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승사자의 여식

배신자가 새긴 운명

by 하이진

비는 그리움이 되어 고요히 내렸다.
빗물 속에 녹아든 기억의 파편들이 여자의 마음을 울적하게 적셨다.
그녀는 이미 ‘배신자’였다.


피가 튀고, 전우들의 살점이 뜯겨 나가며 짐승 같은 비명이 사방에서 터져 나오던 그날.
그들은 아름다운 괴물이었고, 인간의 마음을 간단히 뒤흔들어 놓았다.
그래서 스스로 목을 내미는 자들까지 있었다.
그녀는 그것이 사특한 주술 때문이라 믿었다.
어쩌면 실제로 그랬을지도 몰랐다.


“그들과 오롯이 눈을 마주해서는 아니 된다. 그들의 눈은 사람을 홀린다.”


아버지가 늘 하던 말이었다.
하지만 그자와 검을 맞대는 순간, 오색으로 반짝이는 눈동자에 사로잡혔다.

그자는 힘들이는 기색조차 없었다.
시종일관 여유로웠고, 마치 그녀를 희롱하듯 검을 받아냈다.
분했지만, 원통했지만—
검을 부딪치는 순간을 끝내고 싶지 않았다.


“어떤가? 주술의 힘이 느껴지나?”


여자는 그제야 검을 쳐내며 물러섰다.
대답할 수 없었다.
독처럼 달콤한 감정이 가슴 깊이 스며들고 있었다.
그자는 미소를 지었다.


“저승사자라 불리는 자의 여식도 별수 없구나.
하지만 우리는 인간을 홀릴 만큼 약하지 않지.
그런 비열한 수법은 나약한 자들의 것이 아니던가?
그런 면에서… 너는 나를 사로잡는구나.
순간의 유희일지라도.”


“닥쳐.”


“보내주지. 돌아가라. 너의 동료들과.”


그 순간, 그자는 바람처럼 사라졌다.
괴물들의 기척도 순식간에 거두어졌다.
여자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빗물이 기억을 녹이며 마음 깊은 곳에 파문을 일으켰다.
그리움이었다.
그녀는 오색빛 눈동자에 사로잡힌 것이 틀림없었다.


“너를 한숨짓게 하는 것이 누구지?”


그 목소리는 인간의 울림이 아니었다.
음색마저 사람을 홀리는 음계 같았다.


“그리웠다.
그래서 이렇게 스스로 저승사자의 소굴로 들어온 것 아니냐?”


그의 얼굴에 웃음이 스쳤다.
여자의 마음이 울렁거렸다.
사로잡힌 자는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검을 뽑지 않고 가까이 가고 싶은데… 허락하겠느냐?”


곁을 청하는 말이었지만, 그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인간처럼 천천히 걸어와 그녀 앞에 섰다.

그것이 기다림인 것처럼.


여자의 손이 먼저 뻗어 나왔고, 그는 기꺼이 그녀를 안았다.

밤은 길었고, 속삭임은 더 깊었다.
달콤한 말들이 평범한 연인들처럼 흘러나왔다.
그 밤은 배신자의 이름을 지웠고, 한 아이의 운명에 새겨졌다.


깊은 새벽, 이강은 침대에서 눈을 떴다.
무엇을 알려주려는 것인가.
세인을 만난 후로 타인의 기억이 파편처럼 꿈에 떠올랐다.
마치 그의 붓질에서 되살아나는 고화처럼 조각들이 선명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희뿌연 안갯속에 가려진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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