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봉 협상의 종은 내가 친다
"또 동결이야?"
"몰라.. HQ (Headquarters) 탑다운으로 내려온 결정이래."
2019년 말 COVID-19의 등장으로 온 세상이 혼란에 휩싸였다. 하루가 멀다 하고 늘어가는 사망자에 인류의 역사가 여기서 끝나는 건가.. 싶었다. 정말 지구가 멸망하는 줄 알았다. 망상과도 같아 보이는 이 두려움을 느낀 건 나 혼자가 아니라는 듯 정부에서는 집합 금지 명령을 내렸고, 본사에서도 서둘러 비상 경영 방침을 안내했다. 모든 오프라인 활동 잠정 중단과 전원 재택근무를 지시하였고 몇몇 공장은 문을 닫았다. 전 세계 매출은 급락했고 연봉은 2년 동안 동결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누구인가. 의지의 한국인 아닐쏘냐. 이 대혼란 속에서도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다. 오프라인이 안되면 온라인으로, A 라인 생산이 안되면 B 라인으로. 노력이 가상했는지 한국은 전 세계 마이너스 매출 사이 당당히 플러스 매출, 그것도 역대 최대 매출을 찍어버렸다. 이렇게 2년간의 연봉 동결은 모두의 노력으로 끝이 났다.
"띠리링" <연말 평가 면담 안내의 건> 메일 도착 팝업이 떴다.
드디어 왔구나! 모두가 기다렸던 연봉 협상 면담이었을 테지만 이번 연봉 협상은 나에게 의미가 남달랐다. 우선, 말이 '협상'이지 사실은 '통보'인 이 연봉 협상 면담까지의 과정은 이렇다. (내가 근무한 외국계 회사 기준이며, 회사마다 프로세스는 조금씩 상이하다.) 본사에서 올해 한국 전체 연봉 버짓은 이만큼! 하고 예산을 할당해 주면 각 사업부로 그리고 각 팀으로 예산이 분배되고 팀장은 그 예산을 팀원들에게 재분배한다. 이때 팀장들은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된다. 이성적인 평가 기준은 있지만 0.1점 정도에는 평가자의 감정이 반영되기 때문이다. 그 미세한 차이를 굳이 만들어 점수를 매기고 순서를 정한다. 그리고 연봉 인상률 00%, 정성스럽게 letter를 만들어 협상 면담을 가장하여 통보한다. 만약 연봉 협상 면담에서 팀장이 내 눈을 보지 않는다? 이번 연봉 인상률은 귀엽다는 뜻이다.
내가 이 메일을 받기까지 얼마나 많은 피 튀기는 예산 확보 전쟁이 있었을까. 얼마나 많은 고민이 있었을까. 급 숙연해지며 주는 대로 받아야지 하다가도 이내 고개를 흔들어버린다.
"서린 과장 미안해. 이번에는 양보 좀 하자. A 과장이 얼마 전에 따로 찾아와 자기 너무 힘들다고 하더라고. 알잖아 외벌이인 거. 애가 셋이야."
"우리 팀 막내 B 사원 있지. 서린 과장 들어오던 해 진급 예정이었는데, 서린 과장 들어오면서 진급을 못했어. 이번에는 만년 B 사원 대리 진급 좀 시켜주자."
이놈의 팀장은 나를 너무 잘 안다. 강강 약약인 나를 귀신같이 파악하고 그 큰 덩치를 최대한 작게 만들며 감성팔이를 시작한다. 전투력 풀 충전해서 결연한 표정으로 회의실 문을 열지만 이내 "알겠어요. 그럼 다음에는 꼭 챙겨주세요." 전투력을 상실한 채 문을 닫고 나온다. 마음이 약해져 버린 스스로를 책망하며 다시 다짐한다. 다음 연봉 협상에서는 절대 양보란 없다. 내 이번에는 마지막까지 남아 꼭 골든벨을 치리라. 그 옛날, 도전! 골든벨의 명예로운 생존자가 받은 장학금처럼 원하는 연봉 인상률을 얻어내고야 말겠다.
그렇게 내 면담 차례가 돌아왔다. 기대 반, 걱정 반. 조심스레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우리 팀장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반기는 게 아닌가. 어라, 그 큰 몸집을 작게 만들지도 않네?
"앉아 앉아. 많이 바쁘지? 얼마 전 그 프로젝트 잘 맡아준 덕분에 영업에서 피드백이 좋아. 내가 이번에는 신경 좀 썼어."라며 자신 있게 연봉 협상 letter를 쓱 건넸다. 이 봉투를 받을 때마다 기분이 묘하다. 꼭 뇌물수수하는 것 같단 말이지.. "지금 열어봐도 괜찮죠?"라고 묻고 그 자리에서 봉투를 열어 본다. 당신의 노고에 감사하다는 정성스러운 글자들 사이 볼드체로 적힌 인상률 00%. 신경 써 주심에 감사하지만 내가 생각했던 숫자와는 차이가 컸다. 인상률에 대한 근거 이유를 묻고 내가 준비한 자료를 펼쳤다. 전쟁터에 나갈 땐 나를 지켜줄 무기는 필참이다. 설령 그게 나뭇조각일지언정.
"팀장님, 올해 제가 진행한 프로젝트 리스트입니다. 작년 대비 00% 더 많은 프로젝트를 진행했고 COVID-19 영향으로 추가 업무도 있었지요. 무엇보다 결과가 제일 중요하겠죠? 각 프로젝트별 성과에 대해서도 설명드리겠습니다."
"올해 매출 00원, 영업 이익 00원입니다. 영업팀이 고생해서 만들어낸 숫자이지만 제가 담당한 프로젝트와 영업팀 매출은 00로 연계되어 있고 이 숫자에 저의 기여도는 00라고 생각합니다. 올해 연봉 인상률 00%로 재고 부탁드립니다."
예상했던 리액션이 아니라 실망스러웠겠지만 그는 나의 주장을 받아들였고, HR 및 사장님과의 논의 끝에 수정된 연봉 협상 letter를 받을 수 있었다. 이번엔 내가 골든벨을 울렸다.
결국 일도 사람이 하는 것이라 매번 나의 것만 챙길 수는 없다. 때로는 내어줄 수도 있어야 하고 양보도 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꼭 필요할 때에는 나의 것을 요구할 줄도 알아야 한다. 내가 나를 대변하지 않으면 누가 나를 위해 대신 목소리를 내어주겠는가. 단, 모두가 수긍할 수 있는 방식과 기준으로 말이다.
참, 연봉 협상에는 만약을 대비한 약간의 룸이 항상 있다. 그러니 너무 쫄지 말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