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리 길을 달려온 '외계인 할아버지'의 프러포즈

부모도 아들도 손자도 기다려주지 않는다.

by 정글


10개월 된 손녀 앞에서 재롱을 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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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꼬리를 최대한 볼 위쪽으로 째고, 표정은 세상에서 가장 온화하고 착한 모습으로, 양손을 볼에 대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손가락을 폈다 접었다 반복했다. 우르르 까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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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만하면 웃어줄 만도 한데, 손녀는 나를 뚫어지게 쳐다본다. 손녀에게 나는 처음 보는 외계인임에 틀림없다. 나를 지구인으로 인정하고 살짝 웃어 주기까지 반나절의 시간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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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네 집이 충남 서산에 있다. 부산에서 가려면 큰 맘먹고 가야 한다. 왕복 하루가 걸리는 천리 길이다. 100일 때 보고 손녀를 처음 본다. 무심한 할 비 할미다.


출발할 때 서산지역 기후를 검색했다. 눈이 온단다. 눈을 본다는 생각에 마음이 설렜다. 출발할 때 부산 기온은 10도였다. 충남 서산으로 가는 고속도로. 서산 쪽으로 가면 갈수록 차량 계기판 기온이 8도, 7도, 6도…, 서산에 도착하니 영하 2도였다. 산기슭과 논밭에는 눈이 쌓여있었다. 손녀 손자 얼굴이 아른거린다. 액셀러레이터를 힘주어 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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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집 아파트 주차장. 아들이 마중 나와있었다. 손자를 데리러 어린이집으로 함께 갔다. 어린이집 앞 주차장. 차 지붕과 본네트(보닛)에 눈이 쌓여있었다. 보닛 위에 쌓여있는 눈이 캔버스 같았다. 나도 모르게 손가락으로 보닛 위에 내 이름을 썼다. 위 쪽에 하트 표시도.


그런 나를 아들이 보고 기겁한다. 남의 차에 그러면 안 된다고. 나는 아들 나무람에 얼른 이름을 지웠지만 보닛 캠퍼스(?)가 엉망이 되어버렸다. 나는 어느새 죄인이 된 기분이 들면서도, 곧 녹을 건데라는 무슨 잘못인가 라는 생각도 들었다.


2박 3일 동안. 손녀, 손자 가슴에 할비 할미와 함께 했던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어야겠다고. 아름다운 추억을 함께 해야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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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100일이었는데 손녀가 훌쩍 컸다. 벽을 잡고 걷다가 넘어지고 네발로 빨리 기어 다닌다. 나도 그 뒤를 따라 졸래 졸래 네발로 기어간다. 무릎으로 방청소를 하고, 이마에 땀이 난다. 무릎이 얼럴럴하다. 팔뚝에 알통이 배긴다. 나를 보고 환하게 웃는 손녀 얼굴에 모든 근심이 날아간다.


우리가 함께 보낸 이 시간들이 손녀 손자 몸속에 차곡차곡 쌓여, 세상을 바라보는 따뜻한 눈빛이 되고, 다정한 마음과 공감으로 채워지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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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리 길을 달려가 손녀와 눈높이를 맞추며 네 발로 기었던 이 시간이, 아이에게는 평생을 살아갈 힘이 되는 '사랑의 근육'이 되길! 행복이 되길! 기도한다.


술에 찌들어 밤늦게 집으로 갔다. 주말 휴일이면 들로 산으로 동료들과 쏘다녔다. 아들이 크는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아들만 보면 마음 한켠이 먹먹하고 아프다. 그 아들이 결혼을 하고 손자 손녀를 키우고 있다. 아들도 손자 손녀도 부모도 기다려주지 않는다.


함께 웃고 울고 상처 주고 상처받는 그 시간이 행복이라는 걸 환갑이 지나서야 조금 알 것 같다. 난 환갑이 지나서도 아직 철이 덜 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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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손자 손녀에게 또 나는 재롱을 부린다. "우르르~ 깍꿍!, 깍꿍!"


그런 내 모습을 보고 빙그레 웃는 아들이 보인다. 40대가 다 되어가는 아들. 얼굴에 잔주름과 수염이 오늘 아침 더 짙게 보인다.


오늘도 최고로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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