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오픈세미나] 한국인의 인종주의

2020.04.07

by 한근연

한국인이 겪은 코로나 사태

우리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나



1. 코로나 사태로 불거진 한국의 인종주의 -발제자 : 주보연, 안정우


틀딱충, 맘충 등 우리는 서로를 벌레라고 부르며, 분노를 넘어선 혐오의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람들이 서로를 미워하지 않았던 옛날이 그립다고 합니다. 하지만 혐오에 대한 논의가 수면위로 떠오른 것이 최근일 뿐, 혐오는 과거부터 우리의 삶에 뿌리 깊게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지난 12월 처음으로 중국에서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이하 코로나19) 발병자가 나온 뒤 지금까지 여전히 전 세계가 코로나19로 인한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코로나19를 담당하는 직원들 중 부담감을 이기지 못하는 직원의 사망은 한 나라에 국한되어 발생하는 일이 아닙니다. 한국이 코로나19 위기경보를 심각 단계로 격상하고, 팬데믹 상태에 들어서며 사회 분위기는 더욱 냉담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와 스트레스로 사람들은 더욱 예민해지고 있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바이러스가 시작된 중국 혐오는 점점 증가하는 추세입니다. 국내에서는 중국인 입국 금지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으며, 혐오는 중국에 국한되지 않고 동양인 혐오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중국 그리고 인종에 대한 혐오는 이번에 처음 발생한 것이 아닙니다. 해외에서는 황화론을 주장하며, 국내에서는 만보산 사건이 발생하면서 인종에 대한 혐오와 차별을 정당화하였습니다.

과거부터 변함없이 존재하는 인종 혐오에 대해, 혐오의 가해자가 되기도 하고 피해자가 되기도 하는 우리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요? 이 부분에 대해 오늘 세미나에서는 한국이 현재 겪고 있는 코로나 사태를 중심으로 인종주의의 관점에서 고민해보려 합니다.


서유럽과 미국의 보수적 진영과 일부 자유주의적 진영에서는 오늘날 인종주의가 종식되었다고 주장합니다. 대부분의 백인들은 인종차별적 제도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유색 인종에 대한 인종차별은 과거의 일이라고 설명합니다. 물론 일부 극우 인종주의자와 집단은 존재하지만, 일반적으로 인종주의를 시대에 뒤떨어진 이데올로기이자 관행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인종주의에 종식에 대한 이야기들은 2009년 유색인종의 정치, 경제, 문화적 영역의 성공과 유색인종의 문화들이 대중문화 속에서 위세를 떨치고 있는 사실을 그 증거로 자주 거론합니다. 이러한 다양한 증거에서 ‘인종주의의 종식’이 회자되고 있습니다.

또한 서구 국가 정책으로서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의 확산도 이러한 흐름에 기여했습니다. 일반적으로 다문화주의는 동등한 인간으로서 다양한 인종과 민족의 공존을 인정하는 전제에서 출발하며, 이 전제에는 인종주의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해서는 안된다는 믿음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국가 내의 모든 영역에서 다문화주의가 현실적으로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지에 대한 상황과 관계없이, 다문화주의에 대한 공적 관심과 확산은 인종주의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믿음을 대중에게 만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과연 이러한 ‘인종주의의 종식’은 이뤄진 것일까요?

한국 사회에서의 인종주의는 현재 진행형의 문제입니다. 한국은 이미 2007년 8월 국내에 체류하는 외국인 수가 처음으로 100만 명을 넘어섰고, 2018년 가준 230만명을 넘어서며 한국 정부도 다문화주의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시민들 또한 다문화 사회에 대해 긍정적 목소리를 내며 인종주의에 비판적 시각을 보냅니다. 그러나 실상을 들여다보면 한국의 다문화주의에는 사회 안의 인종과 문화의 다양성과 그 가치를 인정하고 그것을 통해 사회의 문화를 더 풍부하게 하려는 다문화주의의 본질은 없고 그저 다문화주의에 대한 찬양만 공허하게 울리고 있습니다. 관 주도의 정책들, 대상에 따라 차별적으로 적용되는 다문화주의 논리, 타문화를 수용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한국의 문화만을 강요하는 다문화주의 정책이 바로 그것입니다.

한국의 다문화주의의 지향점이 제대로 정립되지 못한 것은 기존의 인종주의적 시각에 대한 비판적 논의와 고민을 거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한국인들은 단일 민족임을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기고 다른 문화에 대해 경계심과 배타성으로 일관해왔습니다. 그러다 개방 물결에 갑자기 몰려온 다양한 문화의 사람들에 한국인들은 당황했고 기존에 가지고 있던 인종주의적 시각에 대한 비판과 고민 없이 다문화의 가치를 찬양하는 방향으로 돌변했습니다. 이런 기반이 한국인의 의식에 그대로 남아 있고 정부의 정책에도 드러나는 것입니다.


논의점 1. 다문화주의의 존재와 인종주의의 잔존에 대해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계신가요?


현재 한국사회의 코로나 사태 인종주의의 특징을 살펴보면, 서구와 같이 민족적・인종적 차별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지는 않은 상황 속에서 혐오 표현의 남발되고 있습니다. 한국 사회는 인종주의 (racism)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다문화주의로 나아가는 과정 중에 있는 것인지 여러분의 의견이 궁금합니다.



2. 혐오와 갈등의 중심에 선 PC -발제자 : 임지우


앞서도 언급되었지만, 코로나 사태가 일어난 초기 시점, 중국인 입국 금지 때문에 국내가 시끄러웠다는 사실을 여러분들도 기억하실 겁니다. 병균을 지닌 중국인들이 국내로 들어올 수 있는데 왜 통제하지 않느냐는 주장과 그 반대 측의 갈등이었지요. 그리고 이 갈등 속에서 중국인에게 쏟아지는 모멸적인 언어들, 이를테면 짱께, 착짱죽짱(착한 짱깨는 죽은 짱깨뿐이다.) 또는 ‘천안문 항쟁때 착한(혹은 진짜) 중국인은 다 죽었다’ 등의 표현들이 우리 주변을 멤돌았습니다. 어떤 분께는 유머러스한 표현으로 들으셨을 것이고, 어떤 분들께는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과격한 언행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현대에서 이렇듯 특정 언행에 대해서 각자가 상반된 느낌을 받는 것은 코로나 사태의 중국인에 대한 혐오뿐은 아니겠지요. 양극화된 입장의 중심에 위치한 Political Correctness가 여러분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또 다른 주제입니다.


1. 여러분들은 PC를 접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웹상에서/주변 사람들에게서 PC를 들었을 때 어떤 느낌을 받으셨나요? 각자의 솔직한 경험을 이야기해주세요.


2. 여러분들이 생각할 때 PC를 어떻게 정의 내릴 수 있을까요?


PC운동이라 칭해지는 진보 운동의 흐름에서 각자가 느낀 바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습니다. 오늘 나눈 이야기를 제외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PC에 대해서 서로 각기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는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단지 입장뿐만이 아니라, PC가 무엇인지 조차도 말입니다. PC는 어떤 과정으로 이렇게 다의적(?)이고 복잡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을까요? PC의 복잡한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PC가 어떻게 발생되었는지를 살피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 같이 다음 텍스트를 읽어보겠습니다.


1970~1990년대에 영, 미에서의 정치적 올바름의 지지자, 혹은 운동가로 불린 사람들에게는 뭔가 아주 이상한 점이 있었다. 당시 정치적 올바름의 지지자, 혹은 운동가로 불린 사람들은 누가 자신들을 지지자나 운동가라 부르면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리고 정치적 올바름이 하나의 운동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는커녕 그런 운동이 있다는 것을 부인했다. 정치적 올바름 지지자나 찬성자로 불린 사람들은 실제로 다음의 세 가지 사항 중 하나를 지지하거나 실천했음에도 말이다.


° 성별 차별적이거나 인종차별적인 언어를 사용하지 않도록 처방한 스피치코드.

° 대학에서 사회적 소수자(예를 들면 여성과 인종적 소수자)에게 가산점을 주는 소수 집단 우대 정책.

° 문화유산과 예술적 수월성에서 비서구, 비백인, 비남성의 공헌도를 반영하여 교과과정 개편하기.


오늘의 관점에서 보아, 정치적 올바름은 1970~1990년대에 영국, 미국의 대학 캠퍼스와 대안적인 정치, 문화 기구에서 활발했던 정치적 운동이었다고 학자들은 기록한다. 그 운동의 지지자와 실천자는 대안적인 제 3의 생각을 추구하는 사람들이었다. 주로 진보적 좌파, 여성주의자, 반 인종차별주의자, 환경기구 종사자, 공적 업무 수행자들이었다. 운동의 전체적인 목표는 계급, 인종, 성별, 기타의 사회문화적 다양성에 ‘정치적으로 올바른’ 기준을 적용하는 것이었다. 특히 활발하게 전개됐던 구체적인 실천은 위에서 우리가 본 세 가지다. 곧 언어 바꿔 쓰기, 소수집단 우대정책 실천, 대학의 교과과정 개편이다.

그렇다면 1970~1990년대에 정치적 올바름의 지지자, 혹은 운동가로 불린 사람들은 자신들이 지지자나 운동가로 불리면 왜 소스라치게 놀라고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운동의 존재 자체를 부인했을까. 당시 지지자들은 자생적으로, 자발적으로 ‘차별적인 언어 바꿔 쓰기’, ‘소주 집단 우대 정책’, ‘대학의 교과과정 개편’을 지지하고 실천했다. 세 가지 중에서 한 가지만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사람도 있었고 두 가지만 지지하는 사람도 있었다. 목적과 실천 활동을 정한 특정인이나 특정 단체도 없었고 연대 활동이 벌어진 적도 없었기 때문에 사람에 따라, 단체에 따라 지지와 실천이 다양했다. 당연히 통합적인 이론도 없었다. 그런데 이 셋을 지지하는 활동을 묶어 ‘정치적 올바름 운동’이라는 용어를 씌워준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 세가지 활동을 반대하는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

반대파에서 먼저 내린 정의는 수없이 많았다. 객관적이라기보다는 정치적이고 주관적인 정의들이 범람한 결과, ‘political correctness'란 단어를 처음 접한 사람들은 'political correctness’가 표현의 자유를 협박하는 말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다.

( 「정의롭게 말하기」 박금자 저, p51~52)


우호적이든, 비우호적이든 언론은 지난 40년간 정치적 올바름에 관한 기사를 수없이 써냈고 기사는 사회에 영향을 미쳤다.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언론은 특정 용어를 학문의 세계에서처럼 정확하게 정의하거나 용어 사용법을 지키면서 기사를 쓰지는 않는다 매일매일 시시각각 벌어지는 사건과 이슈와 트렌드를 좇아가며 기사를 써야 하고 지면이나 전파는 한정되어 있으니, 언론이 용어의 정확한 용법을 지키면서 기사를 쓸 여유란 없다.

언론이 PC 논쟁을 더 많이 보도하면서 PC란 말의 뜻은 점점 더 종잡을 수 없이 표류해 갔다. 독자는 미디어에서 신어를 만나게 되면 문맥에서 의미를 추론하여 이해한 후 이윽고 자신도 다른 문맥에서 그 신어를 사용하게 된다. 차츰 신어의 의미는 원래의 의미를 잃고 외연 의미를 획득하기 마련이다. 그러니, 언론이 단어를 대대적으로 전파하기 시작하면 그 단어의 의미는 표류를 시작한다.

미 대학 캠퍼스에서 PC논쟁이 한창일 때 PC란 말은 대학의 교과 과정 개편, 소수집단 우대 정책 실시, 캠퍼스 안의 무례하거나 공격적인 언어의 제약과 관련이 있었다. 그러나 대서양을 건너 영국에서도 PC와 관련된 저서들이 쏟아져 나오고 뉴스가 이어지자 대중은 미디어를 통해 PC란 말을 알게 되었다. 독자들은 논쟁에 직간접으로 참여함으로써 PC의 의미를 알게 된 것이 아니라 언론의 보도를 통해 PC란 단어를 접하고, 의미를 추론하게 된 것이다. 영국에서 실시된 한 조사에 의하면 1990년대에 대중들이 인식하던 PC의미는 다음과 같았다.

“성이나 인종 문제에 호의나 공감을 나타내는 동조적인 태도”


전혀 틀린 인식은 아니지만 아주 성근 인식이다. PC가 ‘언어 바꿔 쓰기’, ‘대학의 교과과정 개편’과 ‘소수집단 우대 정책 실시’, ‘서구 중심의 지적 전통 개혁’과 관련된다는 인식이 빠져 있다.

아직 어떤 정의도 PC란 무엇인가를 온전히 알려주지 못한다. PC는 언어를 비롯하여 정치, 문화, 교육, 성, 행동 등에도 관련되고 1990년대 이후부터는 동물의 권리문제, 식민주의, 환경 문제, 심지어 AIDS문제에도 관심을 두고 올바른 선택을 하도록 권유하고 있다. 이처럼 여러 문제에 걸쳐 관심을 두고 이전의 신념이나 가치관을 바꾸도록 권유하니,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히드라의 머리처럼 알기 어렵다는 비유도 나온다.

(「정의롭게 말하기」 박금자 저, 69-70 p)


네 그렇습니다. PC란 하나의 이념이나 생각에서 만들어진 운동이 아닙니다. 남성, 서구, 백인들이 주가 되어 움직이는 각종 사회 체계에 반대하는 움직임들을 반대하는 측에서 호칭하게 됨으로써 만들어진 운동인 것입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PC는 많은 공을 남겼습니다. 대안적, 다문화적, 다양성과 같은 긍정적인 용어를 도입함으로써 유럽중심주의로 대표되는 문화 엘리트주의 대신에 문화 상대주의가 들어서야 한다는 생각을 퍼트리거나, 기존 편견으로 바라보았던 금기 영역을 새롭게 보게 만들었습니다. 많은 불평등한 언어들에 대하여 문제가 제기되었고, 더 섬세한 형태로 모습을 바꾸었습니다. ‘우리’와 ‘그들’이라는 형태로 이분화 되어있던 세상에서 ‘그들’로 분류되던 이들을 ‘우리’로 받아들이려는 노력도 PC운동의 영향을 받았다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성별 차별적이거나 인종차별적인 언어로서 근래에 들어 바뀌게 된 표현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단어의 변화가 생김으로서 생긴 긍정적인 영향은 무엇일까요?


그러나 PC운동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하나의 기틀에서 시작한 운동이 아니었고,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PC운동을 전개하는 양상은 각자가 달랐습니다. 그중에는 PC운동의 여러 주장들을 도덕적 관념으로 환원하여 설득하려는 시도뿐만 아니라 날선 비난과 PC 운동을 지지하지 않은 사람들을 도덕적으로 타락한 것처럼 매도하고, 가르치려는 모습 또한 존재하였습니다. 이른바 SJW, social justice warriors들이 바로 그것입니다.(국내에서 비슷한 표현으로는 ‘프로 불편러’들이 있겠네요) 원래 PC운동에 반대하던 사람들, 그리고 SJW의 젠체하는 모습에 반감을 느낀 사람들은 점점 한 축으로 모이게 되었습니다. 바로 대안우파의 등장입니다. 다음 텍스트 들을 읽어볼까요?


특정 표현 속에 내재된 편견과 차별을 없애고 소수를 존중하는 정제된 언어를 쓰자는 문제 제기는 널리 받아들여졌고 인식을 개선하는 데 성과를 낳았다. 하지만 반발과 부작용이 심했다. ‘정치적 올바름’이 표현의 자유를 가로막는 억압처럼 작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저기서 불평이 터져 나왔다.

한 흉악 범죄를 저지른 흑인 현행범을 쫓는 경찰관이 “Stop, Nigger!"라고 외쳤을 때 “Nigger”라는 한마디 말이 흉악 범죄보다 더 큰 사회적 비난을 받는 현실이 정상이냐고 항변하는 목소리가 높다. “키가 작다”고 말하지 못하고 “수직적으로 문제가 있다”, “뚱뚱하다”는 직접적 표현 대신 “수평적으로 문제가 있다”라고 말해야 하느냐는 비아냥도 나왔다.

‘정치적 올바름’은 점차 위선적인 정치인들의 립 서비스, 지식인들의 잘난 체 하는 지적, 정당한 의사표현을 막는 족쇄로 느껴지게 되었다. 그래서 미국 대중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이 떨어진 규범이 된 것이 현실이다.

「트럼프 신드롬 - 가치와 올바름이 조롱받는 시대」(정준환 저) 中 일부 내용 발췌 p79~85


필자는 가끔 유명 게임회사 블리자드에서 몇 년 전에 출시한 오버워치라는 게임을 하곤 한다. 오버워치는 수십년 뒤 근미래를 배경으로 하여 세계 각지를 배경으로 특정 미션을 수행해야만 하는 FPS게임이다. 이 게임에서 특기할 점은 심심치 않게 ‘PC' 논란에 시달린다는 점이다. 이 책을 구매할 정도의 독자라면 이미 충분히 알고 있겠지만 PC는 정치적 올바름을 뜻하는 영어 Political Correctness의 준말로서 소수자들을 차별, 배제하는 언어 사용 및 표현을 지양하자는 신념, 혹은 그에 기반한 사회운동을 뜻하는 말이다. 오버워치는 그간 성소수자, 유색인, 장애인을 비롯한 다양한 소수자 정체성을 반영하는 캐릭터를 적극적으로 출시해왔고 이것이 유저들 사이에서 상반되는 평가를 받으면서 PC논란이 불거지게 되었다. 한쪽에서는 워버워치가 다양한 소수자 정체성을 반영하여 게임이 사회의 진보를 이끌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고 추켜세웠고, 다른 쪽에서는 오버워치에 여러 문제가 산적해 있으며 중심 이야기는 진행조차 안되는데 제작자들이 PC 놀음에만 “빠져” 게임의 본질을 잊었다고 비판했다.

오버워치뿐만이 아니다. 유명 fps 시리즈인 베틀필드에서도 게임의 배경인 제 2차 세계대전과 전혀 맞지 않는 ‘소수자 코드’가 들어간다고 일군의 게이머들이 반발을 표한 적이 있었다. 영화에서도 이는 당연히 해당된다. 예컨대 최근 개봉했던 <캡틴 마블>과 그 이전의 <블랙펜서> 모두 스토리나 캐릭터의 개연성을 희생하고 PC를 “묻혔다”는 의견이 있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억압받던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훌륭하게 표현해낸 수작이라는 말이 있었다. 장르를 가리지 않고 콘텐츠마다 이런 논란이 잦으니 인터넷 사이트에서는 “대체 PC가 무엇이냐, 퍼스널 컴퓨터 말고” 같은 질문도 자주 올라오곤 했다.

「정치적 올바름에 대하여」 (토론, 조은경 옮김, 임명묵 논평)


4. 신좌파를 포함한 PC지치층과 대안우파를 포함한 반PC지지층의 대립을 근래의 인터넷 곳곳에서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 개인적으로 기억에 남는 대립은 영화 조커에 대한 감상평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함께 이야기해보면 좋을 것 같아요!


5. PC와 반PC의 대립을 본 경험이 있나요? 반대의 입장이지만 공감이 되었던 적은 있나요? 앞의 텍스트들을 읽고 질문들을 나누었을 때 든 느낌이나 경험 그리고 관련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다양한 이야기들을 자유롭게 이야기해주세요.



맺는 글 - 복잡다단한 갈등을 넘어 나의 길을 찾는다는 것


오십년 전만 해도 공기중 흩어졌을 말들이 이제는 네트워크에 차곡차곡 쌓입니다. 주변의 지인들로 한정되었던 사람들 간의 관계에 제한이 없어졌습니다. 과거 세상을 지배하던 낡은 생각들은 하나씩 무너져내렸지만 그를 대체할 새로운 틀은 미약하기 짝이 없습니다. 무수한 정보가 혼란스럽게 휩쓸고 있는 세상에서 여러 흐름에 흔들리고 있는 지금, 어떤 장단에 몸을 맡겨야할지 도대체 알 수 없습니다. 말 그대로 정보의 홍수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수많은 정보가 우리를 휩쓰는 한편 극명한 대립이 웹상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많은 이야기가 오가는 인터넷이것만, 이 양 집단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교류는 서로를 향한 날선 비난 뿐이라는 것은 믿기 힘든 아이러니입니다. 각자의 주장 대신 엉뚱한 허수아비를 대려다 놓고 그 앞에서 상대인냥 후드려 패고 있는 모습은 이제 커뮤니티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광경이 되었습니다. 건설적인 대화를 통해 합의에 이를 수 있다는 낙관적인 관점이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어 보입니다.

이 극단적인 대립을 없는 것처럼 무시하고 싶지만 우리 삶과 밀접한 주제들일수록 이 갈등으로 끌려가고, 어느샌가 한 쪽으로 기울어진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날카롭고 혼란스러운 대립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각자의 길을 찾을 수 있을까요? 한근연은 여러분께 제안합니다. 이 대립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한 발자국 떨어져서 바라보자고요. 숲속에서 숲의 모습을 볼 수 없듯, 이 대립의 한 가운데에서 흐름을 파악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한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각각의 근거를 들여다보고, 검토하고, 여러 의견을 들고, 여러 사상가의 발자취를 더듬음으로서 우리는 갈등의 양상을 이해하고 각자의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한근연은 당신이 어지러운 세상에서 각자의 길을 고민할 수 있는 곳이 될 것입니다. 지금 바로 지원하세요!




*한근연은 1985년 창립되어, 고려대학교 중앙 학회로서 자리하며 한국사회의 다양한 주제들에 관해서 토론하고 실천합니다. 한근연 브런치에는 회원들의 세미나글, 개인적인 글 등을 편집하여 업로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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