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쉬어가는 이야기
내게 극도의 두려움을 주는 것은 내가 평온하고 이완되어 있는 순간에 동반되는, 그 대척점에 있는 ‘무엇’이다. 불행이라고 규정할 여지도 없이 가장 극적으로 덮쳐오는 그 ‘무엇’. 나는 내가 짐작할 수 없는 그것을 항상 두려워한다. 가장 징후적인 현상으로는 일단 갑작스럽게 튀어나오는 것들은 강박적으로 기피한다는 것이다. 내가 공포와 스릴러 장르 서사에 열광하면서도 그것을 텍스트나 이미 체험한 수용자의 가공한 콘텐츠로밖에 접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혹은 ‘스포일러’를 통해 놀라운 지점을 내 통제 아래 두어야 한다. 그도 아니면 이미 수차례 접해서 그 지점을 훤하게 꿰뚫고 있던가.
그러나 인생은 언제나 무수히 ‘튀어나오는 것들’의 산재된 집합이다. 그것에 대한 깨달음은 대개 사소한 순간에, 담담한 의식의 흐름 속에서 불쑥 튀어나오곤 한다. 고층 아파트의 잡다한 것들을 올려둔 베란다를 흘긋 올려다볼 때도, 스크린이 설치되어 있지 않아 뚫려 있는 전철 플랫폼에서 펜스 앞으로 비켜설 때도, 한밤중에 짖어대던 개들에 치솟던 화가, 개들이 불쑥 찾아오는 ‘무엇’에게 득달같이 달려드는 상상을 하다 보면 스르르 풀릴 때도.
그렇게 따지면 사실 내 두려움의 대상은 그냥 ‘불행’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대개 짐작되는 불행은 준비되지 못한 채 직면하는 ‘무엇’과 감히 비교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 내 평소 지론이다. 그건 불행을 짐작했을 때 그 불행이 대개 찾아오지 않거나 생각했던 것보다는 별 것 아니었다는 개인적 경험을 토대로 한다. 애초에 짐작되는 불행이 얼마나 있겠느냐마는. 그런 건 공포 영화를 볼 때나 가능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그 짐작의 범위를 영화와 같은 가상 세계에서 현실의 층위로 옮겨 보고자, 일상의 나는 매 순간 열심히 짐작한다. 기왕이면 이 짐작이 무위로 돌아가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