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하는 기억 ㅣ기억적기
아빠의 외갓집은 시골 할머니 집에서 언덕을 넘어가면 나왔다. 나에게 그 집을 찾아가라고 하면 못 찾을 테지만 어쨌든 어릴 때 언덕을 넘어 조금만 더 가면 도착했던 아빠의 외갓집은 천장이 좀 낮았지만 손님을 맞이하는 데에 주로 쓰이던 그 집의 메인방은 좀 길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빠는 군인이었고 PX에서 스카치블루를 저렴하게 구입하여 명절 때면 고향의 온 동네 친척들에게 나눠주러 시골 마을을 그토록 다니셨다. 그렇게 그 군인 술이라 불리우는 스카치블루라는 양주를 들고 그곳에 몇 번 방문 한 기억이 있고 왜인지는 모르나 스무 살이 넘어서는 엄마와 둘이서 방문하여 아빠의 외갓집 사람이 된 내가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는 그쪽 며느리와 어색하도록 과일을 먹으며 앉아있었던 적도 있었다. 그분은 두세 번 만났었는데 그때마다 내가 미대에 간 것에 대해 궁금해하셨고 어떻게 공부시키고 입시를 거쳤는지 물어보곤 하셨다. 그때 그걸 우리 엄마에게 여쭙던 그 집 며느리분의 아이들은 아직 초등학생이었는데 말이다. 어떻게든 적막을 그대로 둘 수 없어 서울 어디 사시냐로 이야기를 이어가더니 사당동에 산다는 말에 그 근처 낙성대 쪽에 자신의 언니의 형님이 산다고까지 말했던가 _
아무튼 그렇게 그곳은 어색한 곳이다. 어릴 때 아빠와 같이 들렸을 때는 그냥 그렇구나 했지만, 아빠의 외삼촌댁까지 엄마와 내가 단둘이서 어쨌든 꼭 인사를 드려야 했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별로이다.
한동안 그 집을 꽤 잊고 지냈었다. 그 집의 사람들의 얼굴은 사실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특히 아빠의 외삼촌이라는 분은 내가 만난 적이 있던가? 들를 때마다 외삼촌은 외출 중이고 다른 분들만 만난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나는 아빠의 외삼촌이라는 분을 할머니 장례식장에서 가까이 볼 수 있었고 그분의 긴 이야기를 굳이 듣고 있어야만 했었다. 어른이 이야기하시는데 일어나기도 힘들었고 아빠의 외삼촌이라는 분이 말을 끊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찌어찌하다가 그분이 술이 꽤 되신 거 같기도 한 얼굴을 하고 우리 쪽으로 왔었고 할머니의 돌아가심에 대한 슬픔을 자신의 머리가 많이 빠지고 반질반질해진 이마와 머리통 부분인 그곳을 몇 번이고 쓸어 올리고 내리기를 반복하며 술에 취해 명확하지도 않은 발음으로 그렇게 이야기를 계속하셨는데 끄덕끄덕이라도 안 하면 왠지 안될 것 같았고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나의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이고 슬픔이었기에 나는 그분의 그 말을 앞에서 고지 곧대로 들어드리고 있었다.
결국 아빠의 외삼촌은 눈물이 날 것 같은 눈동자를 보이더니 흘리지는 못하시고 천장을 몇 번을 올려다보며 뜨겁게 달궈진 눈물을 식히는가 싶더니_ 끝내 참고 참아내어 그 눈물을 떨구지는 않더니, 자신은 밖에 나가 길을 좀 걸어야겠다고 말했다. 이 밤에 어딜 걷겠다는 거냐며 고모와 아빠는 말렸지만 그분은 아까 웅얼거리며 말했던 나의 할머니와의 추억처럼_ 그때처럼 내 할머니를 만나러 갔을 때처럼_ 그렇게 걷고 싶노라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지루했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던 그분의 긴 이야기 자리가 끝나자 엄마는 아빠에게 “아이고 외삼촌이 많이 속상하신 거 같다” 며 좀 취하신 거 같다고도 말했다. 저렇게 취한 모습 처음이라며 "많이 취한 거 맞지 ?" 라고 아빠에게 물었다. 나는 조금 작은 목소리로 "근데 누구야 ?" 라고 물으니 엄마가 "아빠 외삼촌. 너희 할머니 동생이잖아." 라고 알려주었다. 나는 그제야 저분의 그 명확하지 않은 발음으로 추억을 상기시키며 그리움을 토하던 그 말과 진정으로 슬퍼 보이던 그 얼굴이 이해되었다. 할머니 동생이니까, 그러니까 너무 슬플 것 같았다. 나보다 더 슬플 것이 맞는 거 같았다. 사실 할머니는 병을 고치기 위해 수술을 몇차례 했었고 병중에는 일 년이 넘는 시간을 꽤 보냈기에 언제쯤 돌아가실지에 대한 날짜를 우리 모두 알고 있었다.
내가 아는 장례식장은 별로 없었으므로 할머니의 장례 때 나는 고모와 아빠 그리고 삼촌이 할머니를 떠나보내는 그 장례를 준비하는 모습을 보고 꽤나 놀랬었다. 어쨌든 그들의 엄마라는 사람이 세상에서 사라진 것인데 이성을 앞세워 종이컵과 일회용 그릇들을 둘째 고모부 회사에서 협찬받고 술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저렴하다는 군납용을 아빠에게 부탁했으며 철두철미하게 부조금을 처리하는 모습에 슬픔은 있는 것인가, 의야했다고 해야 하나? 나도 나중에 엄마가 나이가 들어 돌아가신다면 아무리 그래도 저렇게 될까? 그런 생각들이 넘나들던 내가 참여했던 첫 번째 장례식이었다.
할머니의 세상 떠남에 그 누구도 뭔가 슬픔을 표하지 않는 거 같아 당혹스러웠던 그곳에서 아빠의 외심촌이라는 분의 과거 회상과 진심 어린 슬픔의 표정이 나를 누군지도 모르겠는 사람이 내 앞에서 자신의 말을 들어달라며 오랜 시간 앉아 그렇게 호소할 때 내가 피할 수 없던 이유였기도 한다.
그렇게 그분과 만났었고 시간이 지나 아빠 엄마는 문경으로 귀농하여 집을지어 살게 되었다. 그리고 명절이 되면 이젠 아빠가 그 언덕을 넘어 외삼촌에게 인사하러 가지 않고 그 할머니 동생이라는 아빠의 외삼촌 되시는 분과 그의 식구들이 새로 지은 아빠 엄마의 집으로 방문하여 명절 인사와 안부를 물었다. 그리하여 나는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십 년 정도가 지나 아빠가 자신의 고향에 한옥을 짓고 살면서부터 할머니의 동생이자 아빠의 외삼촌을 더 자주 만날 수 있었던 거 같다.
외삼촌은 주당이셨고 그렇게 방문하면 꼭 술판을 벌여 열심히 자셨다. 자신의 누나의 남편과 아들 그러니까 내 할머니의 남편인 나의 할아버지 그리고 할머니의 아들인 나의 아빠를 그렇게 챙기셨다. 아빠가 시골로 귀농하기 전까지는 할머니가 돌아가셨으니 혼자 계신 할아버지의 안부와 보살핌을 팔걷어부치고 나섰던 사람이기도 하였다.
그러니까 아빠의 외삼촌이라고_ 때 되면 방문하는 그 사람은 할머니의 동생이라는 이야기다.
근데 아무리 봐도 너무 젊었다. 할머니 동생이라면 할머니랑 비슷한 연령대여야 하는 거 아닌가? 아빠와 비슷한 연령대 같기도 하고_ 아니, 그분의 자식이라고 같이 오는 남자아이는 나보다 어린 걸 보니 아빠보다 더 나이를 잡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아빠의 외삼촌은 술을 잡수시고 늘 할머니 이야기를 했다. 우리 누나가 나 어릴 때 집에서 먹을 게 없어서 굶다가 누나 보고 싶어서 40분 넘게 걸어서 여기 오면 같이 놀아주었고 저녁노을이 나올라치면 꼭 주머니에서 오백 원을 꺼내 주며 매형 올 시간이니 어서 집으로 가라고 했다는 그 이야기 말이다. 그러면서 꼭 누나가 매번 뭐 사 먹으라고 주던 그 오백 원이 그때 얼마나 큰돈인지 아냐며_ 그때 오백 원이면 지금 얼마다 -! 라며 큰소리를 내신다.
자신이 그렇게 누나를 좋아했고 누나가 시집가니 너무 보고 싶어 그렇게나 눈물이 났더라던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하며 오백 원을 자신에게 척척 내주던 누나가, 그 큰돈이 매번 주머니에서 나오는 누나가, 정말 시집을 잘 갔구나 싶었다며 나의 할아버지에게 “매형이 돈을 좀 잘 벌었나 봐요?”라고 꼭 물어대는 레퍼토리가 있었다. 그러면 나의 할아버지는 그렇게 할머니가 돈을 준 줄도 몰랐다며_ 난 모르는 일이라고 답하셨다. 어린 나이에 언제나 함께 있던 누나가 집에 가면 이제는 없다는 사실이 어렸던 자신에게는 너무나도 섭섭하고 무서운 일이었다며_ 놀 거 없고 마음 둘 곳 없던 자신에게는 누나가 최고였다는 그분에게서 매번 듣는 그 말에 나는 우리 할머니의 그 작지만 시원한 웃음소리가 생각났다.
나는 아빠의 외삼촌이 다녀가신 다음날 엄마에게 물었다. 근데 할머니 동생이 왜 이렇게 젊냐며 그 이유를 말이다. 나의 아빠와 삼촌의 경우도 스무 살 정도 차이가 나는데 그건 삼촌이 막둥이인 이유도 있지만 중간형제로 고모들이 있고 사실은 삼촌 위에 한 명의 삼촌이 더 있었는데 어릴 적 사고로 죽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어쨌든 아빠의 오 남매의 막내인 삼촌처럼 그렇게 나이 차이가 나더라도 너무 심하게 나는 거 아니냐며- 왜 이리 젊냐고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엄마는 네 할머니의 아빠가 또 장가들어 낳은 자식이라 그렇게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거라며_ 배다른 자식임에도 저렇게 사이가 좋은 게 신기한 거라고 알려주었다. 그러면서 그전 엄마들 자식 중에 유일하게 외삼촌에게 곁을 내주었던 거 같다며 그렇게 하기도, 그렇게 한다고 한들 둘이 서로 살가운 게 참 힘들 텐데 저런 거 보면 진짜 할머니가 정이라는 것을 대단히 준거 같다고 말했다.
첩을 둘 정도로 나의 할머니의 아빠가 부자였던 것은 아니었던 거 같고 꼭 부자여야만 첩을 두던 시절도 아니였으니,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당시의 할머니의 아빠의 사정일지도 모른다. 엄마가 예전에 아빠에게 "자기네 집안은 참 별게 다 있다"고 했던 말이 생각이 났다. 그 말을 듣던 나는 분명 어렸었지만 아빠 쪽 친척 중에 옛날에 이혼이란 걸 한 사람도 있다고 엄마가 적잖이 신기하게 여기며 쳐다보던 그 표정이 기억나고 나 또한 내가 어렸던 당시에도 흔하지 흔한 이혼이 아니었기에 나이 많은 그 사람이 이혼을 했다는 말이 충격적으로 다가오기도 했었다. 그래서 그렇게 어르신이 그 예전에 이혼을 했었냐고 물었더니 엄마는 "그거 말고도 뭐 많아 - 네 아빠 집안은 별개 다 있더라" 라며 어린 나에게 뭔가를 숨겼던 그 대화가 불현듯 생각이 났었다. 어쩌면 그때 엄마는 자신의 시어머니인 나의 할머니의 아빠 이야기를 차마 어린 딸에게 하지 못했던 거 같다. 흉보는 거 같은 그 이야기를 굳이 꺼낼 필요도 없었고 그걸 알려줬다가 어린 내가 친한 할머니에게 입방정을 떨면 며느리인 엄마의 입장이 오죽 난감할 테니 말이다.
1943년에야 첩이라는 것이 이혼원인이 된다고 판시하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법상으로는 남자의 간통행위는 어쨌든 허용되던 시절이었다. 8.15 광복 후에야 첩이 법으로 금지되었으니 알고 보면 아빠의 외삼촌은 첩의 아들일지도 모른다. 나의 할머니의 엄마가 돌아가셨다거나 이혼을 했다는 말이 나오지 않고 “또 장가 들어서”라는 엄마의 대답에서 그 “또”라는 단어가 왠지 그렇게 추측하게 만들었다. 어쨌거나 그런 친동생 아닌 동생을 받아들이는 것이 꽤나 껄끄러웠을 터인데 할머니는 어리고 어린 그 동생을 품어주었나 보다.
할머니의 아빠가 그랬다니, 그 시절에 그러니까 할머니의 엄마는 어찌 됐을까, 그리고 할머니의 아빠라는 사람은 한번 더 장가를 가면서 그 먼저 낳은 자식들에게는 어찌 설명하고 대했을까? 그래서 그렇게 나이 들어 또 결혼해놓고 자식까지 낳아버리고_ 그 당시 그런 일이 있다는 게 나는 놀라웠고 어쩌면 할머니에게는 치부일 수 있는 그 사실을 듣게 되어 나는 할머니도 참 고생이 많았겠다- 싶었다. 그러면서도 다시 생각해보니 배다른 남동생을 할머니가 이뻐하고 챙겨주었던 것도, 아빠의 외삼촌이라는 그분이 우리 할머니에게 의지했던 사실도 참으로 다르게 다가왔다.
어린 나이에 태어났더니 이미 다 큰 언니 오빠들 틈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보듬어주었던 누나가 바로 할머니였고, 어쩌면 그 집에서 자라면서 눈초리를 받았을 테고_ 아빠라는 사람은 나이도 많았을 테고 무서웠을지 모르고_ 엄마는 일을 나갔고_ 그렇게 텅 빈 집에 혼자 있는 날이 많았던 아빠의 외삼촌이 시집간 자신의 배 다른 누나를 어린 나이에 사십 분을 참고 참아 걸어가며 찾아올 만큼 그 둘 사이에 이야기는 더 많고 서글플 테지.
그다음 해에도 아빠의 외삼촌은 한옥집에 방문하여 할아버지의 안부를 여쭈었고 아빠 엄마의 집에서 명절 인사 겸 술을 자셨다. 나는 그 외삼촌 식구라는 사람들과 조금씩 친해졌고 이내 촌수 정리를 해야 한다며 아빠의 외삼촌은 자신의 아들이 나에게 삼촌인 거라며 자신이 나이 먹고 느즈막에 자식을 낳는 바람에_ 내 아빠보다도 늦게 아빠가 되는 바람에_ (아빠와의 나이 차이는 굳이 꺼내지 않으시고) 자신의 아들이 나이는 어리지만 내가 모셔야 하는 윗사람임을 알려주었다. 나는 술도 같이 한잔 한김에 살갑게 아빠의 외삼촌 아들에게 "그러면 삼촌이 용돈도 주고 좀 그랬으면 좋겠다-" 는 농담을 하며 분위기를 띄었다.
한세대 그 다름 세대의 격을 따지고 촌수 따지는 일은 이미 할아버지를 통해 평생을 익혀왔고 나의 삼촌은 막둥이인 덕에 큰집의 오빠 언니와 같이 학교를 다니며 나이도 같아 친구로 지냈지만 집안에서는 윗세대로 모시고 공경받아왔다.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큰집의 오빠가 낳은 자식이 삼촌이 낳은 자식보다 세대가 낮기 때문에 나이는 많아도 7살밖에 안 먹은 삼촌의 아들에게 존댓말을 쓰라고 강요받았던 일도 새삼스러울 것 없을 족보를 따지는 행위는 할아버지의 집에서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그러한 주입식 교육에 비하면 술자리에서 웃으며 어린 삼촌에게 “삼촌”이라 높이 부르는 일이 대수 일리 없고 존댓말 하며 용돈 달라하는 농담쯤은 나의 기막힌 순발력일 뿐이다.
사람이란 어떤 관계나 위치 그리고 무슨 인연으로 맺어진 것보다는 한 사람이 나에게 어떻게 대해주었는지가 챙겨줌의 기본이 되는 거 같다. 아빠의 외삼촌은 외롭고 서글프던 외톨이 어린 시절 새 누나에게 온 마음을 위로받았고 그것을 어떻게든 돌려주고 보답하고 싶어 내 할아버지를 찾았다. 그리고 내 생각에는 그 시절의 그 마음을 잊고 싶지 않아 기억하려고 자신의 누나의 식구들인 나의 아빠 엄마 그리고 내 할아버지가 있는 그 집을 그토록 찾아오는 거 같았다.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어쩌면 아빠의 외삼촌이 태어나면서부터 그 당시 어렸지만 많이 자랐던 할머니는 자신의 아빠와 새엄마 사이에서 태어난 그 남동생을 엎어야 했고 돌봐야 했을지 모르겠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끌려했을지도 모르는 할머니의 행동은 결국 새로운 남동생을 사랑으로 대했고 아껴주었을 것이다.
아빠의 외삼촌에게도 따뜻했고 내게도 편안했던 '이 용순'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갔던 나의 할머니.
할머니가 시집오시기 전에는 어떠했는지 할아버지도 모를 것이고 아빠도 모를 것이다. 할머니의 꼬꼬마 시절은 또 어떠했을지는 아빠의 외심촌도 모를 일이 분명하다. 내 할머니였지만 아빠의 엄마였고 할아버지의 아내였으며 누군가의 누나였고 또 누군가에게는 딸이었던 나의 친할머니의 모든 이야기가 궁금해지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