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은 내 가슴에

특별한 하루의 기억

by 하이빈

삶이란 감동, 따스함, 벅참, 쓸쓸함, 무덤덤함, 비참함 등 다양한 기억의 합이다. 우리는 그 기억들의 합 속에서 추억을 꺼내어 먹고 산다.


12월의 추운 날이었다. 아이들은 5살, 7살 한참 엄마를 졸졸 따라다니며 세상을 배우는 나이었다. 오전에 미뤄둔 빨래를 늦은 오후에서야 돌리고 세탁이 끝난 빨랫감을 안방 베란다에서 널고 있었다.

둘째가 빨래를 널고 있는 엄마를 따라 안방 베란다로 쫓아 들어와 미처 정리하지 않고 놓아둔 볼풀 공을 만지작거리며 엄마의 일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거실에서 놀던 첫째가 엄마와 동생이 안방 베란다에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첫째는 베란다로 들어오기 전 손잡이를 몇 번 밀어보고, 아이의 시선에 들어오는 동그란 잠금장치를 호기롭게 몇 번 만지고서야 비좁은 안방 베란다로 들어왔다.


좁은 공간에 세 명이 들어서니 추웠던 공간에 온기가 생겼다. 빨래를 모두 널고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 문을 밀었다. 이상하다. 문이 열리지 않는다. 첫째가 손잡이 잠금장치를 돌리더니 문이 잠긴 채로 베란다로 들어왔나 보다. 괜찮다. 안방 창문이 있다! 창문을 밀어보았다. 그러나 꿈적도 하지 않는다. 아뿔싸! 며칠 전 아이들이 창문을 열어서 장난을 치기에 창문을 잠가 놓았던 것이 기억이 났다. 설마 시트콤에서나 나올 일이 내게 일어날 줄이야!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관리실에라도 연락을 해야겠다. 핸드폰을 찾았다. 이.럴.수.가 핸드폰마저 거실에 있다.

갇혔다! 아이들이 꼼꼼히 엄마의 표정을 살피는 것이 느껴졌다. 아이들이 당황해서 놀라지 않도록 마음을 가다듬고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냉정하게 생각해봤다. 딱히 떠오르는 방법은 없었다.


“도와주세요! 우리가 갇혔어요.” 아이들과 나는 창밖으로 소리를 꽥 꽥 질렀다.

오후 4시쯤이나 되었을 것이다. 영어 학원 차량들이 부지런히 돌아다니고, 학원 셔틀을 기다리는 아이들과 부모님들이 보였지만 그들에게는 우리의 목소리가 들리지도 않는 것 같다. 혹시나 윗집과 아랫집에 들릴까 하는 희망을 품었지만 겨울이라 창문을 꽁꽁 닫고 생활해서인지 우리의 재난을 아무도 모르는 것 같다.


남편이 올 때까지 버티자! 아차차! 오늘 동창회에 다녀오고 싶다는 어젯밤 남편의 말이 떠올랐다. “혹시 늦으면 본가에서 자고 올게.” 어쩌면 남편이 오늘 밤 오지 않을 수도 있다. 마지막 구조의 희망이 사라졌다.


최악의 상황 속에서는 오히려 차분해진다. 그나마 이사 오면서 안방 베란다에 장판을 깔자고 우겼는데 마치 이런 일이 생길 것을 알고 미리 대비책을 세운 것 같다. 12월의 추운 날이었지만 차가운 돌바닥의 냉기가 올라오진 않아 얼어 죽을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되니 걱정 하나를 덜었다.

예리한 눈초리로 좁은 베란다를 둘러보았다. 옷걸이만 눈에 띌 뿐이었다. 그마저도 너무 두껍고 문에 구멍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뾰족한 도구를 찾아서 문을 열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아무런 해결책을 찾지 못했다.


그냥 놀자! 나는 트니트니 선생님이 되었다. 베란다에 있는 볼풀 공을 가지고 아이들과 신나게 주고받기를 했다. 열심히 에너지를 불태웠더니 아이들이 지쳤는지 제자리에 앉았다.

바깥에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옛날 옛날에 엄마 어렸을 적에 엄마랑 외삼촌들이……."

아이들이 좋아하는 엄마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엄마 품에 앉아서 엄마의 옛날이야기를 듣던 둘째가 먼저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잠이 드는 아이가 신기하고 고마웠다.


시간은 대략 저녁 6~7시가 되어 가는 것 같다. 환했던 밖이 깜깜해지기 시작했다. 깨어있는 첫째와 바깥의 어둑한 풍경을 보면서 이야기를 나눴다. 추운 바깥 날씨와 베란다 안의 온기 탓인지 창문에 김이 서렸다. 별을 멋지게 그리지 못한다고 자주 속상해했던 첫째의 말이 생각이 나서 첫째와 호호 입김을 불어서 창문에 별을 그리기 시작했다.


컴컴한 어둠이 배경이 되어 세모 한 개, 또 거꾸로 세모 한 개를 그려서 별 모양을 쉽게 그리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아이의 별이 제법 모양을 갖췄다. 아이는 집중해서 별을 그리고 또 그렸다. 드디어 스스로 뿌듯한 별을 그릴 수 있게 되자 첫째도 내 품에 안겨서 잠이 들었다.


남산타워의 불빛이 또렷하게 보였다. 이제 학원 차량도 다니지 않는 것을 보니 9시쯤 되었을 것이다. 새근새근 자는 두 아이들을 내 품에 안으며 남편이 어서 집에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전화벨이 몇 번 울렸는데 남편이었을까? 베란다 문을 열고 나가면 이제부터 휴대폰을 꼭 몸에 지니고 다녀야지! 오늘 뜻하지 않게 집안일에서 해방이 되었네. 아이들이 다행히 낮잠을 자서 다행이다.’ 여러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스쳐 지나갔다.


그때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정적을 깼다. 드디어 남편이 들어왔다. 아빠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리자 잠에서 깬 아이들은 "아빠 우리 베란다에 갇혔어요! 얼른 문 열어주세요."라고 외쳤다. 영문을 모르는 남편은 안방 베란다 문을 열어주었고 눈물을 글썽이며 나오는 우리들을 보고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어리둥절했다.

아이들은 아빠를 따라다니며 오후의 모험을 들려주었고, 스케치북을 들고 와서 아빠에게 여러 개의 별들을 그려주었다. 한참을 재잘거리던 아이들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급작스러운 재난으로 배고픔을 잊고 있다가 이제야 긴장이 풀렸나 보다. 아빠가 끓여준 라면을 맛있게 다 먹고서야 특별하게 긴 하루의 끝을 마무리했다.



얼마 전 6월의 마지막 보름달인 ‘스트로베리 슈퍼 문(Strawberry Super Moon)’을 관찰하려고 아이들을 데리고 안방 베란다 쪽으로 향했다. (물론 핸드폰을 가지고 들어갔다) 어둠 속에서 붉은 달이 신비롭게 빛을 내고 있었다. 베란다에 쪼르르 앉아 있으니 아이들이 이구동성으로 “엄마 우리 여기 갇혀 있었지? 공놀이도 하고, 별도 그려보고 그날 재미있었어! 우리 가끔 여기에서 동화책 읽을까?”라고 씨익 웃으며 말했다.


나에게는 아찔하고 공포스러웠던 기억이었지만 아이에게는 서프라이즈한 이벤트로 남아있다니 다행이다. 부모는 자식에게 좋은 추억을 남겨줄 의무가 있다. 예상치 못했던 그날의 '베란다 사건'은 온 우주에서 하나밖에 없는 추억이 되어 내 아이들의 가슴속에서 아름답게 빛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