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으로 떠나는 이유
지루한 시간이 필요했었나 보다.
열다섯 시간이 넘는 비행에 잠도 오지 않아 몸을 비틀고 있을 때,
다섯 편의 말랑말랑한 영화를 원 없이 보면서 잊고 있었던 감동과 감성세포들을 깨웠다.
사놓고 읽지 못해 책상 위에서 한 장 한 장 넘겨져 아직도 책갈피가 중간쯤 꽂혀 있는 책을 핀셋조명을 켜고 다 읽었다.
그러다가 비행기 창을 밝혀 여기는 밤일까 낮일까를 확인했다.
그렇게 가만히 나를 내려놓고 고요해지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45인승 큰 버스를 타고 주와 주를 이동하고 나라와 나라를 이동하는 긴 시간,
그저 창 밖을 바라보며, 펼쳐지는 목가적 풍경에 감탄하고 문득 나타난 무지개에 감탄하는 시간을 가졌다.
눈이 쉬고 귀가 쉬고, 입이 쉬고, 마음이 쉬는 시간이었다.
패키지여행으로 만나 모르는 사람끼리 함께 여행하면서,
굳이 많이 친하지 않아도 되고, 필요 이상의 말을 하지 않아도 되고, 작은 인사로 충분한 관계를 맺었다.
그럼에도 그 안에서 건강한 삶의 태도과 따스한 배려를 배우게 되어 감사했다.
끊임없이 몰입하고 내달렸던 삶에 지루한 공간을 허락했더니,
숨 쉴 공간이 생겼다.
좀 더 단단해지기도
좀 더 유연해지기도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