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오랫동안 술을 마셔 온 사람으로 - 요새 느끼는 술에 대한 감정이 복잡다단하다.
술을 잘 마시는 타입이란 무엇인가? 에 대해서 고민을 해왔는데, 내 마지막 정의는 '술 마시는 순간을 거리낌없이 마주칠 수 있는 타입'이다. 술의 양이나 종류에 상관 없다. 내 주변에는 약한 술을 많이 마실 수 있는 사람이 있고, 독주를 딱 한 잔 마실 수 있는 사람이 있다. 술의 도수나 양에 따라 잘, 혹은 못 마신다고 말하는 사람은 감히 말하건대 술을 잘 모르는 사람이 아닐까.
지금은 16도 증류주를 한 병 비우고 집에 막 돌아온 길이다. 요즈음 새로 알게 된 술에 대한 감정은 '알딸딸함'인데, 예전의 나라면 전혀 알지 못했을 감정이다. 예전의 나는 술을 양껏, 혹은 주량 이상 많이 마시고도 집에 잘 걸어가는 사람이 목표였기에 술을 아주 많이 마시고 꽐라가 되어 기어가거나 혹은 멀쩡한 기분으로 꽐라들을 택시에 태워보내는 것을 반복했다. 하지만 30대 중반을 지나가는 짧은 요 몇 년 사이 나는 주량보다 아주 적게 술을 마시고도 잘 취하는 - 혹은 술을 즐기는 방법을 자연스레 터득하게 됐다. 그래서 사람들이 술을 마시고 나서 "기분이 좋다"거나 "알딸딸하다"라는 말을 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 자그마치 술을 마신지 16년 만에.
술이란 것은 어쩌면 나를 오랜 기간 괴롭혀왔다. 나는 내가 원하는 목표보다 항상 주량이 적었다. 대학생 때는 소주를 두 병 내지 세 병은 마시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주량을 늘리려 노력해도 내 한계는 소주 한 병 반. 한 병을 넘어서면 항상 화장실에서 벽에 한 번 머리를 기대야만 했다. 아 취하지 말자. 하지만 그 말은 언제나 이미 취한 다음에나 지껄이는 말일 뿐. 나는 이미 취했고 죄책감에 한 마디 내뱉은 후, 옷 매무새를 가다듬고 나가서는 반 병을 더 마셔버리는 것이다.
내 인생에 마실 술을 모두 다 마셔버린 것 같다고 느낀 때도 있었다. 술이 땡기지도 않고 맛도 없었던 그 2년 나는 꽤 담배를 많이 피웠다. 하지만 술을 마시지 않았기 때문에 항상 말짱한 정신으로 또렷하게 다녔다고 기억한다. 친구들에게도 너스레를 떨면서 "내가 마실 술을 너무 빨리 다 마셔버렸다"고 말하기도 했다. 친구들은 그런 내게 재미없다며 짜증을 내곤 했던 기억이 난다.
내가 혼자 가장 술을 많이 마셨을 때는 우울증에 시달릴 때다. 그 때 하루에 청하 두 병씩을 거의 매일 마셨다. 이틀 걸러 한 번이었나.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나는 고통스러웠던 것 같았다. 누군가는 소주나 양주가 아닌 고작 청하로 그렇게? 라며 무시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거의 청하를 두 병씩 비워내고 술살이 엄청 쪘다. 그 때의 나는 아무도 잡아줄 수 없는... 그러니까 스카이다이빙을 하는 기분이었다. 매일 눈물버튼 영상을 보며 청하를 깠다. 눈물을 흘리기 위해 노력했던 것 같은데 왜 그랬는지 잘 이해할 수는 없다.
지금의 나는 결혼을 했고, 아직 혼자 술을 마신다. 우리 집 김치냉장고의 절반은 술병이 차 있고 와인, 위스키, 맥주 등 종류별로 술을 자주 채운다. 결혼 후의 혼술은 낙하산을 메고 스카이다이빙을 하는 것 같다. 나는 혼자 술잔을 채운다. 남이 느리다, 혹은 빠르다, 혹은 밑잔을 깔았다, 너 혼자 자작을 하면 남친이 안 생기네 어쩌네 지랄을 들을 필요가 없이 내 속도에 맞춰 술잔을 채우고 술잔을 비워낸다. 심지어 내가 혼자 즐길 수 있는 안주까지. 몹시 흡족하다. 그러다 마지막 순간에 (항상 아이패드로 게임 중인) 남편을 불러, "한 잔을 더 마실까"라고 물어본다. 남편은 술을 좋아하지 않는 종족이라, 항상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말해준다. 나의 낙하산. 나의 숨 쉴 구멍. 나의 어쩌고저쩌고.
밖에서 남편과 술을 한 잔 하고(남편은 두 잔 나는 한 병) 들어온 오늘 저녁, 샤워를 하며 내가 어떤 말을 하고 싶었는지 잘 모르겠다. 그런데 글을 쓰지 않고서는 버틸 재간이 없어 브런치를 쓴다. 나는 술이 좋다. 혼자 마시는 술이 더 좋다. 나는 술을 좋아하는 사람인 것을 인정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