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의 얼굴엔 개연성이 없었다.
투명 테이프가 말라붙어 누렇게 변한 편지봉투가 서랍 속에 누워 있었다. 그 속에는 빛나는 청춘 한 조각이 들어 있었다. 가난하고 못 배웠으며 자존심만 뾰족했던 여자를 위해 애를 태웠던, 한 남자의 진심이 갈무리되어 있었다.
"첫눈에 반했습니다. 연락처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당당하고 자신감에 차 있으면서도 정중했던 요구. 주변의 시선이 집중되는 걸 견디기 힘들었던 여자는 내향인이었다. 기대에 찬 반짝이는 눈동자, 남자의 용기에 지지와 환호를 보내는 청중. 공개적인 자리에서 하는 청을 거절할 배짱이 여자에게는 없었다. 남자가 취향이 아니었음에도 그녀는 당황한 채 연락처를 건넸다. 그리고 내심 그 용기만은 대단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데이트를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환하게 웃으면 눈이 없어지는 남자였다. 그는 복학생이면서도 신입생의 풋풋한 냄새를 풍겼다. 예전에 만나왔던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스타일이었다. 내향적이지만 얼굴에서 개연성을 따지는 여자의 눈에는 신선하기만 할 뿐, 별다른 감회를 주지 못하는 외형이었다.
"볼 때마다 이미지가 달라지네요."
굵은 컬로 펌을 한 머리를 허리까지 늘어뜨리고 브이자로 파인 카디건을 입은 여자의 모습이 인상적인 모양이었다. 수업을 들을 때는 후드티에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고 다녔으니까.
"예쁘다는 말이에요."
'어쩜 저렇게 하고 싶은 말을 망설임 없이 할 수 있을까?'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시고, 대화를 나누면서도 남자의 눈은 시종일관 사라졌다. 여러 주제로 대화를 나누고 앞으로 하고 싶은 일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눌 만큼 대화가 길어졌다. 유쾌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여전히 특별한 마음이 생기지 않는 사람이었다.
"27일에 달리전이 있는데, 좋아하시면 같이 가실래요?"
살바도르 달리. 흘러내리는, 일그러진, 시간, 세월, 흐름... 어쩌면 감정일지도 모를 무엇인가에 매료된 작가였다. 관심이 있다기보다 책을 읽다 보니 자연히 알게 되었다. 빈약한 지갑 사정 탓에 입장권을 끊어 가 볼 생각은 못 하고 그저 관련 잡지를 들춰 봤을 뿐이었다.
달리전 전시장 앞에서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여자를 발견한 남자의 눈이 다시 사라졌다. 이전에 만났던 여자가 있었을까? 이런 매너는 어디서 배웠을까. 가풍인가. 남자의 행동에는 어색함이 없었다. 세련된 매너는 이미 그의 습관처럼 몸에 배어 있었고, 타인과의 거리를 재는 감각 또한 자로 잰 듯 정확했다. 달라진 점이라면 여자에 대해 조금 더 자신감이 생긴 느낌이었다. 하긴 애프터를 두 번이나 받아준 거라면 희망을 가질 법도 했다.
문제는 여자가 '얼굴에서 개연성'을 따진다는 거였다. 남자는 그녀의 개연성에 부합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다시 만나기로 한 것은, 지금까지 알아 왔던 '개연성 있는 얼굴'들이 무조건 멋진 서사를 만들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탓이었다.
어지간하면 교제를 해 볼 생각이었다. 설레는 사람과 만나봤지만 끝까지 설레지는 않았다. 그럼 평범하게 시작하면 설레는 지점에 닿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었다. 그렇게 세 번째 만남은 놀이공원에서였다. 함께 놀이기구를 타고, 귀신의 집에 들르고, 사진을 찍었다. 이쯤이면 사귀자고 말만 안 했을 뿐 연인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일까. 남자는 예고도 없이 선뜻 손을 잡았다. 하지만 여자는 그 닿음에 당혹을 넘어 불쾌함을 느꼈다. 고작, 손이었다.
"왜 멋대로 잡아요?"
황당한 말이었다. 남자는 놀란 것 같았다. 지금까지 분위기가 좋았고, 겨우 손을 잡았을 뿐이다. 포옹을 하거나 입을 맞춘 것도 아니었는데 이렇게 격한 반응을 보이는 여자를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이렇게 빡빡하게 굴어요?"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한 말이었다. 거리감은 상대에 따라 달랐다. 단 하루 만에 빈틈없이 좁힐 수도 있고, 백 날이 지나도 손 한 번 잡지 못할 수도 있었다. 여자에게 남자는 세 번 만에 손을 잡을 상대는 아니었다. 그 남자의 얼굴에는 그럴만한 개연성이 없었다.
"손, 잡을 수도 있죠. 맞아요. 그럴만한 상황이었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물어보지 않은 건 잘못입니다."
남자의 얼굴에 답답함이 스쳤다. '왜 이리 튕겨? 나 좋아하는 거 맞나?' 싶은 생각도 들었을 것이다. 여자의 호감을 예측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남자의 고뇌가 시작됐다.
"자신감, 당당함, 우월함. 장점인데, 그게 문제예요. 본인도 그걸 알고 있고 그 부분을 매력으로 어필하는 것도 알아요. 그런데 왜 내가 당연하게 순응할 거라 생각하죠?"
남자는 할 말을 잃었다. 생각해 보지 않은 부분이지만, 맞는 말인 것 같았다. 여자보다 나은 학벌, 좋은 배경, 스펙. 그는 여자가 자신을 거절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했던 치부가 들춰진 기분이었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오해하게 했다면 미안해요. 손 잡은 것도 미안합니다. 조금 더 다가가고 싶었는데, 성급했어요."
당황한 남자의 변명을 들으며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럼에도 더는 만나고 싶지 않았다. 자격지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당하지 못하겠다는 비겁함일지도 몰랐다. 무엇보다 남자는 그녀가 따지는 개연성에 부합하지 않았다.
"여기까지인가 보네요."
더 만나더라도 설렘은 없을 것 같았다. 세 번이면 충분하지 않은가. 이십 대의 오만이었다. 일주일이 지나 남자에게서 긴 편지를 받았다. 자만했음에 대한 참회와 한 번의 기회를 갈망하는 그의 진심은 꽤 오랜 시간이 흘러서야 여자의 마음에 닿았다. 설렘으로 닿았다. 그는 단지 서툴렀구나.
그래서 여자는 그 소중한 감정을 버리지 않고 서랍 속에 고이 뉘어 둔 모양이었다.
추억의 한 조각으로.
[오래된 편지 시리즈]
1편: 그 남자의 얼굴엔 개연성이 없었다 (현재글)
2편: (나는 머저리였네요.)
3편: (그때는 미안했습니다.)
#오래된 편지#청춘#개연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