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mm0BzS2o28c
2020. 2. 20. 과테말라 안티구아
멕시코 산크리스토발에서 미니 벤을 타고 국경을 넘어 어렵게 안티구아 마을에 닿았다.
생뚱맞게 과테말라에 오게 된 이유는 나의 갑작스러운 변덕 때문이었다.
과테말라에 얼마 전 폭발한 화산이 있다는 얘기를 몇 주전에 우연히 듣고 당시에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었는데, 어느 날 잠에서 깨자마자 뭔가 계시를 받은 사람처럼 "과테말라에 화산을 보러 가야겠다."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같이 여행을 계획한 동행들을 어르고 달래서(사실 일방적으로 우겼지만) 목적지를 변경했다.
안티구아 마을에서 보이는 푸에고 화산은 2018년 6월에 마지막으로 크게 분화했다.
당시 하늘을 뚫을 듯한 폭발과 뜨거운 마그마가 인근 마을을 덮쳐, 100명이 넘게 사망하고 300명 넘게 실종되는 처참한 인명피해를 낳았다.
아이러니하게 아직 완전히 식지 않은 화산은 매년 수 천 명의 관광객을 불러들이고 있다.
나는 원래 알고 지내던 친구들 셋 과 함께 투어에 참가하게 되었는데, 남미사랑 채팅방에서 한국인 동행 두 분을 더 만나 한국인만 총 6명이 되었다.
덕분에 좀 더 싼 가격에 흥정을 하여 장비와 두 끼 식사가 포함된 1박 2일 투어를 150께찰(약 삼만 원) 정도의 저렴한 가격에 협상할 수 있었다.
(바르코 투어사, 아케테낭고 화산 1박 2일 캠핑, 정가: 인 당 300께찰)
조금 더 설명하자면, 화산 투어는 보통 푸에고 화산을 당일로 다녀오는 코스와 아케테낭고 화산을 1박 2일로 다녀오는 코스로 나뉜다.
푸에고 트레킹은 당일 치기로 진행되기에 시간이 없는 여행객이 주로 선택을 했고, 그 맞은편에 있는 아케테낭고 화산에서 1박을 하며 푸에고를 조금 멀리서 구경하는 것이 아케테낭고 트레킹이었다.
결국 둘 다 푸에고 화산을 보는 건데 가까이에서 보냐, 멀리서 보냐 차이였다.
우리는 밤 새 뜨거운 입김을 내뿜는 화산을 구경하며 캠프파이어를 할 수 있겠다는 기대감에 아케테낭고 투어를 신청했다.
산은 초입부터 무시무시한 경사를 과시하며 우리를 주눅 들게 했다.
남자 세 명이 배낭 두 개를 번갈아 매기로 했는데, 생각보다 배낭은 무겁고 체력은 가벼웠기에 20분도 넘기지 못하고 배낭은 주인을 달리했다.
휴식을 자주 취했음에도 체력이 쉬이 회복되지 않았다.
오르고 내림을 반복하는 것이 자연의 섭리일텐데, 어찌 된 일인지 끝도 없이 오르막길이 나타났다.
화산재로 인한 모래 먼지로 입안이 텁텁해서 산속에 있음에도 숨쉬기가 개운치 않았다.
게다가 고산 지대인 까닭에 동생들은 두통을 호소했다.
"힘내 할 수 있어" 열정의 단계와 "도저히 할 수 없어" 체념의 국면을 지나 무아의 영역에 이를 때쯤, 이따금 휴식이 주어졌다.
오전 11시 45분에 출발하여 아케테낭고 베이스캠프에 도착하니 오후 5시 30분쯤 되었다.
베이스캠프는 구름보다 높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고요한 세상에 푸에고 화산이 우레 같은 소리를 내며 허연 연기를 내뱉었다.
"오길 정말 잘했구나"
생전 처음 만난 독특한 풍경이 굉장히 신비롭고 아름다웠다.
사진을 찍으며 까불다 텐트 안에서 녹초가 된 몸을 쉬이고 있었는데 BK형님이 "푸에고에 같이 안 갈래요?"라고 물었다.
세 명 이상 모집되어야 가이드가 출발해 주겠다고 하여 동행을 찾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BK형님이 푸에고까지 같이 가자고 제안한 건 출발하기 하루 전날부터였다.
나는 별생각 없이 "그렇게 하시죠."라고 대답했었는데, 등산을 시작하자마자 그것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제안이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당연히 그도 나처럼 포기했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정말 집념이 대단한 남자였다.
우리는 텐트 안에 머쓱하게 몸을 뉜 채 "너무 힘들어서 가지 못하어요."라고 거의 울듯이 대답했다.
시간은 흘러 어스름이 내려앉았을 무렵까지 형님은 동행을 구하러 다녔다.
푸에고 화산을 보는 것이 자신의 소원이며, 가는 길이 별로 힘들지 않을 거라며 우리를 설득했다.
심지어 혼자 3명 분의 돈을 낼 테니 제발 가달라며 가이드에게 사정까지 하셨다.
미안한 마음에 결국 따라나서기로 했다.
"뭐 별일 있겠어?"
우리는 불과 삼십 분 전의 고통을 완전히 망각했고, 지친 몸이 보내는 경고를 무시하며 근거없이 낙관했다.
푸에고 화산은 몇 걸음에 닿을 수 있을 듯 가까워 보였다.
우리는 그 흔한 헤드 랜턴, 심지어 물 병 하나 없이 동네 산책 가듯 길을 나섰다.
한 걸음 내 디딜 때마다, 식어버린 화산재에 발목이 깊게 빠져들었다.
"정말 큰일 났구나."
정신이 번쩍 들었다.
경사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가팔랐고 어둠은 이미 눈앞에 와있었다.
푸에고 초입에 들어서기도 전에 하산 중인 사람들의 헤드라이트가 산등성이에 넘실거렸다.
어차피 이제 와서 돌아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허벅지에서 시작한 근육 경련이 발가락까지 번졌다.
의미를 가지지 못한 단어들이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겨우 목적지에 닿았음에도 되돌아가야 할 생각에 웃을 수 없었다.
"푸에고!"
가이드가 소리쳤다.
고개를 돌려 푸에고 산을 올려다 보았다.
검은 산이 악마 같은 화염을 뿜어내고 있었다.
바람은 날뛰며 모든 소리를 앗아갔다. 동생들은 아에 등을 돌리고 고개를 바짝 숙인 채 세찬 바람을 외면하고 있었다.
입 안에서 모래 알갱이가 씹혔다.
이 암흑에 우리밖에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크게 두려운 마음이 일었다.
우리는 휴대폰 플래시 불빛에 의지한 채, 한 걸음씩 조심히 하산했다.
나는 그마저도 없었기에 앞사람에게 꼬옥 붙어 희미한 불빛을 함께 좇았다.
한 발짝만 잘못 디뎌도 크게 다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극도의 긴장감으로 심장이 요동쳤다.
내 안의 모든 감각이 살아나 날카롭게 꿈틀거렸다.
역설적이게도, 보이는 것이 없자 이 상황이 전혀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아 오히려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에스페레"(잠깐 멈춰요)
"운 모멘또"(잠시만)
나는 가쁘게 숨을 헐떡이며 자꾸 제자리에 멈춰 섰고, 가이드의 랜턴 빛은 더 이상 나에게 닿지 않았다.
어딘지도 모를 산 중턱에 누워 밤 하늘의 별을 바라보았다.
나는 알프스 산맥을 넘는 나폴레옹의 졸병들을 떠올렸다.
"그냥 여기서 잘까?"
나를 찾는 동생들의 부름에도 한참동안 일어날 수 없었다.
밤 열시가 넘어서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
사람들은 이미 잠을 청하러 텐트로 돌아갔고, 피우다 남은 모닥불만이 바람에 쓸쓸히 휘청거리고 있었다.
맥주가 너무 마시고 싶어 자고 있던 동행 한 명을 깨워 가져다 달라 부탁했다.
맥주는 식어 차가웠고, 머리가 조금 아팠다.
매서운 모닥불 연기에 눈물 흘리며 불은 스파게티와 소세지를 구워먹었다.
"그래도 살아있으니 이런 날이 오네."
우리는 방금 전까지 '죽을 만큼 힘들어' 했던 우리를 또다시 망각한 채, 시시껄렁한 농담 따위에 히히덕 거리며 모닥불 앞에서 몸을 녹였다.
밤새 바람이 매섭게 텐트를 흔들어대었다.
잠을 잘 수 있을까? 걱정하다 눈을 깜빡였는데 벌써 아침이었다.
구름보다 높은 하늘에서 맞이하는 아침이 매우 상쾌했다.
천둥이 치는 듯한 소리가 하늘을 덮었다.
고개를 돌려 먼 산을 바라보니, 푸에고가 아직도 차가운 입김을 하늘에 토해내고 있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