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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이디함 Mar 02. 2023

2008년 - 고등학생 시절 독일에서의 첫 만남

어젯밤 올리버에게 바람 맞았다 [제1편]


어젯밤 나는 하루하루 손꼽아 기다리던 올리버와의 저녁약속에 바람맞았다.


현재 나는 33살, 그리고 올리버와 나의 인연은 고2 때부터 시작됐다.

우리는 남다른 역사를 갖고 있다. 나는 아버지의 직장으로 갑자기 독일로 유학을 가게 돼 몹시 외로운 날들을 보내야 했다. 한국의 최상위권 대학교 진입이 목표였던 나는 또래 다른 유럽권 친구들과 너무 다른 위치에 있었다. 춤추고 맥주 마시러 가는 유럽권 친구들을 외면하고 홀로 매일매일 집과 도서관만을 반복해야 했다.


연설, 토론 동아리 활동도 그저 대학 진입에 유리할 것 같아 시작하게 됐고, 나는 베를린 국제학교 대표로 유럽 국제학교 연설, 토론 대회에 참가했다. 그 해에는 독일 뒤셀도르프 국제학교에서 대회가 개최됐었는데 그 당시 수많은 금발 중에 눈에 띄는 키 큰 동양인 남자가 하나 있었으니 그가 올리버였다. 하얗고 길고 삐쩍 마른 그는 조금 어색한, 마치 아빠 것처럼 보이는 회색 정장을 입고 있었고, 맨발이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양말은 신고 있었다. 그런데 구두가 불편해서인지 계속 손에 들고 학교 복도를 맨 양말로 다니고 있었다.


그가 어디에 있든 내 시선은 그에게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저 멀리서도 그가 말할 때면 귀가 쫑긋 온 신경이 그에게 쓰였다. 얼핏 그가 말하는 것을 들어보니 영어실력이 보통 유창한 수준 정도가 아니라 아예 모국어인 듯했다. 한국인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타깝게도 구체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대화를 시작하게 됐는지는 더 이상 내 기억 속에 남아있지 않다. 다만 그래도 대회에 참가하는 한국인 학생들이 더럿 있었고 나는 참가하는 모든 한국인 학생들과 금세 인사하고 친한 사이가 되었다. 아마도 궁극적으로 그와 친해지기 위해 다른 사람들과도 모두 친하게 지내려고 했을 것이다. 올리버는 한국인이었고, 또 내가 초등학교 시절 거주했던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한 국제학교 대표로 참가했다. 알고 보니 우리 아버지와 그의 아버지는 직장관계로 서로 알고 있는 사이였다.


대회 일정은 3박 4일 정도로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는 고등학생답게 내가 나 자신을 주체할 수 없는 수준으로 그에게 매료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저 고등학생이었고, 뒤셀도르프 국제학교 가족 봉사자들 집에서 머무르고 있었다.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시간은 모든 대회 일정이 끝난 마지막 날 저녁, 2시간 정도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짧은 시간, 내신만 생각했던 전형적인 모범생인 내가 독일 고등학교 시절 중 가장 큰 일탈을 하게 된다.






강남스타일이고 뭐고 있기 한참 전인 2008년, 미성년자 동양인 여자가 해가 지고 혼자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것은 (적어도 우리 집 교육에 의하면) 엄청나게 위험한 일이었다. 나를 맡고 있었던 가족 봉사자들은 내 부탁으로 2시간의 자유시간 동안 뒤셀도르프에 간이로 설치된 놀이공원에 나를 데려다주었다. 독일에는 한국과 달리 큰 놀이공원이 없다. 간혹 축제기간에 간이로 놀이기구가 설치되는데 흔치 않은 기회이기 때문에 동네사람들 모두 흥에 겨워 놀이공원 시즌을 즐긴다. 북적거리는 인파 속에 나는 올리버를 1:1로 만났다.


그건 데이트였지?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런 발상을 도무지 내가 했을 리는 없고, 올리버가 제안한 것이었을 텐데. 다른 친하게 지낸 한국인들은 제쳐두고 우리 둘이서만 만났었다니. 충분히 그전에 우리 둘 사이에는 뭔가 있었구나 싶다. 그 자세한 일들이 더는 기억이 나지 않아 너무 아쉽다. 올리버는 기억하고 있을지..


학교 밖에서 처음 만난 올리버는 다행히 맨 양말이 아니었다. 신발을 신고 있었다. 오랜 시간 묵혀있어 흐릿해진 기억을 되살리자면 아마도 우리는 후룸라이드를 탔을 것이다. 내가 앞에 타냐 그가 앞에 타냐 아웅다웅 대다가 결국 누가 앞에 탔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확실한 건 타면서 손을 잡았다. 후룸라이드에서 내리고 나서는 손을 잡은 상태로 내가 뒤에서 안으려고 했다, 그가 뒤에서 안으려고 했다 또 아웅다웅 드립을 쳤었던 것 같다.




그러고 우리는 대관람차를 탔다.


15년이 지났지만 그 기억만큼은 너무나도 강렬해서 성인이 된 이후로도 전 세계 어디를 가든 놀이공원에서 대관람차를 보면 나는 매번 올리버를 떠올리고 그리워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가 나에게 대관람차를 타자고 했을 때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 도대체 왜 느리게 높이 올라가는 저 재미없는 기구를 타자고 하는 것인지.. 그러나 그는 정해진 자유시간 2시간의 마지막을 꼭 대관람차로 끝내고 싶어 했다.


"대"관람차라고 부르기에 민망하게 작은 관람차였다. 위에 유리도 없고 뚫려있는 형태였고, 앉는 곳도 좁아서 그와 내가 꽤 붙어 앉아 갔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서서히 관람차는 올라갔고, 깜깜한 밤하늘이 우리 둘 위에, 반짝이는 뒤셀도르프의 야경이 우리 밑에 펼쳐졌다. 천천히 움직이고 다시 내려가는 관람차.. 그렇게 두 바퀴 정도 돌았을까, 올리버는 내쪽으로 몸을 돌리더니 "이제 이게 마지막 바퀴야"라고 귓가에 속삭였다.


나는 정말 순수했었네. 그게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도대체 그가 관람차 바퀴 수를 어떻게 아는 것인지 의아해하고 있었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그가 아주 살짝 조급한 것 같은 모습으로 내 귓가에 "마지막인데?..... 진짜 마지막 바퀴인데?..."라고 속삭이고..



그의 입술이 내 입술에 닿았다.


그와의 키스가 어떠했는지는.. 구체적인 감각이 기억에 남지는 않았다. 안타깝게도 나는 너무 순수한 고등학생이었나 보다. 감각 그 자체보다도 주변의 그 분위기와 감성이 너무 강렬하게 각인된 것을 보니. 왜곡된 기억일 수도 있겠지만 그가 나에게 키스를 했을 때는 마지막 바퀴가 아니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한 바퀴 더 돌아서 더 오래 키스를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실 그때 그 관람차에서 내 핸드폰은 미친 듯이 진동하고 있었다. 가족 봉사자들이 나를 픽업할 시간이 지나서 날 찾고 있는 전화였다. 그런데 그 중요한 시기에 당연히 전화를 받았을 수가 없었으니 가족 봉사자들은 나에게 사고가 난 것이라고 생각하여 내 담당 학교 선생님한테까지 전화를 돌리고 상황이 심각해지고 있었다. 그것도 모르고 올리버와 나는 대관람차에서 내려서 어느 골목에서도 키스를 했다. 그렇게 키스에 취해 허우적대다가 "이제 진짜 전화받고 가야 돼" 하고 그와 작별인사를 나누고 가족 봉사자들에게 돌아갔다.




그날 나는 엄청 혼났다. 베를린에 돌아가서도 담당 선생님한테 혼났다. 살면서 혼이라고는 나본 적이 손에 꼽을 정도로 모범생이었는데 호되게 혼났다. 담당 선생님이 유머러스하신 분이었고 유독 나를 이뻐하셨었는데.. 그렇게까지 단호했던 모습은 처음 봤다. 그는 내게 가족 봉사자들에게 사과의 카드를 써서 보낼 것까지 강요했다. 무책임함을 정말 싫어하는 성격이지만.. 정말 힘들게 꾸역꾸역 카드를 작성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럼에도 또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똑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단 한 번도 그때의 일탈을 후회한 적이 없다.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다고 판단해 저지른 일탈이었고, 내 판단이 옳았다. 잊혀 없어졌을 수도 있었던 날들이 평생 소중히 기억될 순간이 됐으니.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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