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신세계

올더스 헉슬리 지음, 안정효 옮김 - 소담 출판사.

by 하이진

책을 덮자마자 머리가 지끈거린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누구의 이름부터 꺼내야 할지 막막했다. 고전은 매번 마음과 생각을 격렬하게 흔들어 놓는다.

책 한 권을 읽으며 이토록 많은 에너지를 쏟아야 한다니, 진이 다 빠지는 기분이다.


특히 마지막 장면의 묘사는 인상적이었다.


[아치형 복도의 바로 밑에 매달린 한 쌍의 발이 눈에 띄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두 발은 전혀 서두르지 않고
북쪽, 북동쪽, 동쪽, 남동쪽, 남쪽, 남남서쪽을 가리켰다.]


누구의 발인지는 밝히지 않겠지만, 문장 한 땀 한 땀을 다시 읽어야 했다.

바람에 몸을 맡긴 채 소리 없이 흔들리는 처마 끝의 풍경처럼,

방향을 바꾸며 매달려 있는 두 발이 고요해 보여 오히려 마음이 잠잠해졌다.


‘이렇게 끝날 수도 있구나.’


사실 책을 읽기 전엔 나름의 기대가 있었다.

조지 오웰의 [1984]와는 어떻게 다른 디스토피아일까?

고통이 없는 완전한 천국은 어떻게 유지될까?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배고픈 소크라테스보다 배부른 돼지를 지향하는 편이다.

그래서 최하층 계급인 ‘앱실론’이라 할지라도

부당함을 느끼지 못한 채 만족하며 사는 편이 더 속 편하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책을 통해 확인한 것은,

문명사회든 야만사회든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서글픈 진실이었다.

자신의 위치를 망각하는 것은 곧 질서를 파괴하는 행동이었고,

그 질서에 도전하는 이들은 배척당한 자들이었다.

(애초에 모두 포용할 수는 없는 걸까.)


버나드와 존이 그랬다.

하지만 그들이 위대했느냐고 묻는다면, 아니다.

그들은 그저 불행했을 뿐이다.

버나드는 자격지심 때문에, 존은 어설픈 지성 때문에 스스로를 망쳤다.


그렇다면 존은 과연 고결했는가?


델타들 앞에서


“여러분은 노예로 살아가는 것이 좋습니까?”


라고 외칠 때,
그가 예수님의 길을 가려는 것일까, 잠시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성자가 아닌, 선민의식에 찌든 독선적 지식인에 불과했다.

자신이 세운 환상의 틀에서 한 걸음도 나오지 못한 채,

타인을 계몽의 대상으로만 보았지 소통의 대상으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시스템에 순응하며 살아온 레니나가 더 인간적으로 느껴졌다.

이해할 수 없는 상대에게 먼저 손을 내밀고,

거부당해도 다시 한번 다정함을 보여주는 그녀가 독선적인 존보다 훨씬 고귀해 보였다.

존에게 필요했던 건 셰익스피어의 문장이 아니라,

타인의 삶을 있는 그대로 껴안을 수 있는 유연함과 다정함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등장인물 중 가장 좋아했던 사람은 헬름홀츠 왓슨이었다.

그는 버나드의 찌질함이나 존의 광기와는 결이 다른, 진짜 ‘멋진’ 지성인이었다.

무스타파 몬드의 말대로라면 그는 이제 개성이 강한 사람들이 모인 ‘섬’으로 가게 될 것이다.

그는 그곳에서 원하는 만큼 사유하고, 마침내 스스로 만족할 만한 진짜 글을 쓰고 있을까?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처럼 허망하게 끝나는 삶이 아니라,

헬름홀츠처럼 담백하게 자신의 유배지를 선택할 수 있는 단단함을 갖고 싶다.

소마(Soma)에 중독되지는 않았지만, 쇼츠(Shorts)에는 중독된 나부터 계몽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어설픈 지성은 나를 망칠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그 안락한 사육장을 떠나 스스로 ‘섬’으로 향할 용기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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