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방송 시작했어요 - ON AIR

89세 엄마의 소중한 한 표

by 서하




6월 3일,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우리 엄마는 살짝 ‘뒤집어지셨다.’

이번엔 꼭 투표할 거야.”

우리 동네는 주로 체육관이 투표소다.

1층부터 계단을 올라 엘리베이터를 타야 하는데

허리 측만증이 있는 89세 엄마에겐

그 계단이 너무나 험난하다.

그래서 무심결에 말했다.

“엄마, 안 가셔도 돼요. 그걸 어떻게 올라가세요.”

그런데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엄마 표정이 바뀌었다.

“내가 6·25 때 뭘 봤는지 알어?”

엄마는 조용히, 그러나 단단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 엄마가 공산당 총에 맞아 돌아가시는 걸

숨어서 봤어.

그날부터 동생 넷 데리고

토마토 몇 개 배에 차고

산 넘고 강 건너 외가댁으로 피난 갔지.

외할머니 댁에 가니까

내가 여자라서 부엌에 들어가 밥도 해야 하고,

소 여물도 주고, 밭일도 했었지.

학교 가고 싶어 몰래 나섰다가

책가방 불구덩이에 던져지고

밤새 울었어.

그땐 정말 나라가 있다는 게

얼마나 고마운지 절절했단 말이야.

그러니까 투표는 꼭 해야 해.”

그리고 마침표처럼 한 마디 더.

“내일, 염색하러 가자.”

(올 게 왔다. 이 연세에도 외모를 어찌나 챙기시는지.)

다음 날, 엄마를 미용실에 모시고 갔다.

엄마는 머리를 새까맣게 염색하셨고,

나는 백발을 해보겠다며 그냥 커트만 했다.

엄마는 나를 힐끗 보며 웃었다.

“내 나이 되면 안 해도 허얘져.

근데 너, 잘 어울릴 것 같기도 하다.”

나의 백발의 모습 상상해보기



그리고 6월 3일 아침,

엄마는 꽃단장을 마치고

보행기를 끌며 투표소로 향하셨다.

다행히 올해부터는

아파트 관리소가 투표소로 바뀌어서

계단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엄마는 투표를 마치며 말했다.

“언제 또 해보겠냐.

니가 뭔데 내 소중한 한 표를 막는겨?”

그 말이 가슴에 콕 박혔다.




누군가를 소중히 여긴다는 건

그 사람의 ‘의지’를

내 방식이 아닌 그 사람의 방식대로

받아들이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지금, 집 앞 스터디카페에서

차 한 잔 마시며 이 이야기를 적는다.

짧은 하루지만,

오래도록 남을 장면이다.

삶은, 살고 또 살아내는 것.

엄마의 인생은 지금도 ON AIR다.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