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편지 3

그때는 미안했습니다.

by 하이진

어!! 네가 왜 여기서 나와?


고등학교 시절부터 지인이나 친구들과 주고받은 편지가 쌓인 보물상자를 찾았다. 설레는 마음이 가득한 편지를 하나둘 열어젖혔다. 다정한 인사, 반가운 소식, 놀림이 섞인 안부, 철 지난 크리스마스 카드가 뒤죽박죽 섞여 있었다. 단숨에 스무 살의 풋풋한 시간으로 타임슬립했다.


[당신의 고운 두 손 위에

먼저 당부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마음의 전부, 혹은 생각의 일부라도 글이 전달할 수 있을까

염려가 되지만 조금이라도 전하고 싶습니다.]


편지는 반듯한 필체, 진지하다 못해 정중하기까지 한 문체로 시작됐다. 개연성 없는 얼굴을 가졌음에도 내게서 예외를 만들어 냈던 대단한 남자였다. 하지만 그 개연성이란 것도 굉장히 불공정한 것이었다.


어린 시절 웹소설과 웹툰으로 단련되어 온, 터무니없는 내 미적 감각은 정상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사춘기 시절 형성된 미학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그러므로 내 개연성 없다는 평에 절대 실망해서는 안된다는 걸 미리 강조하고 싶다.


그렇게 피곤한 잣대를 가지고도 나름 연애를 해오긴 했는데, 현실에서 찾을 수 있는 그나마의 존잘남들이었다. 그리고 깨달은 것은 현실과 이상의 거리는 태양계를 벗어나는 수준이었다. 존잘남들은 자신이 잘난 줄 알았고, 덕분에 서사가 버라이어티 했다. 잘난 순정남 같은 건 없었다. 적어도 나는 만나지 못했다. 그렇게 얼굴로 개연성 찾는 걸 포기할 즈음이었다. 공개고백이라는 무리수로 사람을 옭아매는 신선한 남자를 만났다. 내심 기백이 대단해 보였다. 저 정도 용기라면 마땅히 기회를 줘야지. 데이트는 그렇게 시작됐다.


설렘으로 만나도 후지게 끝났는데, 무덤덤하게 만나면 설렐지도 모르잖아. 안 하던 짓 해보자. 세 번! 삼세판이지. 그렇게 혼자만의 룰을 가지고 첫 만남이 시작됐다. 나쁘지 않았다. 매너도 좋고, 반듯하게 자라온 티가 팍팍 났다. 그래서인지 자신감이 좀 과해 보이긴 했다. 거절당할 거라는 생각을 안 하는 것도 같고. 하긴, 만나자고 해서 선뜻 나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


생각보다 대화는 잘 통했고 이야기도 잘 들어주었다. 솔직히 유니콘 같은 남자 친구가 될 것도 같았다. 얼굴이 유니콘이 아니라서 문제였지만. 까다로운 미적 감각 탓인지 첫 만남에서는 심장의 속도가 조금도 빨라지지 않았다.


두 번째 만남은 야외의 탁 트인 공원에서 데이트를 즐겼다. 가벼운 차림으로 한 손에는 음료를 들고 산책을 했다. 바람에 날리는 머릿결이면 더 좋았을까? 곱슬머리였다. 찰랑이는 내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심장박동에 귀를 기울였다. 유쾌한 시간, 정중한 태도, 잘 통하는 대화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징조가 나빴다. 나는 역시 안 되는 걸까? 어린 시절 잘못 읽은 책이 이렇게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칠 줄 알았다면 가려서 독서를 하는 거였는데...


약속한(혼자만의) 세 번째 만남이었다. 훨씬 편안하고 부드러워진 분위기였다. 세 번쯤 만났으면 이제 사귀는 건가 보다 싶었을까? 하지만 확실하게 표현하지도 않고 손부터 잡은 건 선을 넘은 게 아니었나? 무엇보다 개연성도 없이 이러는 건 분노를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나는 진짜 나쁜 년이었다. 더 이상 만날 생각도 없었으면서 능숙하게 네 탓 시전을 했다. 그는 당황했다. 이게 화낼인가 의아했음이 분명한데 먼저 사과했다. 이해하려고 노력도 했다. 그리고 자신을 탓했다.


'하- 돌아보니, 나 완전 쓰레기였어.'


편지에 담긴 빼곡한 진심에 뒤늦은 현타가 밀려왔다. 세상에 손 좀 잡는다고 닳는 것도 아니고... 분위기 좋아서 슬쩍 잡아본 걸로 엄청난 무논리로 몰아붙인 꼴이 환장스러웠다.


'미친것. 그러는 니 얼굴은 개연성 있냐?'


그랬다. 그 생각을 미처 못했다. 내 얼굴의 개연성을 따지지 않았다니...


'결과를 생각하면서 하는 일이 어디 있어요?'


내 말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나름의 변명을 편지 여러 장을 할애해 사과했다. 무슨 말을 했던 거니... 맥락을 알 수가 없었다. 하긴, 그런 게 있었겠나 싶기도 했다. 그냥 아무 말이나 지껄였는데 한 마디 한 마디가 비수가 되었던 걸까.


이 편지를 받았을 당시에도 나는 꽤 양심의 가책을 느낀 모양이었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그가 진국임을 알았던 게 틀림없다. 그러니 편지를 지금까지 남겨 두지 않았을까? 진심을 아무렇게나 던져버릴 만큼 쓰레기는 아니고 분리수거는 가능한 정도였던 걸까.


뒤늦게 발견한 편지에서 설렘을 느꼈다. 여전히 심장 박동이 빨라지지는 않았지만, 그 봄 나는 누군가에게 이토록 절실한 존재였구나. 여전히 얼굴에서 개연성을 찾는 개연성 없는 단호박이구나.


다시 십 년이 흘러 이 편지를 읽는다면 어떤 감상을 하게 될까. 이 사람은 죽지 않을 기억을 남긴 채 내 이야기의 한 컷이 되었다. 진심은 통한다던 그의 마지막 문장이 진짜가 되었다. 이렇게 진심이 통했다. 그의 마음이.

그때는 미안했습니다.



PS. 같은 설정을 두고 이야기에 변주는 두는 방식으로, [설렘, 애틋, 블랙코미디.]라는 키워드와 각자의 시선을 생각하면서 써봤어요. 키워드에 딱 들어맞았는지 모르겠지만 재미있어서 혼자서 만족해 봅니다.

오래된 편지를 이렇게 끝.



#소설 #단편소설 #에세이 같은 소설 #반성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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