "오소리1 아, 이 세상에 같은 궁서체는 없어." 이 말은 나의 마케팅 인생에서 지우지 못하는 말 중 하나이다. 세세한 감각과 센스. 타고났다면 정말 좋았겠지만 앞서 말했 듯 나에게는 그런 재능이 없었고, 이 말을 해준 선배 또한 타고난 사람은 아니었다고 한다.
그저 많은 것을 참고했고 새롭게 보고자 했다고. 처음에는 이 말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래도 참고를 하라니 길거리에 걸려있는 광고, 포스터, 간판 등을 의식하면서 걷기 시작했고, 마음에 와닿는 디자인이나 문구가 있으면 사진을 찍어서 남겼다. 또한 궁서체들 간의 미묘한 분위기를 읽어내고 적제적소 필요한 곳마다 삽입하는 것에 익숙해지기까지 폰트 유목민 생활을 하며 참 많이 방황했다.
그래서 디자인 실력이 좋아졌는가? 그것도 아니었다. 약 1년이라는 시간 동안 좋아지겠거니- 하면서 작업을 해도 눈에 띄는 변화는 없었다. 그러다 21살이 되던 해, 컴퓨터 파일을 정리하다가 20살 초, 처음 작업했던 포스터(똥)를 발견했는데, 그동안 해왔던 노력들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걸 알았을 때의 전율이란... 그리고 정확히 1년 후, 대학교 축제 메인 포스터에 내 작업물이 걸렸다.
우리는 어떨 때 영감을 받을까?
서론이 길었다. 오늘 TT 주제는 '영감을 얻고 활용하는 방법'이었는데, 그냥 문득 저 때가 생각났다.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하자면 Jason은 영감은 통찰력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통찰력은 쉽게 말하면 머릿속에 레시피가 많아진 것으로, 차곡차곡 쌓아 놓은 레시피들을 응용하여 새롭지만 공감되는 유의미한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능력이라고 말했다. 마치 음식을 많이 먹어본 사람들이 인스타그램에서 음식 사진만 봐도 대충 맛이 느껴지는 것과 비슷한 원리랄까?
그렇다면 영감은 어떻게 하면 받는 걸까? Jason은 영감을 얻는 과정이 전부 논리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30대까지의 Jason은 책 속의 사례와 논리에서 영감을 찾았다고 한다. 하지만 논리적으로 접근하기에는 특별함을 찾을 수 없었던 한 프로젝트를 맡으며 '때로는 프레임이 잡혀있지 않아도 직감적으로 결정하는 방식이 필요하다'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제품에 대한 영감을 얻을 때 같은 시장을 아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같은 시장에서 벗어나 다른 시장으로 눈길을 돌리면 아이디어의 퀄리티가 달라진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를 "Got Milk" 캠페인 중 가장 알려진 캠페인, '우유 콧수염'을 예시로 설명했는데, Got Milk 캠페인은 보젤 사의 작품으로 안젤리나 졸리, 데이비드 베컴 등 건강하고 관능적인 이미지를 가진 스타들이 우유를 마신 후 입술 위에 하얗게 콧수염 모양으로 자국이 남는 것을 강조한 광고이다. 스타들의 얼굴을 클로즈업한 광고는 기존에도 존재했다.
면도기 광고라던가, 화장품 광고라던가~ 하지만 같은 기법을 사용했지만 유독 이 광고가 아직까지도 소비자들의 기억에 각인된 이유는, 기존의 우유 광고 시장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생소함 때문이었다. 면도기 광고에서 유명 스타들이 면도크림을 콧수염으로 그린다고 해서 그걸 신선하다며 기억해주는 사람이 있을까? 해보지 않아서 모르겠긴 하지만 우선 난 그냥 스쳐 지나가는 흔한 광고라고 느꼈을 것 같다. 즉, 우리가 여전히 콧수염 광고를 기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생소한 것에서 익숙한 것을 찾고, 익숙한 것에서 생소한 것을 찾은 덕분에 발견할 수 있었던 신선함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어떤 미디어에게도 관대하지만 책을 두려워한다.
Jason은 영감을 얻기 위해 스테디셀러를 읽어볼 것을 추천했다. 단순히 다독을 하라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살면서 인생 책 10권만 갖고 있어도 된다고 했다. 대신 책을 일을 때, 오랜 기간 꾸준히 사랑을 받아온 작가는 어떠한 주장과 논리구조를 사용하며, 어떤 언어를 사용하는지에 대한 메커니즘을 외우고 느끼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리고 이런 메커니즘을 나만의 것으로 습득하는 과정에서 효율적인 프로세스 구축이 가능하다고 했다. 그러니 효율적인 프로세스를 갖추고 영감을 얻기 위해서는 지금의 비효율적인 순간이 필수이니, 조금은 비효율적이라고 느껴지더라도 경험이 쌓이기 전까지 인정하고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가장 기억이 남는 말은 "사람들은 어떠한 미디어에게도 관대하지만 책을 두려워한다, 우리는 책을 조금은 무시해도 된다." 라는 말이었는데, 되돌아보면 어렸을 때는 하루에 한 권 씩은 책을 읽는 것이 소확행일 정도로 책을 좋아했는데, 지금은 책만 보면 잠만 오는 게 어쩌면 마음가짐의 차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 좋은 건 다 아는데 언제부터 나는 책을 두려워했을까?
마무리
Jason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는데, 참 뭐든 타고나지 않으면 구르는 게 최고인 것 같다...ㅎㅎㅎ 구른다는 표현이 조금은 부정적인 것 같기는 하지만, 좋게 말하면 차근차근 노력하면 뭐든 할 수 있다?! 아니 근데 오히려 타고나면 한 가지 메커니즘으로만 살아서 한계가 있지 않을까? 노력형 인간 꽤나 괜찮을지도? (라며 오늘도 위안을 삼아 본다^0^) 그래도 영감은 아예 새로운 곳에서 오는 것이 아닌, 기존에 존재하는 것들의 생소함에서 나온다는 말은 계속 여운에 남는다. 되돌아보면 나도 처음 디자인을 시작할 때, 카피부터 시작했고, 처음 글을 쓸 때도 유명한 작가들이 쓴 작품 구성을 카피하면서 글에 대해 이해했던 것 같다. 결국 마케팅이나 기획도 이와 비슷한 것 같다는 생각이 오늘에서야 들었다. 이제는 와닿는 마케팅을 발견하면 '대단하다'라는 생각에서 끝내지 않고, 활용할 수 있도록 그 안에 담긴 이야기에 집중하는 연습을 해봐야겠다:)
오프 더 레코드
조금은 부끄러운 얘기지만 초반에는 '영감'을 얻는 방법이라길래, '영감'이라는 단어에 꽂혀 혼자서 "영감~ 왜 불러~"이러면서 키득거렸다...ㅎ 나는 오늘 Jason을 두 번째 만났었는데(참고로 Jason은 우리 회사 대표님의 영어 이름!), 첫 번째 만났을 때와는 또 다른 분위기를 가지신 분이라 놀랐다. 조금은 무섭고 냉정할 것 같은 분이셨는데, 오늘 느낀 건 생각보다 더 단단하고 무게감 있는 사람 같았달까? 그리고 더 놀라웠던 건 회사 사람들이 Jason을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보통 회사 대표님이라고 하면 긴장해서 굳거나, TT가 업무와 관계된 건 또 아니니까 대충 참여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다들 집중해서 질문하고 기록하는 모습에서 이 그룹에게 Jason이 어떤 존재인지 새삼 와닿았다.
되게 특이하고 뜬금없게 들릴 수도 있지만 나는 우리 회사를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놀란다. 이러면 누가 시켜서 쓴 것 같아서 쓰지 말까 했지만 '어떻게 이런 사람들끼리 조직을 만들어서 뭉칠까?'라는 생각을 한 두 번 한 게 아니다. 서로 간의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한 마케팅이라는 팀 특성 때문일까? 서로에 대한 존중이 베이스로 깔려있는 것은 물론이고, 흘러가는 말도 허투루 듣지 않고 고민해주는 사람들이다. 아직 일한 지 3주 차 밖에 안 된 병아리 인턴이지만 그냥 내가 본 조직 중 가장 이상적인 느낌을 주는 조직 관계인 것 같달까? 뭐라고 말로 표현하긴 어려운데 암튼 또 생각이 많아졌다.
본 포스팅은 마케팅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오소리 1'이 'TT(Tea Time)'에 참여하여 느낀 점을 기록하는 일종의 인턴 일기 형식으로 진행됩니다:)
* 여기서 'Tea Time'이란? = Jason(CEO), Chris(CXO)와 함께 [업무 효율화 TOOL, 커뮤니케이션 기술, 트렌드, Jason의 Q&A 등]의 주제로 가볍게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입니다.
▶ ▶ ▶ ▶ ▶ ▶ ▶ 라텔앤드파트너즈의 포트폴리오가 궁금하다면?!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