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투 최상급 표현
"나 이번 주말에 해외여행 떠나는 거 취소했어."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한다고 한다. 어느 나라 언어든 말을 끝까지 듣는 것이 중요하지만, 문장 마지막에 서술어가 오는 우리말은 더 그렇다. 서술어는 한 문장의 주어로 제시된 인물이나 사물의 동작 상태를 설명하는 동사와 형용사 등으로 구성된다. 예문에서 마지막 부분 '취소하다'라는 동사가 문장 전체의 의미를 뒤집어버렸다.
우리말의 이런 구조적 특성 때문에, 위 사례에서와 같은 막판 대 반전까지는 아니더라도, 청자나 독자가 좀 헷갈릴 수 있는 서술 방식이 있다. '가장 ~ 한 것 중에 하나'라는 최상급 표현이다.
'파리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중에 하나다.'
'가장'은 비교 대상 가운데 첫째 간다는 뜻이다. 첫째는 단독 1위이므로 여러 개가 있을 수 없다. '파리가 세계에서 제일 아름다운 도시'라고 거창하게 운을 띠어서 듣는 이의 기대를 한껏 높여놓고 나서는 한눈파는 틈에 '중에 하나'라고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면서 김을 뺀다.
영어 번역투 표현이 아닌가 의심이 가는데, 영문 ' Paris is one of the most beautiful cities in the world.'에서는 문제의 'one of ; 중에 하나' 대목이 문장 앞부분에 배치되므로 최상급을 복수로 설정한 방식이 '기만'은 아니다.
특정한 품질이나 능력을 배타적인 수사로 강조하면서 바람은 세게 잡았지만, 막상 정보의 정확성에 자신이 없어 말미를 두루뭉술 퉁쳤다. 미래의 챔피언을 위해 공간을 배려하는 선의로 볼 수도 있겠으나, 그보다는 향후 발생할 반론에 대비해 보험을 드는 방어적인 화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문법적으로는 허용되더라도, 우리말의 구조를 고려해서 앞뒤가 안 맞는 이런 모순된 표현의 도입은 자제하는 게 좋을 듯하다.
그나마 정성적 최상급의 범위를 확장한 '세계에서 가장 재능 있는 피아니스트 중의 하나'는 어느 정도 수긍하지만, '그랜드 캐니언이 미국에서 가장 방문객이 많은 국립공원 중에 하나'처럼 객관적으로 계량 가능한 1등을 '중의 하나'라고 물을 타는 건 게으르고 비겁해 보인다.
차라리,
'세계 3대 미항' : 제한된 수의 최상 그룹을 동률 1위로 소개한다든지,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아름다운 도시' : 상대 비교를 통해 호기심을 유발한는 편이,
주어의 뛰어난 특성을 더 매끄럽고 명확하게 주장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집단적 '관계 불안 증후군'이 어법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단호한 주장을 주저하고, 여차하면 빠져나갈 구멍을 확보하기 위해 별별 비겁한 어법을 발굴하고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