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당탕탕 할머니
두 달 전 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했다. 정부의 부동산 대책으로 모든 매물 자체가 품귀했던 상황에 마침 비어 있는 곳을 선택의 여지없이 급하게 결정을 했다. 낯선 환경에 조금씩 적응해가고 있는데, 윗 층에서는 밤 10시가 넘으면 ‘우당탕탕’소리가 난다. 무언가를 끌고, 못을 박는 소리도 나고, 발소리도 쿵쿵 울린다. 잠을 자려다가 그 소리가 너무 불편해서 윗 층으로 올라가고만 싶다.
이전에는 겪어보지 못한 상황 속에서 몸도 마음도 화가 나는 불편한 감정 속에서 읽은 이 책은 아래 층 할머니와의 ‘층간 소음’의 문제로만 읽혔다. 그러나 다시 읽어보니 전통적인 4인 가구와 1인 가구의 이야기로 들려진다.
이 책에서 만나는 할머니는 다른 그림책에 등장하는 할머니처럼 인자하고, 넉넉하지 않다. 윗 층에 새로 이사 온 가족들의 생활 소음에 기다림도 배려도 없이 큰 소리로 야단치고 화를 낸다. 윗 층의 가족들에게도 많은 변화가 있다. 집에서 편안하게 쉬고 누려야 하는데, 할머니로 인해 모두 우울하다. 아이들은 생쥐처럼 살금살금 걷고, 속닥속닥 말하더니 결국은 생쥐만큼만 먹겠다며 아이다운 모습을 잃어가며 침묵 속에 살아간다.
할머니는 정돈된 거실에서 자신을 단정하게 꾸미고 우아하게 차를 마신다. 거실과 침실에는 사진인지 그림인지 모를 자신의 초상화가 많이 걸려있다. 가족의 모습은 사진에서도 보이지 않고 지금까지 타인에게 방해받지 않고 혼자 살아가는데 익숙한 것 같다. 발목에 파스를 붙이고 약간 불편하게 걷지만, 모피코트를 차려입고 우아한 외출을 한다.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듯하다. 하지만 스치는 사람은 많아도 마음을 주고 받는 사람은 별로 없는 우리 사회의 한 단면처럼 비춰진다.
귀가한 할머니는 너무 조용한 윗 층이 궁금해서 위태롭게 의자에 올라가 위층을 향해 귀를 쫑끗 세운다. 하지만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자, 귀만 이상하게 길어진다. 할머니를 찾아온 의사는 위층에 사는 가족에게 “제발 시끄러운 소리를 내달라”며 부탁을 하라고 한다. 아이들이 아이답게 뛰어놀고서야 할머니의 괴상한 귀는 정상이 되었다.
그림작가 카롤리네 케르의 그림은 덧바르고 덧칠한 느낌이 독특하다. 위층 가족의 무표정한 모습은 뒤에 아래층 할머니와 화해했을 때에 보여지는 밝은 얼굴과 대조가 되어 가족의 심리의 변화를 잘 묘사하고 있다. 독특하고 생생한 그림을 통한 이야기가 보다 사실적 으로 다가왔는데, 할머니의 침실에 잔뜩 걸려있는 그림을 보면서 도난당했다가 다시 발견한 클림트의 ‘여인의 초상’이 떠올랐다.
1997년 2월, 이탈리아 피아첸차의 리치오디 미술관에서는 전시실에 있던 클림트의 작품이 홀연히 사라졌다. 클림트의 말년에 완성한 그의 대표작이 사라졌고 결국 찾지 못했다. 그로부터 23년 만인 2019년 12월 미술관에서 한 정원사가 담쟁이덩굴을 치우다가, 금속 재질의 작은 문을 발견했는데, 그 안에서 검은 쓰레기봉투에 담긴 ‘여인의 초상’을 찾게 되었다. 미스터리 영화 같은 이 이야기는 실제로 일어난 이른바 ‘클림트 그림 도난 사건’이다.
클림트는 많은 초상화를 그렸는데, 그 대부분이 사교계 여성들의 초상화였다. 이들의 초상화는 거의 화사하고 화면 장식이 풍성한 색채로 당시 클림트의 초상화를 갖는 것이 로망이었다고 한다. 클림트는 오스트리아의 유명한 화가로 황금색의 화려한 그림으로 현재까지도 대중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아버지는 금세공업자이자 조각가였는데, 클림트의 작품에 자주 보이는 황금빛의 수공예 작업은 아버지의 영향이라는 전문가들의 견해이다.
넉넉치 않은 집안 형편 때문에 14살이 되던 해에 학교를 그만 두었지만, 빈의 국립 응용미술학교에 입학하여 그림과 수공예적인 장식 수업을 받으며 직업 화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졸업 후 공공건물에 벽화를 그리는 일을 했고 각종 중요한 건축물과 공공시설에 장식화를 그리며, 건축 장식 미술의 대가로 인정받는다. 그는 전통미술에 대항해 빈 분리파를 결성하기도 했으며 여성 이미지와 찬란한 황금빛, 화려한 색채를 특징으로 성, 사랑, 죽음에 대한 많은 작품을 남겼다.
초상화는 사람을 두드러지게 나타내어 그린 그림이다. 사람이 등장해도 신화나 전설, 또는 상상 속의 인물은 초상화가 아니다. 초상화는 한 사람, 그 사람 자체가 두드러지는 그림이다. 초상화는 그리기 힘든 그림이라고 한다. 사람의 내면을 가장 그 사람답게 그리는 그림이기에 초상화를 그릴 때도 용기가 필요한 것 같다. 그림책의 초상화에서는 외로워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살아온 다양한 표정의 여성을 보여 진다.
분실되었던 그림을 되찾았을 때 그 초상화의 주인공은 더 이상 그 모습이 아닐 것 같다. 23년이 지난 세월의 흐름만큼 중년을 훌쩍 지나 모든 것으로 초연해진 그녀는 자신을 담담하게 마주하게 된다. 그림책의 할머니는 젊은 시절 클림트의 초상화의 매력적인 여인으로 겹쳐진다. 잃어버린 시간 속에 할머니는 이제는 위층의 살아있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외로운 존재가 되었다. 할머니에게 필요했던 것은 층간 소음을 빌미로 좋은 이웃으로 함께 하고 싶은 것이 역설적으로 반영된 것은 아닐까 싶다. ‘거리 두기’란 이름으로 그 어느 때보다 외롭고 쓸쓸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느껴진다. 스치는 사람은 많아도 마음을 주고받는 이웃이 그립고, 마음이 배고플 때 누군가의 손길이 기 다려진다.
다시 원고를 정리하려고 책상에 앉았는데, 어디선가 첼로 소리가 들린다. 내가 좋아하는 첼로를 이사 와서 듣게 되다니 너무 기분이 좋았다. 윗 층에서 첼로를 연주하나 보다. 밤에는 요란한 소리를 내지만, 좋아하는 악기 소리를 들으니 친근하게만 느껴졌다. 좋은 이웃이 되고 싶다. 어쩌면 좋은 이웃을 벌써 만났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