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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석양, 그리고 잉크병 하나

17년의 결혼이 깨지는 소리

by 책한엄마


1.


<우주의 석양>이 깨져 버렸다.

당연하다고 믿었던 나의 세계가 산산이 부서진 건,

“재산 명시 명령서”를 작성하던 어느 오후였다.


결혼 17년 동안 내 이름으로 된 재산은 없었다.

그나마 빚이 없다는 사실 하나가 유일한 위로였다.

통장 잔액을 옮기다 아끼던 만년필 잉크병을 떨어뜨렸다.

탁— 하고 깨지는 소리가, 마치 내 우주의 붕괴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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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상대방의 칸은 다를 것이다.

적을 칸이 부족할 만큼의 재산, 그만큼의 세금.

나는 부자 남편을 둔 가난한 사람이었다.

그 돈을 원한 적은 없지만, 그 벽 앞에서 늘 작아졌다.


변호사 언니는 “재산을 네 이름으로 돌리고, 그걸 위로 삼아 살아.”

그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나는 돈이 아니라 사랑을 잃었다는 걸.

그걸 돈으로 보상받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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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결혼은 사랑의 결과로 맺은 법적 결속이다.

사랑하기에 함께 살고, 아이 셋을 낳았다.

하지만 이젠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이 밥을 먹여주진 않는다.

그렇다고 유대감으로 살 수 있는가?

이젠 그마저도 느껴지지 않는다.

문제를 이야기하면 그는 시무룩해졌고,

감정을 나누려 하면 그는 업무보고를 했다.


그와 나는, 이미 오래전 정서적으로 이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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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이제 정신이 말했다.

“너는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어.

이러다 네가 죽는다.”


그 신호는 내 몸에서 먼저 왔다.

2022년, 생애 첫 장기 적출 수술.

그 이후로 몸이 회복되자, 마음이 내게 명령했다.

살기 위해 떠나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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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이혼을 결심하니 발목을 잡는 건 ‘돈’이었다.

내 이름으로 된 재산은 하나도 없었다.

몇 천만 원 통장엔 친정엄마의 손길이 있었다.

그마저도 이사 계약금으로 사라졌다.


나는 현실에 충실했을 뿐이다.

그렇다고 경제 때문에 결혼을 유지할 순 없다.

나는 그에게서 자유로워졌고,

그도 이제 다른 사랑으로 자유로워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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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깨진 잉크병의 남은 1/3을 조심스레 다른 병에 옮겼다.

원래는 석양빛 잉크였다.

금빛과 노랑이 섞인, 해질녘의 색.

하지만 닦고 나니 남은 건 자줏빛 얼룩뿐이었다.


그게 어쩌면 모든 빛의 근원이었을지도 모른다.

<우주의 석양>이 끝나고, 이제 <우주의 일출>이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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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가진 건 없지만

감정과 가능성만큼은 새로 채워 넣을 수 있다.

그래, 잉크는 깨졌지만

이제 내 마음 속엔 새로운 우주가 떠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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