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칠곡 가시들>을 보고
무사히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
“
무사히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
죽임당하지 않고 죽이지도 않고서
굶어죽지도 굶기지도 않으며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
정혜영, <무사히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 中
현 정의당, 장혜영 의원의 <무사히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 속 노랫말이다. 한 살 어린 발달장애의 동생 혜정과 살아가는 혜영의 소원은 그저 무사히 그와 함께 나이 들어가는 것이다.
할머니가 된다는 것.
죽임당하지 않고 죽이지도 않고서 굶어죽지도 굶기지도 않으며,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야지만 가능한 것. 할머니가 된다는 것은 그렇게-
무사히. 무사해야만. 무사하게 될 수 있는 것이다.
살아내다. 나이 들어가는 것은 결국 살아내는 일일 터이다. 인간의 생애는 곧 생존이다.
경상북도 칠곡군의 일곱 명의 소녀들은 그렇게 살아내었고, 무사히. 아주 무사히도 할머니가 되었다.
치열한 생존이 끝나간다. 키워낸 자식들은 장성해 이미 집을 떠났고, 이제 남은 것은 자글자글한 주름이고, 굽은 허리이며, 뻣뻣한 다리이다.
늙은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강금연 할머니는 그 남편의 제사상을 가만히 바라보며, 홀로 앉아 자식의 절을 받는다. 떠나보내며, 결국엔 떠나는 일. 할머니가 된다는 것은 아마 그런 것일 터이다.
표현 범람의 시대
어쩌면 나는 표현 범람의 시대 속에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모든 것이 참 쉽고 편안한 세상이다. 손가락 몇 번 움직여 당장의 이 내 사연을, 감정을, 농담을 공유의 장場에 흩뿌릴 수가 있다. 현 시대에는 수많은 표현들이 오고 가고, 범람한다. 그렇기에 나는, 우리는 칠곡의 일곱 노인과는 다르다.
그들은 구순에 이르러서야 표현을 시작해 보려한다. 평생을 못 배운 글자를 읽고 쓰고, 거기에 마음을 눌러 담아 시로 만든다. 그들의 표현은 그렇게 억겁의 시간을 통해 비로소 완성된다.
강금연 할머니는 시를 적는다. 뭉뚝한 연필로 두터운 도화지 위에 한 자 한 자 ‘아들아-’를 눌러 쓰고는, 고운 색을 골라 작게 그림도 그리고, 그것을 반듯하게 접어낸다.
할머니의 시는 그렇게 우체국으로 향한다. 그리고 그것은 곧 편지가 된다.
그들에게 있어 시는 편지이자, 온 마음이다. 그 마음을 표현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흘렀고, 많은 과정이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수많은 표현들이 범람한다. 경상북도의 작은 시골마을에서 보내온 그 시는 느리지만, 분명 더 많은 마음들이 담겨있다.
가수, 곽두조
<가수> 등개댁 곽두조
어를 때 가수해씃마 조아쓸글 (어릴 때 가수했으면 좋았을걸)
노래 부르기를 좋아한다던 곽두조 할머니의 짧은 시조다.
무슨 말을 덧붙이랴.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곽두조 할머니는 가수가 되고 싶었단다. 하지만 그러질 못했고, 그래서 늙은 몸을 하고 경로당에서 한 곡조 시원하게 뽑아본다. 그녀의 쩌렁쩌렁한 음성을 듣고, 나 역시 생각했다. 곽두조 할머니가 어릴 때 가수했으면 좋았을 걸 하고-
말이다.
곽두조의 친구들
연대라는 것은 실로 어렵다. PC주의, 즉 그들 각자만의 정치적 올바름이 만연한 이 현대의 사회에서 ‘연대하기’란 그 자체로 양날의 검이 되어버렸다.
연대는 ‘강세’가 되며 때론 ‘폭력’이기 되기도 하니까 말이다. 다시 말해-
‘진짜’ 연대라는 것은 정말로 어려워졌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 모순적이게도, 퇴보, 퇴화의 지표와도 같은 칠곡의 일곱 노인들을 통해 ‘진짜’ 연대를 엿볼 수 있게 된다.
어릴 적 가수의 꿈을 꾸던 곽두조 할머니는 경로당 마룻바닥보다 더 큰 무대를 꿈꿔본다.
바로 노래자랑에 나가는 것.
할머니는 자신의 나이든 친구들과 함께 당당히. 그야말로 위풍당당한 자태로, 노래자랑 무대로 향한다. 그들의 꼿꼿한 행보는 어느 느아루 영화 속 건달 패거리의 모습과 겹쳐 보이기도 한다.
쟁쟁한 참가자들이 참 많기도 많다. 배를 통통 튀기는 (비교적) 어린 중년의 남자와 팔에 붕대를 감고 열창을 하는 (아직은) 어린 노년의 여자... 그럼에도 곽두조 할머니는 친구들의 응원에 힘입어 <동백 아가씨>를 열창해본다.
노래자랑이 끝이 났다. 곽두조 할머니는 경연에서 떨어졌다. 아직, 비교적 젊은 참가자들은 잘도 올라가는데. 서운하기도 서운하다.
할머니는 다시 나이든 친구들과 함께 동네로 돌아간다. 가는 길이 되고 멀어, 잠시 그늘 막에 앉아 쉬기도, 요구르트를 나눠 마시기도 한다.
그녀의 늙은 친구들은 그녀의 허리에 손을 얹고 나지막이 말한다.
“내한테는 형님이 일등이다”
함께하기. 이것이 바로 연대이다. 같은 시간을 지나 같이 낡아버린 몸을 하고, 친구의 도전을 함께하는 것. 나아가 덤덤히 위로하는 것.
온 진심을 다해 함께 하기. 그것이 바로 ‘진짜’ 연대의 의미일 것이다.
칠곡의 가시나들
돌고 돌아, 결국엔.
서울 근교에 살아가는 어린 나이의 나와 구순을 바라보는 칠곡의 일곱 노인들은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것.
그것이 바로 <칠곡 가시나들>, 나아가 세상의 노인들에 관한 (거의) 완전한 통념인 셈이다.
나는 아직 사랑이 부끄러워 때때로 그것을 숨기기도 한다. 칠곡의 박원선 할머니 역시. 아직도, 여전히. 먼 옛날의 사랑이 부끄러워 그 시를 읊으며 수줍은 얼굴을 하고 있다.
나는, 그 노인들은 아직 ‘가시나들’인가보다.
놀기 좋아하며, 못 이룬 꿈을 꾸고, 여전히 엄마를 그리워하는.
칠곡의 일곱 소녀들은 그렇게 무사히 할머니가 되었고, 또한 여전히 가시나들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