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
나는 도서관이 좋다. 정말 도서관이 좋다. 창 넓은 도서관에서 활자를 통해 오롯이 나를 만나는 시간을 좋아한다. 가장 즐겨하던 공간이 코로나19로 폐쇄되었던 상황은 많이 아쉽고 슬펐다. 오래 전, 대학원 진학을 위해 몇 년 동안은 매일 도서관에 갔다. 구석진 좌석에 앉기 위해 개관시간 이전에 도착하여 앞줄에 서서 기다렸다. 말 한마디 없이 문 닫는 시간까지 있었다. 집에서는 잠만 자고 다시 도서관으로 향하는 일상이었다. 공부하다가 지치면 서가에 들려 제목만을 읽으며 마음을 달랬다.
치열하게 공부해서 원하는 대학원에 진학하였고, 또 다른 과정의 졸업논문을 위해 다시 도서관에서 집중했던 시간들이 떠오른다. 도서관은 준비와 마무리의 공간이고 온전히 나를 만났던 삶의 터전이었다. 지금도, 도서관을 이용할 때마다 많은 신세를 지고 있으며, 도서관에 많은 빚을 지고 있는 사람이다.
몇 해 전 미국여행 중에도 뉴욕공공도서관에서 책을 읽을 생각에 마음이 설레었던 기억도 있다. 우리나라 뿐 아니라 이 세상에는 가고 싶은 도서관이 참 많다. 다양한 그 곳을 좋아하는 나에게 도서관은 좋은 친구가 되어 손짓한다.
내가 좋아하는 <도서관>이란 그림책을 펼치면 얼굴은 보여주지 않고 책 읽기에 몰두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펜과 잉크를 사용한 은은한 수채화로 표현된 순정만화를 떠올리게 되는데, 글 작가 사라 스튜어트의 남편인 데이비드 스몰의 작품이다. 글과 그림의 조화가 마치 오래 살아온 부부처럼 자연스럽게 융화되어 빛나고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속표지 옆에 '엘리자베스 브라운 전기'라고 적혀 있다. 주인공의 이름이다. 영국의 현존하는 여왕 엘리자베스가 떠오르는 주인공은 황새가 아기를 물어다 주듯이 하늘에서 뚝 떨어져 내리는 것으로 이 땅에 태어난다.
곱슬머리에, 마른 몸매를 지닌 엘리자베스는 가늘고 흰 손가락으로 책을 잡고 넘긴다. 다른 여자아이들이 좋아하는 인형 놀이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러나 책 읽기는 아주 어려서부터 배웠고 믿을 수 없을 만큼 빨리 읽는다. 잠잘 때도 늘 책을 끼고 누워 있고, 손 전등이 있는 이불을 텐트처럼 세워놓고 잠들 때까지 책을 읽는다. 언제나 어디서나, 날씨와 상관없이 그녀는 책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 천장에 닿도록 사방에 쌓인 책더미에 앉아서 책을 읽다 보니 눈도 나빠진 것 같다.
기숙사에 들어갈 때도 트렁크 가득 책을 가져가서, 침대 프레임이 무너졌다. 수업시간에도 선생님 말씀에 집중하지 못하고 책과의 대화에 몰두해 있다. 새벽녘까지 춤추는 데이트보다 엘리자베스는 밤새도록 책을 읽는 것을 더 좋아했다. 그러던 어느 날 기차를 탔다가 길을 잃어버린 그녀는 낯선 곳에 정착하여 아이들을 가르치며 살게 된다. 이야기지만 자신의 삶을 이렇게 쉽게 결정하다니 놀랍기만 하다. 결정을 미루면 책 읽는 시간이 줄어들까봐 고민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엘리자베스는 책을 읽고, 또 읽는다. 책은 계속 쌓이고 쌓여서 그 무게로 책장이 주저앉았다. 책이 너무나 많아져 현관문까지 막아 버렸지만 책 읽기는 계속되었다. 그녀는 책을 단 한 권도 구입할 수 없는 현실 속에 잠시 책 읽기를 멈추고 주변을 바라본다. 책 읽기를 좋아했던 어린아이는 어느새 중년을 지나 노년이 되어 있었다. 책과 함께 인생을 살아온 그녀는 “나, 엘리자베스 브라운은 전 재산을 이 마을에 헌납합니다.”로 삶을 한 단계 마무리하고, 그녀의 집은 ‘엘리자베스 브라운 도서관’이 된다.
나는 몇 년 전에 여고생들과 한 학기 특별활동 수업을 진행했었다. 요즘 청소년들의 삶 속에 살짝 들어간 시간이었다. 그림책을 읽고 버려지는 책으로 나 만의 업사이클링 작품을 만드는 활동을 했다. 어느 수업에서는 좋아하는 그림책을 오려서 입체 액자를 만드는 작업을 했다. 나도 학생들이 쓰고 남은 자투리 그림으로 급하게 마무리한 액자가 책장 한 켠에 있다. 이 책을 읽다가 무심히 바라보았더니, 그 액자에는 나이 지긋한 두 여인이 따뜻한 벽난로가 있는 등 높은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다. 바로 전 재산을 기부한 엘리자베스가 친구의 집에서 함께 책을 읽는 장면이다.
아름다운 이 장면에 떠오르는 그림이 있다. 구부정한 자세로 집중해서 책을 읽는 나이든 여성의 눈빛은 진지하다. 이 인물은 일찍 과부가 되었지만 84살이 되도록 예루살렘의 구원자를 기다리며 밤낮으로 금식과 기도로 하나님을 섬긴 성경 속의 예언자 안나이다. 무릎 위에 성경책을 펼쳐놓고 주름진 손을 펴서 책 위에 올려 놓고 손가락 끝으로 한 글자씩 짚어가며 읽고 있다. 이 그림의 작가는 렘브란트로 자신의 어머니 라이덴을 모델로 그렸는데, 내게는 <도서관>에 나오는 노년의 엘리자베스로 읽혀 진다. 실제 성경에는 안나가 성경을 읽고 있다고 쓰여 있지는 않다. 렘브란트가 살던 당시의 네덜란드는 개혁주의로 성경 자체가 개혁의 근본이 되었다. 그래서 그림 속의 안나가 읽고 있는 성경은 그림 속 안나의 독서는 시대의 상징성을 띄고 있다. 특히 렘브란트는 자신의 어머니인 라이덴을 모델로 했다. 84세인 안나가 평생 책을 읽었던, 종교인 렘브란트도 종교에 있어서도 독서가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이 아닐까?
그림책을 ‘0세부터 100세까지 읽는 책’이라고 한다. 똑같은 책이라도 나이가 들어 읽는 책은 어릴 때 읽은 책과는 또 다르게 낯설고 새롭다. 평생을 책과 함께 살아가며 평화롭게 서로를 존중하며 책을 읽는 노후의 여유는 아름답다. 등 높은 의자에 앉아 책을 읽는 할머니가 된 엘리자베스가 평생 읽었던 책들은 어떤 것이었을까? 책 읽기가 인생이었던 그녀의 인생 책이 있을까?
도서관의 영어 원서 마지막 문장이다.
Elizabeth Brown Moved in with a friend And lived to a ripe old age.
They walked to the library Day after day, And turned page... after page...
도서관을 찾았어요. 걸어가면서도 책장을 넘기고
닮고 싶은 엘리자베스의 마지막 장면은 원서에 이렇게 소개되며 마무리된다. 아 좋다.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