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일스테드(Peter Vilhelm llsted·1861 - 1933). A Mother and Child in an interior. 1898. <출처: 위키아트>
선유도역으로 가는 버스가 7분 후에 도착한다는 메시지를 볼 때만 해도 오늘 내가 겪을 일을 예상하지 못했다. 전철 대신 택시를 잡아탔을 때만 해도 말이다. 고속버스 터미널에 도착했을 때는 심지어 8분이란 시간이 남아 동터 오는 하늘을 보며 파이팅을 외치기도 했다. 운은 여기까지였다.
헐레벌떡 매표소로 뛰어가서 '7시 18분 버스가 오지 않았다'라고 하자 '만석으로 출발했다'라고, '무슨 소리냐?'라고 반문하며 승차권을 들이밀려는 데 아뿔싸, 7시 10분 출발 버스였다. 좀 전 '8분이나 남았네~'라고 호기 부리던 그때, 버스는 출발했던 것이다. 부랴부랴 25분 버스에 올랐다. 숨은 어찌나 가쁜지 정신이 없었다. 목에 두른 머플러를 커튼 지지대에 걸었다. '이 머플러 두고 내릴 것 같은데'라는 예감은 들었다.
세종시 정부종합청사 정거장에서 내렸다. 도착지 고속 터미널까지 가면 아무래도 지각을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역시 착오였다. 목적지인 한국개발연구원까지는 터미널에서 5분 거리라는 것이다. 택시 기사분이 이 말을 했을 때 허탈했다. 게다가 '머플러 예감'도 적중했다. "여기 챙겨 둘 테니께. 와서 가져가 유"라는 말을 듣고는 안심도 들고 정다웠다.
아침나절 갈팡질팡 한 내 얘기를 인사말로 삼고, 강의 주제인 문서 작성법을 시작했다. 일 얘길 두고 갈 순 없어 화두를 이렇게 꺼냈다. 일은 잠시 여기 있다 가는 것일 뿐 영원히 머무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일 때문에 마음이 아프고 사람을 미워한다. 거짓말까지 하면 잠시 동안 와 있는 이 자리는 가시방석이다. 피할 방법은 없을까. 정답은 없지만 혜안은 빌릴 수 있다.
삶을 즐기는 다양한 방법이 있듯이 일 역시 즐기며 할 수 있다. 삶과 다른 점 하나를 꼽으면 일은 평가 대상이라는 것이다. 이 점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일 평가가 자기 정체성 전부는 아니다. 그럼에도 이 두 대상을 묶은 것이 일이란 것은 아이러니하다. 이 모순은 어떻게 풀까?
바닥 청소를 하던 분이 내게 머플러를 건네주며 "찾아가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한다. "잘 보관해 주셔서 제가 더 감사합니다"라고 답하자 "내 일하는 보람이에요"라고 한다. 이 짧은 순간 스며 드는 따듯함은 뭘까!
일은 본래 차가운 것이다. 이 성질을 일찍 안 누군가가 일이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입김이라도 불어 온기를 채우기 시작했고, 은연중에 퍼졌다. 특히 윗자리에 오른 사람이 욕망을 이롭게 쓰면 일 맛은 달달했고, 아래 자리에 있는 이가 다부지고 넉살 좋게 굴면 뿌리는 단단히 내리고 잎은 풍성했다. 이를 두고 자부심이 차고 넘친다는 수사는 멋지다.
모순은 창과 방패가 부딪히는 소리다. 창은 방패를 뚫기 위해, 방패는 이를 막기 위해 아이디어를 내고 연구를 포기하지 않는 상태를 두고 역설 화법으로 쓰곤 한다. 일을 여기에 대입해 쓰면 이렇다.
일이 본래 차가운 성질이라는 점을 깨닫지 못했다면 사람은 보람 한 번을 느끼지 못한 채 식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모순 속으로 뛰어들 때, 소리는 맑고 뿌리는 튼튼하고 가지는 곧게 뻗는다. 그렇게 일군 대가가 보람이고, 자부심이고 일의 실체적 진실이다. 11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