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모부

기록하는기억ㅣ기억적기

by 하히 라

막내 이모부



 나에게는 두 명의 이모부가 있다. 그중 엄마의 동생의 남편이었던 이모부는 날 예뻐하셨다. 얼마나 이뻐했는지 말해보자면 만날 때마다 나를 품에 안아주셨고 만남의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의 딸보다 나를 더 끼고 있으셨다. 사실 난 그런 이모부의 무릎 위에 앉아 그 품에 있는 것이, 그게 좀 뭔가 싫었던 기억이 있다. 아빠가 아닌 남자 어른이 날 그렇게 안아주고 품어주는 게 너무너무 좋은 느낌은 아니었다고 해야 하나..


어쨌든 뭔지 모르게 이모부 품에 안겨있어야 할 때면 몸에 힘을 바짝 주고 긴장을 하고 있던 기억이 있다. 이모부는 그런 내 맘을 눈치를 채기는커녕 끝내 알지도 못하셨고 그저 예쁘다- 귀엽다- 잘 있었냐며- 그렇게도 날 품어주셨다. 그러면서 꼭 내손을 만지작 거리셨다. 그리곤 매번 똑같은 말을 나의 엄마에게 하셨다. “얘는 일시킵니까? 왜 손이 이리 몬났어예? 야는 정말 다 이쁜데 손이 이래가 - 에고” 그런 이모부 말에 우리 엄마는 설거지 한 번을 안 시키며 키운다며 - 세상 곱디곱게 금이야 옥이야 부엌에는 절대 들이지 않는다- 는 말을 매번 반복해서 대답하셨었다. 그러면 그 말에 이모부는 어김없이 “백날일만하는 손 맨 쿠로 이걸 어째요” 하면서 나에게 너는 진짜 다 이쁜데 손이 못났다며 이모부만의 사투리를 쓰며 연신 내손 모양을 아쉬워하며 어렸던 내 작은 손을 이모부의 큼직만 한 손으로 감싸고 쪼물딱 쪼물딱 거리며 말하셨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이모부 손도 안 이뻤으면서? 치 ,


나는 어릴 때부터 물건을 꼭 쥐어버릇 했다고 한다. 그리고 특히 연필을 잡을 때는 있는 힘을 다해 진심으로 꼭 잡고 글씨를 썼었다. 그러다 보니 세 번째 손가락 왼쪽 부분은 굳은살이 박였고 점점 비틀어지기도 하였다. 살짝 잡고만 써도 잘 써진다는 엄마의 말에도 나는 왜인지 그렇게 연필을 꼭 쥐고 잡아내어 글씨를 썼었다. 한글을 가리키며 네모난 공책에 글자 연습을 할 때부터 연필을 그렇게 꼭 쥐지 않고 살살 쥐어도 글씨가 써진다고 백만번은 말한 것 같은데 이상하게 나는 힘을 주어야만 = 글씨를 쓴다고 느꼈고 힘을 주어 글씨를 빼곡히 써야만 공부를 한다고 생각했다. 그도 모자라 샤프를 쓰게 됐을 때부터는 B심이 아니면 답답하다고 까지 느꼈다. 나는 그렇게 힘주어 빡빡하게 글씨를 썼고, 쓰고 난 글씨 색은 진해야 속이 후련하였다. 그리하여 한바탕 노트를 하고 나명 손부터 팔 전체가 뻐근하기도 하였다. 그렇게 글씨뿐 아니라 뭐든 꼭 잡고 힘주며 하던 모든 것들이 내손을 가냘프고 고운손에서 멀어지게 한건 아닐까 싶다.



자주 보는 것도 아니었지만 만날 때마다 품에 안으려 하시고, 매번 손이 못생겼다고 하시는 그 레퍼토리가 나는 좀 지겨웠다. 그리고 내손이 뭐 어때서? 손이 이쁘면 뭐 좋나? 라는 생각을 이모부와 엄마의 똑같은 대화를 반복할 때마다 했었던 것 같다. 그렇게 이모부가 한창 날 예뻐라 귀여워라 해주시던 때는 내가 초등학교 시절이었기에 나는 아름다움이나 예쁨에 대해 관심도 별로 없었기에 내 손가락이 못난 것에 대해, 그리고 길쭉길쭉 예쁘지 않은 것에 대해, 관심을 두지도 않았던 때였다.


아무튼 막내 이모부는 그렇게 굳은살이 있는 내 손가락을 만지작만지작 거리셨다.






 막내 이모와 이모부는 연애결혼을 했다고 들었다. 당시 대부분 선을 보고 세 번 정도 만나 결혼했다던 시절에, 연애라니 ! 난 그 부분이 참 신선하게 다가왔었다. 아빠 엄마는 중매쟁이에 의해 만남을 가졌고 그 뒤로 몇 번의 형식적인 만남을 하여 그렇게 그냥 결혼을 하기로 했다던데_ 그 시절에 이모는 정말 좋아하는 사람과 백년가약을 맺었다는 사실이 어린 나에게 조금 설레는 마음으로 두 분을 보게 만들었던 것 같다. 그런 이모네는 대구에 살았는데 내가 어릴 적 누군가의 결혼식으로 대구라는 곳을 처음 갔을 그 여름이 너무 더워 더위를 잘 타지도 않던 내가 땀을 뻘뻘 흘리며 막히는 대구시내 한복판에서 멈춰있던 자동차 안에서 유리창 너머로 아스팔트의 아지랑이가 미친 듯이 올라오는 찌는듯한 풍경과 다른 차들이 내뿜는 뜨거움을 보며 너무너무 더워했던 기억이 있다. 아무튼 그 결혼식을 찾아가서 식장에 있는 뷔페에서 밥을 먹을 때도 이모부는 나에게 내 손이 참 안 이쁘다 안타까워하셨다. 그때 나는 눈이 조금 나빠져 안경을 쓰기 시작했는데 외사촌들이 '안경재비' 됐다고 살짝궁 내게 들리게 말했던 것도 별로였고 그 먼 곳을 꾸역꾸역 내려가서 나는 누군지도 모르는데_ 어쨌든 친척이라는 누구의 어떤 이의 결혼식에 따라와야만 했던_ 너무 더웠던 대구를 다시는 가고 싶지 않아 했던 기억도 있다. 내가 더위를 다 느끼니 엄마는 대구는 분지라서 다른 곳보다 더 많이 더운 것이고 해가 잘 들어 사과가 그렇게 잘 자라는 거라며 대구만의 날씨의 특징과 그에 따른 농작물의 영향을 알려주었다. 사과고, 일조량이고, 뭐고 모르겠고_ 너무 더운 대구를 다시 가고 싶지 않다고 또 올 일이 있냐고 되물어 쳤다.



그날의 그 기억이 좋지 않아 나는 더웠던 그날 쓰고 있던 내 안경마저 싫어졌다. 사촌들이 들릴 듯 말 듯 말했던 ‘안경재비’라는 말이 이내 신경이 쓰였던 것이다. 요즘은 일을 할 때나 책을 볼 때 정도만 안경을 쓰는데 내가 눈이 나빠지던 그때에 사실 나는 안경이라는 것이 쓰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아빠가 안경을 맞춰주자 줄곧 잘 쓰고 다녔었다. 왜 인지 모르겠지만 뭔가를 더 걸치는 것이 좋아 보였다고나 할까, 사실 눈은 그리 나쁘지 않았지만 시력이 낮아지고 있으니 보안경으로 권했었는데 그런 것이 뭐랄까_ 아빠 엄마의 관심을 받았다고나 할까,


눈이 나빠지면 안 되는데.. 라며 꼭 책을 볼 때 안경을 쓰고 관리하라던 엄마의 말도 내 방에 문을 열고 안경을 쓰고 책을 보는지 확인하던 아빠의 모습도 좋았던 거 같다. 사실 정말 진짜로 나는 눈이 잘 안 보이지 않았다. ㅋㅋ


그럼에도 나는 관심쟁이였나 보다. 아빠 엄마의 염려의 대상이 안경이었기에 나는 안경 맞추는 것이 좋았고 안경태를 고르는 것은 신나는 일이었다. 그렇게 좋았던 것이 한순간 더위와 안경 재비라는 속삭임으로 저 멀리 던져버리고 싶을 정도로 갑자기 싫어졌다.


어쨌든 그때는 그랬고 그 뒤로 나는 시력이 나쁘지 않음을 어필하며 언젠가부터 안경을 멀리했다. 그 뒤로 한동안은 안경을 쓰는 것 자체를 귀찮아 아예 쓰지 않았는데 어른이 되고 나니 시력은 좋으나 난시가 심해 눈에 피로를 잘 느끼는 편이라 무언가를 많이 보고 집중해야 할 때는 안경을 찾게 되었다.





아무튼 ,


더위와 안경 재비의 좋지 않은 기억의 대구를 그 결혼식 참석 이후 또 올 일이 있냐고 물었던 나는 그 뒤로 정말 대구에 가지 않았었다.





이모부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런데도 나는 대구에 가지 않았다. 당시 나는 중학교 2학년이었고 하교하여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었고 그 도로의 거의 그 끝쯤 다 달았을 때 엄마에게 연락을 받았다. 지금 내려가는 길인데 너는 올 필요 없다며 그렇게 알고 있으라고 했다. 이모부가 돌아가시면 학교를 빠지는 일이 정당화되진 않는다. 왜냐하면 직계가족은 아니기 때문이다. 결석이 합리화되지 않는 이모부의 부고 소식은 때마침 시험기간이었기에 엄마는 나에게 중간고사를 치르며 그대로 머무르라 말하시며 그저 안 좋은 일에 아빠와 둘이 다녀오겠노라 하셨다.


이모부의 얼굴을 그려 보라 하면 사실 잘 떠오르지 않는다. 그냥 그 목소리 그리고 그 무릎에 나를 끌어당기며 안아주시던 그 느낌만이 남아있다. 연애를 하여 결혼했던 이모부는 어떤 직업을 가지고 계셨다가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하셨다. 사나이로 태어나 한번 멋뜨러지게 살아야 한다고 가오를 잡으시던 이모부는 포부도, 추진력도, 상당했다. 그런 이모부는 내가 초등학교 3, 4학년 때쯤 사업을 시작했었고 연애결혼하여 자신에게 시집온 이모를 기필코 호강시켜주리라 다짐하셨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외할머니 집에서 이모부를 만났을 때 아빠는 이모부를 부러워했고 역시 남다르다며_ 성공했다며_ 좋겠다고_ 어깨를 치켜세우셨다. "별거 아입니더. 아직 멀었죠" 라고 말하는 이모부의 앞에는 길고 각진 그랜저가 있었다. 아빠는 저런 세단도 다 타고 대단하다며 - 부러워하며 기름값도 많이 들 것 같다고 말했고 '차'라고는 하나도 모르던 나는 그냥 그 까만 각진 자동차를 바라보기만 했었다. 이모부는 외제차 뽑아봐야 성공한 거라며 더 큰 성공을 꿈꾸고 계셨다.


이모부가 사업에 성공하자 이모네 집은 여유가 생겨 보였다. 무엇보다 놀러 다니는 것에 적극적이었기 때문에 내 눈에는 그리보였다. 방학도 아닌데 날이 서서히 더워지며 여름이 가까워지자 놀러 가자며 그 더운 대구에서 우리 집까지 와서는 주말이 지나서도 내려가지 않았다. “ 엄마, 혜경이는 학교 안 가 ? ” 그렇게 물어보던 나의 물음에 엄마는 그저 빙그레 웃어주기만 하셨었다. 월요일에도 화요일에도 나는 학교에 가는데 대구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있는 이모네 식구들이 신기했고 절대 결석은 용납하지 않고 개근상 받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며 그것이 성실함을 대표하는 것이라고 가르쳐주신 엄마의 교육관에 어긋나는 이모부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 이모부는 지금 이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데_ 학교가 하나 중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아이는 놀아야 하며 가족과 함께할 수 있으면 그게 학교 가는 것보다 더 깊은 공부이기에 사촌동생 경이의 담임선생님께 이야기해서 결석을 하기로 정했다고 한다. 아빠가 그렇게 대놓고 학교를 안 가도 되는 정당성을 만들어주는 모습에 어린 나는 적잖이 놀랐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이유 중 가장 큰 이유는 주말에 고속도로를 타면 막히기에 더 놀다가 한가한 평일 오후에 내려가기 위함이라고도 말했다.


우리는 계곡에서 감기가 걸릴 때까지 놀았다. 지겨울 만큼 사촌동생과 붙어있었다. 좋은 것도 하루 이틀이지 지칠 만큼 함께라는 것이 계속되다 보니 이제는 내 잠자리에 경이와 함께 있는 것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때 함께 했었던 물놀이는 정말 재미있었다. 몇 군데를 갔건 거 같은데 어쨌든 재밌고 즐거웠다. 경이는 아직도 우리 엄마를 만나면 그때 갔던 계곡이 너무 좋았다고 말한다고 한다. 어릴 적 기억 속에서 언제나 나라는 언니와 이모라는 우리 엄마가 떠오른다고 했다. 그때 같이 함께 재미있게 놀길 잘했다. 경이에게는 그 여름이 오던 그즈음의 기억이 아빠와 함께 하며 놀러 다녔던 행복하고 소중한 기억이기에 정말 그때 잘 놀아버린 것이 너무 좋았던 거 같다. 그 기억 속에 경이의 아빠와 엄마 동생 그리고 우리 식구들까지 함께라는 사실이 내게는 너무 고마웠다. 경이의 그 말을 들을 때마다 그때 지겹도록 함께 있어서 불편해했던 어렸던 내 마음이 미안하기 짝이 없다.


경이에게 어린날의 좋은 기억은 힘들 때 생각나는 버팀목이 되었을 것이다. 아빠가 생각날 때면 생각나는 그날의 좋은 기억이 아빠를 더 찬란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모부 말이 맞았다. 학교 가는 것이 어디 하나 중한 게 아니었다. 놀 수 있을 때 같이 놀아야 했다.




이모부가 돌아가시고 외갓집에 가서 이모와 경이 그리고 호지를 만났다. 호지는 아직 한참 어렸고 경이는 이제 곧 중학생이 될 쯤이었다. 잘 나가던 사업가 이모부가 그리된 것은 IMF를 맞아 경제가 심히 기운 탓이었고 들어와야 할 자금이 순탄하게 처리되지 않자 그 소식에 머리를 부여잡고 그대로 쓰러지시곤 그렇게 가족들과 작별하고 세상을 떠나버렸다고 했다. 뇌졸중이라고 했다. 그렇게 한순간에 사람이 죽었다.


막내 이모는 이제 가장이 되었다. 사랑하여 연애하여 결혼하여 행복하기만 하던 그 모든 것들이 갑자기 변했을 것이다. 그렇게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머리를 부여잡고 이 세상과 등지는 일이 드라마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엄마는 막내 이모부를 얼음물을 좋아하던 사람으로 기억한다. 한여름이고 한겨울이고 언제나 얼음이 들어간 물을 그렇게 마셔댔다고 말이다. 그러니 나에게 아주 차가운 물은 가끔 마시고 언제나 중간 정도의 물을 마시길 권하신다. 그때 경이 아빠가 그렇게 얼음물을 많이 마시더니 갑자기 사람이 그렇게 피가 거꾸로 솟아 쓰러진 거 같다면서 말이다. 결혼을 하고 내 남편이 차가운 물을 마시는 모습을 볼 때마다 엄마는 나를 손가락으로 찌르신다. 나의 이모부처럼, 본인 동생의 남편처럼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제발 차가운 물은 멀리하라고 알려주시는 것이다.




고등학교 2학년 때쯤 아빠의 핸드폰에 있는 문자를 보았다. 엄마가 아빠에게 보낸 문자였다. 40만원 경이네 부쳐줘. 고마워. 아빠의 휴대폰은 비밀번호로 잠금 되어 있지 않다. 아빠의 휴대폰은 저장되어있는 사진을 보기도 하고 내 셀카를 찍어 남겨두기도 하는 물건이었다. 그렇게 내 사진을 찍어두면 아빠는 그 사진을 내가 전화 올 때 띄어놓으셨다. 그게 참 좋았다. 가끔 내 얼굴이 배경화면일 때는 낯간지러웠지만 그래도 좋았다. 그날도 아마 스스럼없이 만졌던 아빠의 핸드폰에서 어찌어찌하다 보게 된 문자였다. 그 문자를 보고 나는 이걸 보았노라 발설할 순 없었다. 하지만 그냥 마음이 먹먹했다. 돈 사십만원을 부탁하는 이모나 그걸 아빠에게 전해야 하는 엄마나 다 속이 상할 것이 너무 막막하게 다가왔다. 아빠는 그렇게 몇 번이고 이모에게 돈을 부쳐주었다. 내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 용돈을 과하게 요구하면 엄마는 경이는 고등학교 교육비 낼 돈이 모자라는 날도 있다는데 돈 소중한 줄 알고 쓰라고 말하셨다. 그때는 그런 말을 들어도 당장 용돈을 받고 싶어 알았다는 말을 스쳐 지나가게 했던 것 같다. 전혀 돈 소중한 줄도 모르고 말이다.


그 사십만 원은 경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위한 돈이 었을지 모른다. 경이는 피아노를 쳤는데 잘 쳤다. 부유하던 그 시절에는 촉망받으며 피아노를 배웠을 것이다. 긴 머리에 하얀 얼굴 그리고 키까지 늘씬하게 큰 경이는 아무리 보아도 귀티가 나는 아이였지 없는 티가 나는 아이는 아니었다. 경이의 꿈이 원대하였을지 모르겠으나 좋은 대학보다는 장학금을 주는 대학을 선택했고 어쨌든 끝까지 피아노를 놓진 않았다.


엄마는 그런 경이를 장하다 여겼다. 내가 경이였다면 그리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욕심이 많은 아이였고 현실을 비관하고 화만 냈을지 모르겠다. 경이는 어린날의 여름날 아빠를 간직했고 엄마 곁에서 묵묵히 공부했으며 자신이 하고 싶은 피아노를 계속 치는 것으로 자신을 보듬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아빠의 기억이 적었던 호지는 조금 엇나갔다고 한다. 하지만 경이는 호지를 사랑했고 잘 보듬었는지 호지 또한 늘 가족의 곁에 어쨌든 내가 알던 그 귀여운 모습 그대로 있어주었다.



이모부가 돌아가시고 나서 이모는 이모부의 핸드폰을 폐기하지 않으셨다. 연락 올 사람도 있었고 갚아나가야 하는 돈도 있었기에 그 연락망인 이모부의 번호를 없앨 수도 없다 하셨다. 어찌 생각해보면 그건 그냥 없앨 수없었던 물건이었던 거 같다. 어린아이들는 어른의 물건을 탐낸다. 핸드폰이 없던 경이는 자센의 아빠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나에게 문자를 보내겠노라 말했다. 중학생이었지만 휴대폰이있었던 내게 경이는 학교를 다녀온 오후쯤 그렇세 문자를 자주 보내왔었다. 나는 몇 주는 답장을 계속하다 어느새 좀 귀찮게 느껴졌었다. 뻔한 문자의 연속이었다. 언니 뭐해? 나는 미술 학원가.


사람은 이기적이다. 아무리 되돌아보고 곱씹어봐도 참 안되었다 여겼음에도 그 순간은 나를 위한 이기적인 행동으로 경이의 문자를 그렇게 귀찮아했었다. 경이가 문자를 쓰는 그 핸드폰은 이모부의 것이었다. 자신의 폰이 없으니 하교 후 이모의 허락을 받고 심심함을 풀고자 만지작거리며 문자를 보낼 사람이 나였나 보다. 이모부의 핸드폰은 모든 것은 다되었지만 안 되는 기능이 있었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확인해야 하는 메뉴였는데 그 비밀번호는 이모도 모른다고 했다. 그럼 어떻게 하냐는 물음에 경이는 이건 그 누구도 모른다며 아빠만 알고 있는 건데 아빠가 이젠 없다 라는 말을 하며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 눈빛이 참 잊히지 않는다.




이모는 그렇게 모르는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가야만 볼 수 있는

잠겨진 이모 부의 핸드폰을 한동안 버리지 않고 그의 유품의 하나로 곁에 두셨다.














그리고 몇 년이 흘러 이모를 다시 만났을 때는 나의 할머니 장례식장이었다. 내 친할머니 장례였지만 사돈 되는 쪽에서도 와보는 게 도리였으므로 그 대표로 작은 외삼촌과 막내 이모가 오셨던 것이다. 이모는 하얀색 소나타를 몰고 왔다. 사업이 망해 집이 차압되고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었다던 이모가 자차를 몰고 도착하자 나는 그런 이모의 모습에 적잖이 놀랐던 것도 있었지만 내가 이모를 못 뵀던 시간 동안 힘겹게 잘 살아주셨구나. 이겨내셨구나. 그렇게 생각되었다.


엄마는 이모가 고생은 했지만 엄마로서 자식 둘을 곁에 두었으며 그렇게 이쁜데도 어떻게도 남자는 멀리했고 일을 하면서도 그 누구의 말을 전하거나 엿듣지 않는다 했었다. 말 많은 여자들이 일하는 곳에서 돈을 벌고 있었지만 왕왕거리는 뜬소문이나 험담에 가담하지 않는다고 하셨다. 엄마는 자신이 본인 동생이지만 참으로 경이 엄마를 좋게 보는 것이 그런 것_ 때문이라 하셨다.


그러면서 사람은 그래야 한다고 했었다.





큰 키에 하이힐

그리고 상갓집에 뻔하디 뻔한 검정이 아닌 흰색 재킷과 같은 색 바지의 투피스 정장을 차려입고 온 이모가 내 눈에 미친 듯이 빚나 보였던 날이었다.



내 이름을 부르고 오랜만이라고 하는 이모에게 나는 웃으며 미소로 달려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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