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발표되는 통계를 보면 이는 부정하기 힘든 팩트다. 영진위가 발표한 영화산업 결산 발표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2009년 이후로 단 한 번도 전년 대비 극장 매출 마이너스를 기록한 적 없이 성장만 해왔고 2019년 전체 극장 관객은 2억 2600만 명으로 전년 대비 5%가 증가, 매출액도 전년 대비 약 5% 증가한 1조 9200억 원을 기록해 역대 최고 기록을 경신했다. 더 놀라운 점은 한국의 1인당 연평균 영화 관람 횟수다. 한국은 1인당 4.37회의 영화 관람을 한다고 집계되었고 이는 세계 1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영화의 성지라 불리는 미국이 3.51회를 기록한데 비해한국의 4.37회 기록은씨네필의 나라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수치다.
씨네필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에 힘 입어 한국의 영화산업 규모는 2019년 미국, 중국, 일본에 이어 세계 4위 규모에 등극했다. 한국의 뒤엔 무려 영국, 프랑스, 인도, 호주, 러시아 같은 국가들이 있다. 이들 대부분 국가가 한국보다 적게는 수 천만명, 많게는 수 억 명이나 인구가 많은데 한국은 이들을 모두 제치고 4위를 차지한 것이다.
하지만 통계는 가끔 거짓말을 한다. 압도적인 퍼포먼스로 세계 최고의 씨네필 국가처럼 보였던 한국은 이번 코로나 사태와 함께 '진짜' 본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코로나 사태 이후 한국 영화산업은 말 그대로 초토화가 됐다. 한국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인력이 아닌(일각에서는 중국발 인재라고도 하지만 아직 확신하긴 애매하다) 천재지변으로 인한 전대미문의 산업 붕괴 앞에 세계는 속수무책이었다. 이에 세계 영화 시장들은 OTT 중심의 영화 산업 재편을 실행 중이다. 최근 올해 최고 (상업적)기대작 중 하나였던<원더우먼1984>가 극장과 HBO MAX에서 동시 개봉했고 미국 영화계의 큰손 워너브라더스는 2021년에 개봉하는 모든 영화를 OTT 동시 개봉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추세를 따르고 있다. 연초엔 <사냥의 시간>이 넷플릭스로 직행했으며 최근엔 <콜>, 앞으로는 240억짜리 대작 <승리호>가 넷플릭스로 직행할 예정이다. 하지만 한국 영화계의 기대는 미국만큼 크지 않다. 이유는 간단하다. 한국은 극장 수입이 영화산업의 절대중심이기 때문이다. 영진위에 따르면 2019년 기준 한국 영화산업 매출의 76.3%가 극장 매출이었다. 나머지 24%를 VOD, DVD, 해외 수출 등이 나눠먹는다.
이에 반해 미국은 90년대부터 이미 비디오 등 2차 시장 규모가 1차 시장인 극장 매출을 앞질렀다. 90년대부터 그 격차는 꾸준히 벌어졌고 다른 국가들 역시 상황은 비슷하다. DVD 등을 충분히 소비할만한 여력을 갖춘, 소위 말하는 선진국들 중에 한국만큼 극장 수익 비중이 큰 국가는 없다. 그리고 앞서 나온 IHS의 세계 영화 시장 규모 순위 역시 1차 시장인 극장 매출만을 따진 것이다. 워낙 미디어가 넓게 펼쳐져 있어 사실상 집계가 어려운 2차 시장, 나아가 관련 굿즈 등을 지칭하는 3차 시장까지 모두 통계에 포함하면 한국이 기록한 순위는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그렇게 통계를 낸다면 한국은 4위가 아니라 15위 안에도 들지 못할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다. 실상이 이러하니 OTT 같은 플랫폼들이 아무리 침체된 영화 시장을 구원하겠다 나서봤자 업계에선 별 기대를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체 파이의 75%가 날아갔는데 이를 무슨 방법으로 메꾼다는 말인가. 한국은 그저 '극장에서 영화 보기'를 좋아하는 것이지 결코 영화라는 매체 자체에 특별한 애착을 갖는 것은 아니라는 결론이다.
너무 과한 비약일까? 예시는 또 있다. 영진위에서 발표한 2020년 11월 극장 관객 수는 359만 명이었다. 이는 지난해 같은 달 보다 무려 80.7% 줄어든 수치다. 물론 이런 충격적인 감소율은 사회적 거리두기 같은 방역 조치, 코로나 전염에 대한 관객들의 공포, 제작사들의 기대작 개봉 연기 등 다양한 이유들이 복합적으로 만든 감소다. 하지만 이러한 감소가 충격적인 건 CGV 등 대형 멀티플렉스들이 미국처럼 셧다운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벌어진 폭락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극장에서 영화는 계속 틀어주고 있는데 관객들이 영화관을 가지 않는다는 것. 그렇다면 한국보다 1인당 연평균 영화 관람 횟수가 떨어지는 미국은 코로나 시국임에도 아직 대표 극장체인들이 셧다운을 하기 전 상황에 어느정도의 감소세를 기록했을까? 미국은 전년 대비 약 50% 감소에 그쳤다. 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보러 극장을 찾는 진성 씨네필들이 한국에 그만큼 적다는 의미다.
돌아보면 과연 한국은 진짜 영화를 사랑하는 씨네필들의 나라가 맞는가에 대해선 항상 의문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1980년대 홈비디오, VCR의 폭발적인 보급과 맞물려 등장했던 판매용 비디오의 대대적인 폭망을 사례로 들 수 있다. 경제 수준이 어느 정도 경지에 올라선 국가들에서는 좋아하는 영화들을 직접 소장하고 싶어 하는 씨네필들이 판매용 비디오를 구매해 이러한 구매시장이 렌탈시장 만큼 활성화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하지만 유독 한국에선 영화를 1회성으로 소비하기만 하지 굳이 소장하려 하진 않았다. 당시 판매용 비디오 시장의 선두 주자였던 대우비디오는 90년대 중반에 사업을 철수했고 이런 분위기는 2000년대 DVD 등장 이후에도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오히려 DVD가 나온 2000년대에는 P2P 사이트의 등장 등으로 인해 시장은 더더욱 망가졌다. 이후에도 판매용 비디오 시장은 안 그래도 좋지 않은 상황에 꾸준히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으며 최근엔 OTT 서비스까지 등장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현재로 돌아와도 한국은 정말 씨네필의 국가인가에 대한 의문은 여전하다. 요즘 가장 핫한 플랫폼은 당연히 유튜브다. 유튜브는 TV와는 다르게 컨텐츠를 제공하는 채널들이 파편화되어 있어 비슷한 소재로도 다양한 시각의 컨텐츠를 즐길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정보의 해일과도 같은 유튜브 속에서도 영화를 소재로 컨텐츠를 제작하는 영화 유튜버들은 넘쳐난다. 이들 중 일부는 100만이 넘는 구독자들을 거느리는 초대형 유튜버도 있다. 그만큼 유튜브로 영화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는 시청자가 많다는 의미다. 영화 애호에 단계가 정해져 있는 건 아니지만 커피를 너무 좋아하면 커피를 마시는 것뿐만 아니라 커피 내리는 법, 커피 맛과 원두의 관계에 대해 관심을 갖듯, 영화를 너무 좋아하면 영화의 내용뿐만 아니라 영화 연출과 형식에 관심을 갖게 되는 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한국 영화 유튜브는 극단적일 정도로 내용에만 주목하는 컨텐츠들만 즐비하다. 물론 연출, 형식에 주목하는 영화 유튜버들도 있긴 하지만 이들은 정말로 극소수에 불과하며 그마저도 안정적인 채널 유지가 불가능한 수준의 소수 시청자 풀을 가진 소기업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현재 극단적으로 내용만 다뤄 큰 인기를 누리는 유튜버들 중엔 초창기에 형식을 다루다 전업(?)을 한 케이스도 있다는 점이다. 즉 영화를 적당히 내용만 알고 싶어 하는 라이트 영화팬들의 수요는 거대하지만 영화에 대해 좀 더 심층적으로 알고 싶어 하는 씨네필들의 수요는 바닥이라는 이야기다.
내가 지금 가장 우려하는 것은 코로나 이후 한국 영화의 운명이다. 애국심이 너무 커 한국 영화에 유독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지만 그냥 영화를 사랑하는 평범한 팬의 입장에서 모국어로 감상 가능한 영화들의 운명이 풍전등화인 상황이라면 걱정되는 게 당연하다. 한국을 씨네필 국가로 착각하게 만들었던 극장 산업은 이제 어쩌면 영원히 예전으로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한국사람들은 영화관 가는 것을 좋아했을 뿐, 영화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었다. 영화관은 잿더미가 돼버렸고 씨네필의 몸엔 불이 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