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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ERO Aug 26. 2023

사이다에 중독된 K-컨텐츠



최근 유튜브 쇼츠를 보다 한 드라마의 클립을 보게 되었다. 윤아가 주연으로 나온 드라마 <킹더랜드>의 한 장면이었다.


https://youtube.com/shorts/nHaEl8YeNDo?si=OsiiM5jcNWQmgVUi

드라마 <킹더랜드>의 한 장면


요약하자면 복사기를 고장 낸 인턴 두 명에게 부장님이 폭언을 했으나 인턴 중 한 명은 사실 회장님의 아들이었다(아들인지 손자인지 모르겠다. 드라마 안 봤다). 금수저 인턴은 쿨하게 이사님께 전화해 청소부를 보내달라 했으며 부장님은 인턴이 회장님의 가족이라는 사실에 당황해한다. 금수저 인턴이 "업무지시 잘못했으니까 니가 잘못한거 아님?" 하며 부장님을 쪽 주는 장면도 포함되어 있다.


잘도 굴러가는 갑질의 톱니바퀴


부장님은 명백하게 인턴들에게 갑질을 했다. 그리고 뒤이어 금수저 인턴은 갑질을 갑질로 되갚아 줬다. 관객들은 이러한 서사에 열광했다(해당 쇼츠 댓글창은 아닌 거 같다만 객관적인 지표는 분명히 열광했다. <킹더랜드>의 최고 시청률은 13%였다).


굳이 <킹더랜드>가 아니어도 이것과 유사한 장면은 한국의 드라마와 영화에서 수 없이 반복되었다.


<범죄도시3>의 중고차 딜러이자 조직 폭력배인 초롱이는 마석도의 주먹맛을 보고 자살에 가까운 작전에 투입된다. <더 글로리>의 문동은은 자신을 학대하고 인생을 파괴시킨 가해자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가해자의 가족들(하도영과 그의 딸)까지 희생시킨다.


초롱이와 하도영


초롱이는 침수차를 수천만 원에 강매시키려는 사기꾼이었으며, 하도영은 딸을 위협하던 전재준을 죽인 살인범이었다. 이러한 점들이 초롱이와 하도영에게 역갑질을 하는 마석도, 문동은을 무죄로 만들어주는 알리바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초롱이가 자살미션을 성공한 뒤 죄에 대한 정당한 처벌을 받지 않고 경찰들과 회식을 즐겼음에, 하도영이 학폭범 전재준을 살해하고 나서 딸과 함께 웃으며 유학을 떠났음에 만족해했다. 들은 원래 갑질을 하는 빌런이거나 복수의 대상이었지만 어느새 우리 편이 되었다.


그리고 <킹더랜드>의 터진 복사기 얼굴도 모를 제 3자가 청소할 것임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갑질은 사라지지 않았다. 갑질을 하는 사람과 당하는 사람이 바뀌었을 뿐, 변한 건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상대방의 갑질에 분노하고 갑질의 톱니바퀴를 파괴하길 원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사실은 그 톱니바퀴의 주인만 바꾸고 싶어 했던 건 아닐까? 우리 편이, 내가 톱니바퀴의 주인이라면 그건 꽤 만족스러운 것 같다.


사이다 서사라는 트렌드


우린 K-컨텐츠들이 내포하는 거대한 트렌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위에서 언급한 영화와 드라마들은 막힘 없이 통쾌한 전개로 서사가 진행된다. 서사의 갈등이나 인물간의 고뇌를 깊이 있게 다루거나 분석하기보단 즉각적이고 말초적으로 갈등을 해소하여 쾌감을 추구하는 방식의 스토리텔링, 흔히 말하는 '사이다 서사' 다. 우리들은 왜 '사이다 서사'에 열광하는 걸까?


최근(사실 최근도 아니 이미 오래전부터다) 뉴스나 유튜브 등에서 여론을 보면 한국은 분노사회가 되었다는 것을 느낀다. 분노사회의 원인은 다양하겠으나 그 원인의 꼭대기까지 올라가면 '갑질'이라는 부조리로 수렴될 수 있다 본다. 넓은 의미의 갑질이다. 부장님이 인턴에게 고함을 지르는 것뿐만 아니라 별점 테러를 하는 손님, 교사를 무시하는 학생, 사회복지사에게 폭언을 하는 수급자 등 모든 부조리와 오만무례한 행동이 갑질이 될 수 있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하는 건 갑질의 주체는 보통 사회적으로 약자로 인식되는 부류도 얼마든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전혀 수직적인 관계가 아님에도 갑질은 존재할 수 있다. 정수기 점검을 위해 빌라에 들어온 점검원의 차를 빌라 주민이 1시간 넘게 가로막고 갑질을 할 수도 있다.


정수기 점검원의 차를 1시간 반 동안 막은 빌라 주민

 

서로가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틈만 나면 갑질을 하려 한다. 우리는 갑질에서 강력한 모욕감을 느끼며 이러한 감정이 분노를 만든다.


모욕감에 분노한 대중들은 영화와 드라마에서 등장하는 모욕적인 액션, 사이다 서사에 열광한다. 이러한 연쇄로 관객들은 분노와 좌절을 잠시나마 해소하고 갑질 가해자들에게 복수를 하거나 모욕감을 되갚아 주는 등의 욕구를 충족하게 된다. 그렇게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사이다 서사의 맛은 청량감이 참 좋다.


그러다 뼈 삭는다


앞서 말했지만 사이다 서사에는 깊이가 없다. 오직 청량감만 있다. 아무도 초롱이의 사기행각을 처벌하려 하지 않는다. 하도영은 나이스한 아빠고 금수저 인턴은 쿨하다. 똑똑하고 합리적인 관객인 우리는 중고차 사기꾼은 처벌받아야 하고 살인범은 감옥에 가야 한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갑질의 톱니바퀴는 나를 위해 돌아가고 있으며 사이다는 너무 맛있다. 갑질하는 나쁜놈들을 응징하겠다는데 그까이거 잠깐 눈 좀 감아주자. 이런게 정의니까. 분명 갑질을 응징하기 위해 주먹을 들었지만 어느새 그 주먹이 또 다른 갑질을 재생산하고 있음을 면서도 한 번 휘두르기 시작한 주먹은 멈출 줄 모른다.


사이다 서사는 관객의 이성을 잠식시킨다. 연출과 캐릭터는 전부 평면적이고 서사는 답답함이 싫다는 이유로 클리셰로 범벅된다. 사이다 서사는 간편하다. 우리 편이 겪는 불행과 부당한 모든 것이 복수할 대상으로 명확하게 존재한다.


단순함이 잘못은 아니다. 하지만 사이다 서사는 영화와 드라마의 깊이를 한 없이 얕은 싸구려로 만들고 있다. 우리가 겪는 문제들은 사악한 악당이 혼자서 좌지우지하는 협잡 탓이 아니다. 사회는 복잡하게 엮여 있고 때로는 피해자도 가해자도 없이 개인의 손익이 교차할 때도 많다.


사이다 서사의 콘텐츠 소비자들은 항상 아주 단순한 이분법 속에 위치한다. 서사의 주인공을 방해하는 수많은 안건들은 침을 튀며 분노해야 할 것이 되며 특정 집단이나 사상에 대한 분노를 재상산 시킨다. 서로 합의를 이루어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 나에게 이해 불가능한 악의로 다가오고 그것은 사적인 복수로 해소할 수밖에 없는 문제가 된다.


복잡한 현실의 고통과 분노로부터 잠시 벗어나 나만의 환상에 몰입하는 것. 그것이 사이다 서사 최고의 미덕이겠지만 최소한 K-컨텐츠에서 사이다는 지나치게 많이 출시 된게 아닌가 싶다.


사이다의 갑질을 이젠 그만 맛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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