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장례식으로 시작되는 이 영화의 주인공 제임스는 어딘가 좀 모자라 보인다. 돌아가신 어머니에게 조사(弔詞)를 낭독하는 제임스는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며 교회 바닥에 침을 뱉거나, 주제와 동 떨어진 헛소리를 하는 등 기행을 반복한다. 제임스는 딸의 것으로 추정되는 고물 라디오를 고치는 씬에서 처음 등장하는데 잠시 후에 그는 라디오가 아직 고쳐지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장례식장에서 생전에 어머니가 좋아했다는 곡, ‘Thunder road'에 맞춰 춤을 추려했던 제임스는 별 수 없이 무반주로 춤을 춘다. 사람들은 이 진기한 광경을 동영상으로 찍기도 하고 제임스의 기행에 당황하기도 한다.
헛소리 반, 진지한 추도 반으로 이루어진 제임스의 조사(弔詞)는 그가 여전히 어머니의 거대한 사랑이란 그늘에서 자유롭지 못 함을 고백한다. 그는 다 큰 성인이고, 시민을 지켜야 할 경찰이며 어린 딸 까지 있는 부모이지만 여전히 어머니의 품에서 벗어나지 못한 소년이다. 아침엔 작동했다가 지금은 작동하지 않는다는 고물 라디오처럼 어머니가 사라진 소년은 너무나 불안정하다. 제임스는 계속해서 사람들을 당황시키는 기행을 벌이고 감정은 들쑥날쑥하며 자신의 행동 조차 통제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제임스의 기행에서 중요한 점은 그가 자신의 행동이 다른 사람들을 당황시키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자신의 기행으로 인해 당황했을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사과한다. 즉, 그는 아직 통제하지 못하는 것들을 통제하고자 하는 성장의 과정 속에 있는 것이다.
<썬더로드>에는 아버지가 없다. 아니다. 존재하긴 하나 존재감이 없다. 10분의 롱 테이크로 일장연설을 늘어놓는 장례식장에서도 제임스는 아버지를 언급하지 않는다. 제임스가 여동생을 만나는 씬에서도 조카들은 나오지만 매제는 등장하지 않는다. 제임스의 전처가 사망하는 순간에도 딸은 같이 있었지만 새아빠는 그곳에 없었다. 가족들의 대화는 계속해서 이어지나 아버지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다. <썬더로드>는 플롯 상으로 아버지라는 정체성의 제임스가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는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들의 존재감을 이상하리 만큼 지워버린다.
이 영화에서 아버지로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인물은 딱 3명이다. 주인공 제임스, 제임스의 절친한 친구이자 직장동료 네이트, 단역으로 잠깐 등장하는 판사. 제임스의 아버지로서의 존재감은 어떤 식으로 표현되는지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다. 제임스의 딸 크리스탈은 장례식장에서 아버지가 창피해 옆에 앉기를 거부한다. 네이트의 아버지로서의 존재감은 제임스를 집으로 초대해 가족과 식사를 하는 씬에서 표현되는데 제임스는 의도치 않게 과거 네이트의 실수담을 말해 네이트를 아이들 앞에서 웃음거리로 만들어버린다. 단역으로 정말 잠깐 등장하는 판사는 변호사에게 “꼴통”이라고 불리며 제임스가 판사의 딸을 비유로드는 말실수에 발끈해 제임스에게 매우 불리한 판결을 내려버린다. 그는 아마 딸 바보인 제임스와 비슷한 모습의 아버지일 것이다.
이처럼 <썬더로드> 속 아버지들의 존재는 회피되거나 지연된다. 왜 아버지들은 가족이라는 테두리에서, 사회라는 테두리에서 소외되는 걸까?
잠깐 영화의 텍스트 안에서 벗어나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보겠다. 내 나이는 아직 20대이긴 하지만 지금 내 나이 때 나의 아버지는 이미 결혼을 해서 아버지로서의 인생을 사셨다. 아직 1인분의 삶 조차 버거운 나를 생각해보면 지금의 나 보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되고, 가장이 됐을 아버지가 갑자기 무겁게 다가온다. 과연 그때 아버지는 아버지가 될 준비가 되셨을까? 한 번도 물어본 적 없는 질문이지만 우리 모두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
세상은 멀미가 날 정도로 빠르게 변하고 있다. 아무런 징후 없이 갑자기 죽어버린 제임스의 전처처럼 세상은 느닷없이, 가차 없이 변해버린다. 이 빠른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선 제임스처럼 벽에 그림을 붙여 놓고 면벽수행이라도 해야 한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은 낯설어졌고 편하다고 느꼈던 것들은 불편해졌다. 그런 시대에 와서도 변하지 않은 가치 중 하나는 아버지의 ‘책임감’이다. 모성이 신화로 승천할 때 부성은 에피소드로 머문다. 어머니가 거대한 벽화로 남을 때 아버지는 희미한 흔적으로 남는다. 그것이 부모의 완성이고 그것이 암묵적으로 동의된 세상의 이치다.
길거리 비행 소녀를 경찰의 직권을 남용해서라도 끌어내 기어이 집으로 돌려보내는 제임스의 행동은 미성숙한 아버지로서의 책임감을 편린으로 보여주고 있다. 딸을 향한 책임감과 마음은 진심이지만 성장이 덜 끝난 미완성 아버지는 투박하고 어색하기 짝이 없다. 그런 서툼이 조금씩 만드는 간극은 결국 아버지의 존재감을 잠식한다.
아버지는 떠나고 싶다. 불안정한 진심이 만든 자식과의 간극으로부터. 유령마을이 돼버린 것 같은 황폐해진 관계로부터. 브루스 스프링턴스의 노래 ‘Thunder road'의 가사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