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머저리였네요.
햇빛에 하얗게 바랜 봉투를 열자, 새싹 같은 초록색 속지가 있었다. 세월의 풍파를 고스란히 맞으며 노랗게 익어버린 겉봉투와 달리, 그 속에는 여전히 봄의 설렘이 남아있었다. 의욕과 야망이 칼날처럼 날이 서 있던 청춘의 틈새로, 불현듯 스며들었던 첫사랑이었다.
그 여자는 연분홍색 니트가 유독 잘 어울렸다. 느슨하게 흐르는 목선 아래로 드러난 쇄골이 단정하고 예뻤던 사람. 객관적인 미인의 기준을 들이대지 않아도, 시선이 그녀에게 머물렀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끌림은 나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정해진 궤도를 전력 질주하던 삶에서 돌연 한눈을 팔게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 낯선 감각을 외면할 수 없었다. 나는 다분히 의도적인 공개 고백으로 그녀의 세계에 발을 들였다. 사람들 사이에서 해사하게 웃고 대화에 잘 어울리면서도, 부끄러움이 많은 여자. 나는 그녀가 거절할 수 없는 명분을 교묘하게 쌓아 올렸다.
그녀의 연락처가 마침내 손바닥 위에 놓였다. 종이 위에 꾹꾹 눌러쓴 숫자들이 내 망막을 지나 기억의 중심부에 박혔다. 차라리 기계적인 저장 공간에 맡겼어야 했다는 사실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이 열 자 남짓한 숫자들이 평생의 낙인이 될 줄도 모르고, 용감하게 그것을 해마 깊숙이 새겨버렸다.
예쁘기만 했다면 괜찮았을까. 똑똑함에 반했다면 언제나 맹점은 있었다. 배경이 훌륭했다면 이용할 가치라도 따졌을 것이다. 망설임은 부질없는 저항이었다. 나는 결국 수화기를 들었다.
첫 데이트, 내가 치명적인 오판을 했음을 깨달았다. 단순히 예쁘다는 말로는 부족한 무언가가 마음을 사정없이 두드렸다. 설렘을 숨기지 못하고 반짝이던 눈동자, 쏟아지는 햇살 아래 부서지던 웃음소리. 수줍음이 많을 거라는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그녀는 당당했고, 한없이 자유로웠다. 우리의 대화는 경계 없이 흘러갔다. 몇 시간을 떠들어도 지루함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타인과의 대화로 전율에 가까운 감각을 느껴본 건 생애 처음이었다.
한 번이면 충분할 줄 알았다. 호기심이든 관심이든, 막상 마주하고 나면 환상은 깨지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부터 다음 만남까지, 그녀는 단 한순간도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시시때때로 차오르는 연락의 충동을 억눌러야 했다. 이미 그녀에 대한 ‘탐색’은 끝났고, 내 삶에 그녀가 들어설 자리는 없었다. '연애쯤이야 가볍게 하면 되겠지'라는 오만이 싹텄다.
두 번째 만남, 우리는 나란히 앉아 공연을 보았다. 그녀는 내가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더 깊고 풍부한 감수성을 지닌 사람이었다. 공연이 끝날 무렵, 덜컥 겁이 났다. 상처를 주는 건 아닐까. 평범한 연애 놀음이나 하려던 생각에 브레이크가 걸렸다. 차라리 지인으로 남는 게 낫지 않았을까.
나란히 걷는 길은 평화로웠지만, 내 안은 폭풍 전야였다. 손끝에서 피어오르는 저릿한 감각이 선명했다. 주먹을 꽉 쥐며 솟구치는 충동을 참아냈다. '그깟 손 한 번 잡는 게 뭐 어때서?'라고 자문했지만, 안 될 일이었다. 아무 말도 못 한 채 무거운 침묵만이 흘렀다. 넘쳐흐르는 마음을 그녀가 모를 리 없었다. 어느 날, 그녀가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
“손, 잡아도 돼요?”
직진이었다. 올곧게 부딪쳐 오는 그 눈빛을 피할 길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손을 내밀지 못했다. 그 손을 잡는 순간, 인생의 모든 견고한 계획이 흔들릴 것 같았다.
“손만으로 될 것 같아요? 난 안될 것 같은데.”
되물음에 발갛게 달아오른 그녀의 얼굴은 죽도록 예뻤다. 그러나 마음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결국 이런 식으로는 갈 수 없었다. 지인으로 남기엔 마음이 너무 크고, 담백한 만남을 이어갈 자신도 없었다.
“우리, 그만 만날까요?”
솔직한 선언에 베인 건 정작 나였다. 놀란 기색이 역력하던 그녀의 눈꼬리가 이내 차분하게 내려앉았다. 차라리 화를 내거나 뺨을 한 대 쳤다면 마음이 후련했을지도 몰랐다. 그녀는 잠시 침묵하다가, 이내 엷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알겠다고, 잘 지내라고, 그동안 즐거웠다고.
그녀는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후회는 오롯이 내 것이었다.
[손이라도 잡아 볼 걸 그랬습니다.
보잘것없는 것을 잡느라, 따뜻한 손을 놓쳐버렸습니다.
나는 참 머저리였네요.]
편지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쓰지 않고는 견디지 못해 적어 내려간 글들. 끝내 수신인에게 닫지 못했던 푸른 마음이었다.
#편지#첫사랑#우즈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