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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장' 이란 말, 함부로 쓰면 안 되는 이유

[영월] 탄광문화촌에서

by 영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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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영월 마차리에는 우리나라 산업화 시대의 한 단면을 간직한 특별한 공간, 탄광문화촌이 있다. 생활관에 들어서면 애환과 번영의 거리, 생활상 엿보기 등 몇 가지 테마로 나누어 재현한 1960-70 년 대 마차리 골목이 그 시절의 사람 냄새를 풍긴다.


이곳은 단순히 과거를 모형으로 재구성한 전시장이 아니다. 선술집 좁은 공간에서 막걸리 잔을 쥔 광부, 양조장에서 술을 빚는 손길, 교실 한가운데 조개탄 난로까지 그 시절의 질감이 고스란히 살아있다.


탄광촌은 분명 육체적으로 고단하고 위험한 환경이었지만, 그 안의 삶은 당시 한국 사회 전반의 생활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탄광 지역 출신이 아니어도 동시대를 살아본 사람이라면 이 거리를 걷는 동안 한 번쯤은 익숙한 장면을 마주치고 그 시절로 순간 이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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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탄


도시에서 자란 나에게 탄광은 종종 굵은 활자로 보도되던 매몰 사고의 어두운 현장으로만 기억되었다. 하지만 탄광은 연탄을 매개로 해서 나의 일상과도 맞닿아 있었다.


내 어린 시절, 도시에서는 연탄이 보편적인 난방, 취사 연료였다.


연탄煉炭의 '연煉'에는 '가루나 흙 따위에 물을 부어 반죽하다'라는 뜻이 있다. 한국에서 많이 나는 무연탄 가루를 버무려 틀에 넣고 찍어낸 원통형 고체가 바로 연탄이다. 구멍을 여러 개 뚫어 공기 중의 산소와 접촉 면적을 늘려 잘 타게 한다.


전통 연료인 장작이나 짚에 비해 장점이 많은 연탄은 1950년 대 이후 가정 난방용으로 빠르게 보급되었다. 우선 연기가 거의 없고, 값이 싸고 오래 타며, 공장에서 규격화해서 생산하므로 공급이 안정적이고 다루기가 쉬웠다. 특히 밀집 주거지인 도시에서 연탄은 혁신적인 선택이었다. 가을에 김장해 놓고 연탄 들여놓으면 월동越冬대비는 끝난 거나 다름없었다. 쌀과 함께 연탄은 당시 중요한 생활필수품으로 꼽혔다.


그렇다고 연탄이 마냥 만만한 땔감은 아니었다. 고체 연료라서 불이 붙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고, 꺼뜨리기라도 하면 다시 붙이기가 쉽지 않았다. 연소를 계속 유지해야 하는 특성 때문에 주부는 마치 가족을 지키는 보초처럼 탄불이 꺼지지 않도록 늘 긴장했다.


게다가 연탄가스, 즉 일산화탄소(CO) 중독의 치명적인 위험이 늘 도사리고 있었다. 겨울철이면 연탄가스로 인해 목숨을 잃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지금은 사라진 지상파 미군방송, AFKN에서 '무색무취의 일산화탄소'가 얼마나 은밀하게 사람을 해칠 수 있는지 장병들에게 수시로 경고할 정도였다. 따뜻함과 불안이 공존했던 겨울의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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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장


생활관에서 나와 100 미터 정도 거리에 갱도 체험관이 있다. 안에 들어서면 분위기가 확 바뀐다. 어두운 조명 아래 축축하고 차가운 공기 속 좁은 통로를 걸으며 광부들의 채탄 작업을 간접 체험할 수 있다.


통로의 마지막에 '막장'이 있다. 막장은 더 이상 파고들 수 없는 최심부 작업장을 말한다. 사고가 가장 빈번했던 지점이었다. 말 그대로 갱도의 끝이 삶의 끝자락이 되기도 했다.


막장은 위험했지만 생산량이 많을수록 수당이 붙는 구조였기에 많은 광부들이 이곳으로 향했다. 갱내등(헤드램프) 하나에 의지해 어둠 속을 파고들며 광부들은 매일 목숨과 맞바꾸듯 석탄을 캤다. 붕괴와 가스 폭발, 질식... 그 위험 앞에서 그들이 붙잡은 건 단 하나, '가족'이라는 이름이었다. 아이의 입에 뜨거운 밥 한 덩어리 넣어주기 위해 광부들은 이곳에서 곡괭이와 지렛대를 들고 하루를 지탱했다.


요즘 우리 사회는 특정 집단을 비하한다는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 ( 때로는 지나칠 정도로) 각별한 주의를 기울인다. 말 한마디도 조심하고 사과가 잇따르기도 한다. 그런데 '막장'이라는 말은 가볍게 쓴다.


비상식적인 전개와 자극적인 설정이 뒤엉킨 극단極端의 서사가 흔히 '막장 드라마'라는 이름으로 유통된다. 그렇게 '막장'이 흥밋거리로 소비되는 순간, 누군가의 피와 땀으로 버텨온 삶의 현장은 천박한 농담처럼 전락해 버린다.


이제 막장에 광부는 없지만, 그들이 걸어놓았던 목숨에 눌린 자리는 아직 거기에 선명하다.


말을 쓰는 방식이 우리가 과거를 기억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어휘 하나에 담겨있는 시대와 사람의 무게가 가볍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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