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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라면순한맛 Mar 15. 2018

급여체에 갇혀버린 너와 나

어느샌가 급여체식 사유방식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깨달았다.


"사랑에 빠져버린 것 같아."

지난주에 소개팅을 하고 온 직장 동료가 점심시간에 친 명대사다. 우와 사랑이라니! 직장인들의 점심시간에 저런 단어가 나온다고?! 장난기가 유난히 많은 회사 동료의 입에서 나왔기에 더 어색한 단어였지만, 너무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저런 관념적인 단어를 회사에서 들어본 게 얼마만인지 기억이 안 날 정도. 여느 직장인처럼 회사에서 동료들과 하는 이야기는 대부분 숫자로 표현할 수 있는 것들이다. 예상 일정이나 비용, 담당자 전화번호나 연말정산 환급액 따위의 것들. 직장인들의 말투가 괜히 급여체라고 불리는 게 아니었나 보다. 숫자로 대체 가능한 급여체 속 단어들은 사유의 여지가 전혀 없다. 급여체에 갇혀버린 우리들은 자연스럽게 낡은 유물론자가 되어버린다.


 문득 '컨택트'라는 영화에서 외계어를 배우게 된 주인공이 떠올랐다. 지구를 방문한 외계 생명체 '햅타포드'들과 조우한 그녀는 그들의 언어인 '헵타포드어'를 배우게 된다. 헵타포드어는 표현된 객체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이어 한 마디 말과 문자에 담을 수 있는 상당히 고차원적인 언어이다. 영화 속 주인공은 외계어를 습득할수록 본인의 사유방식이 점점 외계어와 닮아가는 경험을 하게 되는데, 예를 들면 사과라는 단어를 떠올렸을 때 사과와 연관된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생각, 미래의 예언까지 동시에 떠오르는 모양새이다. 그녀는 새로운 사유방식에 혼란스러워하지만 결국 수용하게 된다. 그녀의 햅타포드어식 사유와 나의 급여체식 사유가 닮은꼴을 하고 있음을 깨닫곤 굉장한 찝찝함을 느꼈다.

컨택트(Arrival, 2016)

 정말로 찝찝하다. 나는 의도치 않게 급여체를 배웠고 그것에 갇혀버렸다. 급식체와 학식체가 나의 모국어였던 시절에는 그렇지 않았다. 미래를 이야기했고 꿈꾸는 것이 무엇인지 토론했다. 정의를 주장했고 사랑을 말로 표현했다. 아무튼 지간에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 것들에 대하여 급식과 학식을 먹으며 이야기했다. 결과적으로 바라던 대로 실현된 것은 많지 않을지언정 꽤나 빛나고 활기찬 나날이었다. 무엇보다 생각한 대로 행동하기 위해 노력할 줄 아는 시기였다. 그에 비해 지금은 현실과 숫자에 갇혀 여러 갈래의 노란 선 안쪽에서만 사유하게 되었다. 그 시절과 지금은 도대체 뭐가 달라졌기에 이렇게나 많이 비교되는지 찾아보려 했지만 명확한 답변은 얻기가 어렵다.


 나이가 들어서? 직장인이 되어서? 시간이 없어서? 피곤해서? 만나는 사람만 만나서? 매일 똑같은 하루여서? 여유가 없어서? 명확하지 않다. 그래서 참 찝찝하지만,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보면 한 가지 매우 현실적인 방법이 떠오른다.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 것들에 대한 고민과 표현을 의식적으로 해보는 것이다. 재미없더라도 일부러 말이다.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닌 웃어서 행복하다는 어떤 노란 머리의 주장과 같은 맥락으로 급여체를 벗어나 보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

 그러한 사유의 촉매는 독서가 될 수도 있고 여행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여행 중 무언가를 깨닫게 되는 메커니즘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는데, 적어도 내 경우에는 여행지에서 무언가를 깨닫는 상황은 대개 새로운 사람과 장소, 문화가 주는 영감에 의한 것이 아닌, 망중한 속에서 멍을 때리며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고민했을 때였다. ‘농사나 지어볼까?’, ‘40살에 나는 뭐 하고 있으려나?’, ‘왜 나는 파란색을 좋아하지?’. ‘이렇게 먹는 게 좋은데 요리사나 돼볼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사유가 얼마나 생산적이었는지 잊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사유는 타인과 공유됐을 때 더 빛났던 것도 기억이 났다. 시간이 흐르며 왜 이렇게 달라졌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다시 학식체를 쓰던 그때로 돌아가려는 노력이라도 해야겠다. 소개팅남이 마음에 든 직장 동료의 한마디가 나에게 이런 메시지를 던져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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