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바꼭질 : 보통의 인간에 대하여(4)

제4장. 사각지대의 악마

by 국회의원

제4장. 사각지대의 악마

우진은 대학교 2학년 과정을 마치자마자 마치 잘 짜인 공정 계획표를 이행하듯 군대에 자원입대했다. 평범한 청춘들에게 군대란 꿈과 성장이 멈춰버리는 정지 궤도이자, 강제로 탈취당한 공백의 시간이었다. 하지만 우진에게 군대는 그저 스물한 살의 건강한 대한민국 남성이라면 반드시 거쳐야 할 법적 의무이자, 다음 단계인 사회 진출로 나아가기 위해 제거해야 할 지루한 통과의례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 폐쇄적인 조직은 우진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흥미로운 실험실이었다. 수직적인 위계질서, 이성보다는 강제적 복종이 우선시되는 단순한 로직, 그리고 법의 감시가 닿지 않는 사각지대. 이곳은 우진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던 냉혹한 본능을 깨우기에 최적의 환경이었다.


자대 배치를 받은 지 채 24시간이 지나지 않은 다음 날 오후였다. 일병과 상병들의 눈치를 살피며 각 잡힌 자세로 대기하던 우진을 창고로 불러낸 것은 내무반의 절대 권력자로 군림하던 김이레 병장이었다.

창고 문을 여는 순간, 우진의 감각 기관은 일제히 불쾌한 신호를 내보냈다. 비 오는 날 훈련 후 대충 던져놓아 눅눅하게 젖은 판초 우의의 곰팡이 냄새, 오래된 걸레가 썩어가며 뿜어내는 쉰내, 그리고 먼지 쌓인 군용 보급품들이 뒤섞인 악취가 해일처럼 밀려왔다. 환기가 전혀 되지 않는, 좁고 어두운 공간 특유의 답답한 공기가 코 안쪽 점막에 끈적하게 들러붙었다.

“너, 생긴 거 보니까 밖에서 좀 놀다 온 것 같은데. 맞지?”

이레는 녹슨 캐비닛에 몸을 삐딱하게 기대고 서서 우진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노골적으로 훑어 내렸다. 그는 자신의 빈약한 자존감과 왜소한 체격을 감추기 위해 억지로 어깨를 한껏 펴고 있었다. 우진의 눈에 비친 이레는 이 협소한 조직의 정점에 서 있다는 착각에 빠져, 위압감을 조작해 내려 애쓰는 가장 흔하고 저렴한 부류의 인간에 불과했다. 사회에서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을 하등한 존재가 '계급'이라는 가상의 완장을 차고 포식자 흉내를 내고 있었다.

“여기서는 그런 반반한 얼굴 안 통한다. 밖에서 연예인이었든, 재벌 집 아들이었든 상관없어. 여기서는 늦게 들어온 놈이 먼저 들어온 놈 말에 죽고 사는 거다. 정신 똑바로 차려라, 신병.”

“네, 알겠습니다.”

우진의 대답은 무미건조했다. 거기에는 상급자에 대한 두려움도, 억울함에 복받친 반항도 섞여 있지 않았다. 그저 0과 1로 이루어진 기계적인 수신 신호와 같았다. 이러한 우진의 어조는 이레에게 묘한 불쾌감을 선사했다. 신병이라면 마땅히 보여야 할 눈동자의 흔들림이나 땀방울 맺힌 이마 같은 ‘공포의 지표’가 우진에게서는 전혀 감지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레는 우진의 그 결점 하나 없는 무결한 표정을 처참하게 깨뜨려 보고 싶다는 가학적인 욕망에 휩싸였다.

“그래? 군기가 아주 바짝 들었네.”

이레는 피식 웃으며 주머니에서 낡은 칫솔 하나를 꺼내 우진에게 내밀었다. 우진의 시선이 천천히 칫솔모를 향했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하얀 치약이 아니었다. 거친 칫솔모 사이사이에 투명하고 끈적한 액체가 떡처럼 눌어붙어 있었다. 공업용 본드였다. 본드 특유의 휘발성 화학 냄새가 좁은 창고 안으로 역하게 퍼져 나갔다.

“사회에서 잘 나갔다니까 양치질도 고급스럽게 해야지? 자, 이걸로 양치질 한번 시원하게 해봐. 내가 네 이빨 구석구석 깨끗해지는지 지켜봐 줄게.”

이레의 눈에는 광기가 서려 있었다. 그는 우진이 당황하며 빌거나, 혹은 분노하며 달려들기를 기대했다. 어떤 반응이든 상관없었다. 하극상이면 영창을 보내면 되고, 굴복하면 평생의 노예로 부리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우진은 본드가 묻은 칫솔을 마치 귀한 보급품을 받듯 정중하게 받아 들었다. 그러고는 이레의 눈을 단 한 순간도 피하지 않은 채, 아주 천천히 입술을 벌렸다. 우진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수만 가지의 시뮬레이션이 빛의 속도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럼, 어디 이걸로 양치 한번 시원하게 해봐라. 아까 보니까 시키는 대로 다 할 기세더구먼, 안 그래?”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이레가 본드가 범벅된 칫솔을 우진의 입가로 바짝 들이밀었다. 휘발성 강한 화학 약품의 냄새가 코끝을 찔렀고, 끈적한 액체는 금방이라도 우진의 입술에 닿을 듯 위태롭게 흔들렸다. 칫솔모가 우진의 얼굴 앞에 도달한 그 찰나의 순간, 우진의 신경계는 이성적인 판단보다 먼저 근육에 신호를 보냈다.

‘퍼억!’

창고 안의 무거운 정적을 찢는 둔탁한 파열음이 울려 퍼졌다. 우진의 정교하게 조율된 팔이 이레의 가슴팍을 정면으로 가격했다. 밀쳐진 것이 아니라, 마치 기계 장치가 튕겨 나가듯 이레의 몸은 뒤로 붕괴하며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창고 구석에 쌓여 있던 낡은 관물대와 상자들이 요란하게 흔들렸고, 바닥에 자욱하게 깔려 있던 먼지들이 이레의 볼품없는 움직임에 반응하듯 공중으로 사납게 비산했다.

바닥을 구르며 체면을 구긴 이레는 한참을 켁켁거리다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은 수치심과 분노로 뒤섞여 핏발이 서 있었다.

“야, 이 개새끼야! 너 방금 뭐 했어? 군대에서 가장 큰 죄목이 뭔지 알아? 하극상이야, 이 미친 새끼야! 너 이거 그냥 안 넘어가, 내 군 생활 전부를 걸고 너 영창 보내버릴 거니까 두고 봐!”

일어나 소리를 질러대는 이레의 모습은 공포스럽기보다 가소로웠다. 우진의 눈에는 그저 주인 없는 골목에서 제 덩치보다 큰 상대를 향해 짖어대는 성난 치와와에 불과해 보였다. 우진은 이레의 고함을 소음으로 분류하며 무표정하게 생각했다.

‘귀찮게 됐군.’

군대라는 폐쇄적인 톱니바퀴 안에서 소문은 빛보다 빠르게 전달된다. 중대 인원이라고 해봐야 고작 70명 남짓한 소규모 집단에서, 신병이 병장을 팼다는 뉴스는 채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아 전 병력에 전파되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실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간부들의 귀에 들어가 정식 징계 절차가 밟히기 전, 전역을 고작 한 달 앞둔 중대의 실질적 정점, 최순범 병장이 긴급하게 호출을 내렸다. 내무반의 모든 상병장들이 모여든 좁은 복도 끝에서 우진은 피고인처럼 그들 앞에 섰다.

“김이레한테는 이미 대강 들었다. 자, 이제 정우진 네가 직접 뱉어봐.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이등병이 병장을 들이받는 게 상식적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건가?”

순범의 목소리에는 말년 병장 특유의 나른함과 그 이면에 숨겨진 권위가 실려 있었다. 우진은 시선을 피하지 않고 차분한 톤으로 입을 열었다.

“김이레 병장이 공업용 본드를 짠 칫솔을 제 입안에 강제로 넣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김이레 병장을 쳤습니다. 고의적인 마음은 없었으며, 위험 상황에 대한 무의식적 방어 행동이었습니다.”

“하, 이 새끼 봐라? 이등병 나부랭이가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논술을 하네?”

중대의 실세이자 거친 성정으로 유명한 권영규 상병이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우진의 멱살을 잡을 듯 다가와 으름장을 놓았다.

“네가 아무리 그럴듯한 단어로 변명해도, 결과는 변하지 않아. 결과적으로 이등병 나부랭이가 계급장 무시하고 병장을 친 거잖아. 안 그래? 최 병장님, 이건 그냥 넘어가면 안 됩니다. 밑에 애들이 이거 보고 뭐라고 생각하겠습니까? 군대 기강 다 무너지는 겁니다.”

“아, 씨… 말년에 진짜 못 볼 꼴 보고 가네.”

순범은 귀찮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야, 이범호. 네가 이 새끼 분대장이니까 책임지고 중대장님 복귀하시면 하극상으로 공식 보고해. 영창을 보내든, 타 중대로 날려버리든 마음대로 하고. 나 전역할 때까지는 조용하게 가자, 어?”

사태가 우진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며 '영창'이라는 단어가 기정사실로 되던 그때였다. 영규와 함께 중대 내 실세 쌍벽을 이루던 이종현 상병이 미간을 찌푸린 채 우진을 뚫어지게 응시하다가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야, 너… 혹시 태산 중학교, 태산 고등학교 나왔냐?”

그의 질문에 장내의 긴장감이 미묘하게 뒤틀렸다. 우진은 무감각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며 짧게 긍정했다.

“네, 맞습니다.”

우진의 대답을 듣고 종현은 상병장들에게 조용히 말했다.

“저 새끼, 제 고등학교 선배 같은데, 제 기억이 맞다면 저 새끼 저거 개악마입니다. 싸움도 잘하고 공부도 잘해서 학교에서 선생들도 못 건드리고, 그 당시에 난다 긴다 하는 선배 형들도 아무도 못 건드리던 놈이에요. 한마디로 개악마 사이코입니다”

종현의 폭로로 인해 내무실 안에는 기묘한 냉기가 감돌았다. 밖에서 거친 삶을 살다 온 종현이 몸을 사릴 정도라면, 눈앞의 저 무표정한 신병은 단순한 반항아가 아니라 감당할 수 없는 괴물일지도 모른다는 직감이 상병장들의 뇌리를 스쳤다. 그러나 무리의 실세 중 하나인 영규는 달랐다. 그는 이 분위기를 일종의 권위 침해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뭐? 이종현, 너 고작 애새끼 하나한테 쫄아서 이러는 거냐? 밖에서 한 가닥 안 하고 온 놈이 어딨어? 난 저 새끼 처음 들어올 때부터 눈깔이 마음에 안 들었어. 이참에 확실히 밟아 놔야 우리가 남은 군 생활 편하게 하는 거야. 기선 제압 못 하면 밑에 애들이 다 기어오른다고!”

영규는 침을 튀기며 열변을 토했지만, 분위기는 이미 묘하게 뒤틀려 있었다. 서열의 정점에 서 있던 종현이 보인 공포는 전염병처럼 번져나갔고, 상병장들은 새로 들어온 이등병이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감지했다. 그때, 폭풍의 눈처럼 고요하던 우진이 입을 열었다.

“제가 그냥 하극상으로 보고하고 징계받겠습니다.”

예상치 못한 선언에 영규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상병장들 사이에서 당혹 섞인 웅성거림이 터져 나왔다. 사고를 친 신병이 제 발로 영창을 가겠다고 나서는 것은 군대라는 시스템 안에서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뭐라는 거야, 저 새끼? 지금 우리랑 장난해?”

“고의는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제가 상급자인 김이레 병장을 밀친 것은 사실입니다. 군법상 하극상으로 봐도 무방해 보입니다. 내일 중대장님 복귀하시는 대로 자수하고 합당한 벌을 받겠습니다. 선임분들께서 고민하실 필요 없게 제가 직접 매듭짓겠습니다.”

우진의 어조는 지나치게 차분해서 오히려 오싹했다. 그것은 반성이 아니라, 이 상황이 가져올 모든 변수를 계산한 끝에 도출된 최적의 경로를 통보하는 것에 가까웠다.

“일단 점호 시간 다 됐으니까, 상병장들은 각자 가서 생각 좀 해보고 내일 다시 이야기하자.”

순범의 해산 신호와 함께 무거운 정적이 깨졌다. 저녁 청소가 시작되었지만, 내무반의 공기는 여전히 날이 서 있었다. 청소 도중, 분이 풀리지 않은 영규가 우진의 구역으로 다가왔다. 그는 우진이 쥐고 있던 빗자루를 군홧발로 거칠게 걷어차며 비아냥거렸다.

“이 새끼 이거, 청소하는 꼬락서니 봐라? 이등병 새끼가 빠져가지고 설렁설렁… 야, 네 애미 애비가 밖에서 그렇게 가르치더냐? 어른이 말하면 대충 대답하고 꼴리는 대로 살라고?”

부모를 들먹이는 저열한 도발. 우진은 멈춰 서서 영규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눈을 피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분노를 담지도 않았다. 그저 무언가 흥미로운 실험 대상을 관찰하는 생물학자의 시선으로 영규의 얼굴 구석구석을 훑었다.

“뭘 꼴아 봐, 이 개새끼야! 너 중대장님 오시면 진짜 뒤졌어. 내 손에 죽는 줄 알아!”

영규는 우진의 무표정한 눈빛에서 정체 모를 소름을 느꼈다. 그 불안감을 감추기 위해 그는 더 크게 소리를 질렀지만, 그것은 사자 앞의 하이에나가 내뱉는 단말마의 비명과 다를 바 없었다.


다음 날, 상병장들은 다시 모였다. 어찌 된 영문인지 분위기는 급격히 반전되어 있었다. 우진이 영창에 가겠다고 당당히 나선 것이 오히려 고참들에게는 '저 새끼는 잃을 게 없는 놈'이라는 공포를 심어주었다. 결국 사건은 이레의 가혹행위가 발각될 것을 우려한 상급자들의 묵인 아래 '없던 일'로 결론 났다.

분대장 범호는 우진을 구석으로 불러 나직하게 경고했다.

“너, 이번엔 운 좋게 넘어갔지만 앞으로 조심해라. 군 생활 1년 넘게 남은 상병들이 너 독하게 주시하고 있어. 앞으로 네 군 생활이 지옥이 될 거라는 뜻이야. 알아서 기어라, 그래야 광명 찾는다.”

범호를 비롯한 고참들은 겉으로는 으름장을 놓았지만, 누구도 우진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지 못했다. 포식자를 마주한 초식동물의 본능적인 기피였다. 실제로 그 사건 이후 우진에게 시비를 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군 생활이 힘들어질 것이라는 예고와 달리, 상병장들은 마치 투명 인간을 대하듯 우진을 피해 다녔다. 오직 한 사람, 권영규만이 복수심을 갈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영규의 오만함에는 든든한 뒷배가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업계에서 손꼽히는 코스메틱 중견기업의 사장이었다. 자본의 힘은 군대의 높은 담장마저 가볍게 넘나들었다. 중대장부터 행정 보급관, 그리고 부대 살림을 책임지는 군무원들까지, 영규 아버지의 '성의'를 거치지 않은 자가 없었다.

영규의 면회 날은 부대 간부들의 은밀한 축제일이었다. 면회실 구석에서 화려한 포장지에 싸인 명품 지갑과 고가의 선글라스, 최고급 향수 세트가 간부들의 손으로 은밀하게 전달되었다. 자본으로 길들여진 간부들에게 영규는 관리해야 할 병사가 아니라, 전역 후에도 모셔야 할 귀한 '도련님'이었다. 덕분에 중대 내에서 영규의 권위는 지휘관의 명령보다 높았고, 견제 받지 않는 그의 악행은 점점 더 기괴하고 잔인하게 진화해 갔다.

영규에게 후임병들은 인격을 가진 동료가 아니라, 지루한 군 생활을 달래 줄 소모품에 불과했다. 그는 단순히 '심심하다'는 이유만으로 일, 이등병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는 바리캉을 들고 그들의 머리 중간에 고랑을 파헤치거나 괴상한 문양으로 자르며 낄낄거렸다. 거울 속 자신의 처참한 몰골을 보며 눈물을 삼키는 후임들을 보며 그는 환희를 느꼈다.

가학의 수위는 점차 생리적 한계를 시험하는 영역으로 넘어갔다. 그는 강제로 변비약을 먹인 뒤 화장실 출입을 금지했다. 식은땀을 흘리며 복통에 몸부림치는 후임들의 고통스러운 표정을 관찰하며, 그는 마치 신이라도 된 양 그들의 배설 욕구를 통제하는 즐거움을 탐닉했다. 주말이면 자신의 승리가 내정된 억지 내기를 강요해 후임들의 쥐꼬리만 한 월급과 부모님이 보내준 용돈을 지속적으로 갈취했다.

범죄는 더욱 은밀하고 대담해졌다. 영규는 특정 이등병들을 지목해 단둘이 목욕할 것을 강요했다. 수증기가 자욱한 폐쇄된 목욕탕 안에서, 위계에 의한 추악한 성범죄가 자행되었다. 피해자들은 짐승 같은 유린을 당하면서도 계급이라는 족쇄와 영규의 배경 앞에 입을 다물어야 했다.

물론 정의를 바라는 목소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몇몇 용기 있는 피해자들이 ‘마음의 편지’라는 공식적인 소통 창구를 통해 영규의 악행을 고발했다. 그러나 그 편지들이 향한 곳은 정의가 아니라 절망이었다. 이미 영규의 금권에 포섭된 행정 보급관은 모든 고발장을 중간에서 가로챘다.

“이 새끼들이 군기가 빠져서 헛소리를 적어냈네?”

행보관은 오히려 고발자를 색출해 압박했고, 영규의 죄상은 종이 조각과 함께 파쇄기 속으로 사라졌다. 부대를 정화해야 할 시스템이 오히려 범죄를 보호하는 방패가 된 것이다.

아픈 병사들의 치료를 위해 마련된 ‘의무 외출 제도’는 영규의 개인 유흥을 위한 통행증으로 전락했다. 영규는 환자 명부에 이름을 올리고 당당하게 부대 정문을 나섰다. 군부대 인근의 특수한 폐쇄 상권은 그에게 거대한 놀이터였다.

그는 대낮부터 술집을 전전하며 독주를 마셨고, 인근 성매매 업소를 드나들며 탐욕을 채웠다. 이 모든 일탈은 부대 인솔 책임자인 장용 군무원의 통솔 아래 이루어졌다. 장용은 영규가 건네는 두툼한 돈봉투와 고가의 명품에 눈이 멀어, 국가의 녹을 먹는 공직자로서의 양심을 내던졌다. 그는 영규의 뒤에서 망을 봐주거나 알리바이를 조작해 주는 충실한 '사냥개' 노릇을 자처했다.

부대 전체가 영규라는 독버섯을 키우는 거대한 온상이 되어가고 있었다.


우진이 일병으로 진급하던 해, 영규도 마침내 병장 계급장을 달았다. 그리고 우진에게는 새로운 신분 변화가 생겼다. 명석한 두뇌와 고학력을 인정받아 중대의 살림을 도맡는 행정병으로 발탁된 것이다. 행정병이라는 직책은 우진에게 군대라는 거대한 체스판을 내려다볼 수 있는 관제탑과 같았다. 특히 중대원 전체의 일상을 지배하는 ‘근무표 작성’은 총칼보다 더 예리한 무기였다.

전임자가 남긴 복잡한 엑셀 수식 파일에 이름만 넣으면 시스템이 돌아가는 구조였지만, 우진은 그 시스템의 맹점을 파고들었다. 군인들이 가장 증오하는 시간대가 있었다. 밤 9시 소등 후 단잠에 빠질 무렵 깨워지는 11시 1시 근무, 그리고 깊은 잠의 한복판에서 영혼을 끌어올려야 하는 2시 4시 근무. 이른바 '퐁당퐁당'이라 불리는 이 지옥의 시간대는 다음 날 전체의 컨디션을 파괴하는 치명적인 독이었다.

우진은 전임자가 남긴 조잡한 엑셀 파일의 수식을 정교하게 비틀기 시작했다. 표면적으로는 공평한 난수 발생기처럼 보였으나, 특정 조건 값이 부여되면 결과는 고정되었다. 영규의 이름은 늘 수면의 질을 가장 참혹하게 파괴하는 시간대에 배치되었다.

소등 후 겨우 잠이 들 무렵 다시 깨어나야 하거나, 일어나는 순간 하루 전체의 컨디션이 퓨즈 나간 기계처럼 망가지는 그 저주받은 시간대는 오로지 영규만을 위해 예약되었다.

근무표는 중대장의 최종 결재를 거쳐 게시판에 걸렸다. 게시된 근무표는 단순한 일정이 아니라 ‘중대장의 지시’였다. 영규가 아무리 안하무인으로 날뛰어도 많은 시선들 앞에서 대놓고 지휘관의 명령을 거부하는 것은 불가했다. 핏발 선 눈으로 우진을 찾아온 영규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이 새끼 봐라? 야, 정우진. 너 지금 장난하냐? 너 일부러 내 근무 시간만 좆같이 짜는 거지? 이거 너지?”

우진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무미건조한 음성을 출력했다.

“저는 근무 조정 권한이 없습니다. 엑셀 수식은 휴가자와 열외 인원을 제외하고 자동으로 배정될 뿐입니다. 저는 중대장님의 결재를 받아 공지하는 전달자일 뿐입니다. 불만이 있으시면 중대장님께 직접 면담 신청을 하시는 게 합리적일 것 같습니다.”

“지랄하고 있네, 이 영악한 새끼가… 너 두고 봐라. 내 전역 전에 너 반드시 피눈물 흘리게 해줄 테니까.”


시간은 무심하게 흘러 군 생활의 정점이자 모든 병사의 자존심이 걸린 ‘특급전사’ 선발 시즌이 도래했다. 연일 이어지는 고강도의 체력 테스트로 병사들의 신경은 날카로워질 대로 날카로워져 있었다. 특히 체력 검정 직후 진행되는 실거리 사격은 육체적 피로와 고도의 집중력이 충돌하는, 부대 내에서 가장 위험하고 예민한 훈련이었다.

“탄창 결합! 노리쇠 전진! 사격 통제관 지시에 따라 조준관 단발, 사격 준비!”

사로를 가득 채운 중대장의 지휘 호령이 마이크를 타고 사격장 전체에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병사들은 차가운 총기를 움켜쥐고 전방의 표적을 노려보며 숨을 죽였다. 바로 그때, 정적을 깨는 이질적인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3사로에 위치했던 김기영 일병이 갑자기 총구를 전방이 아닌, 자신의 턱밑을 향해 수직으로 꺾어 올린 것이다.

“저 새끼 뭐야! 야! 총구 돌려!“

“전체 사격 중지! 사격 중지! 전 대원은 그 자리에 부동자세를 유지한다! 움직이지 마!”

사격장은 한순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관리 감독을 맡았던 부사관들이 용수철처럼 튀어 나가 기영의 팔을 꺾으며 제압했다. 0.1초만 늦었어도 총성이 울려 퍼졌을 일촉즉발의 상황. 다행히 빠른 조치 덕분에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부대 전체는 거대한 충격에 휩싸였다.

특급전사 선발은 다행히 중대 인원들끼리만 진행하는 내부 행사였다. 사건이 외부나 상급 부대로 유출되지만 않는다면, 중대장의 권한 내에서 조용히 덮을 수 있는 ‘사고 미수’였다. 하지만 이어진 사고 조사 과정에서 충격적인 반전이 일어났다.

조사실에 앉은 기영은 창백한 얼굴로 뜻밖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정우진 일병에게 그간 여러 차례 입에 담지 못할 가혹행위를 당했습니다. 잦은 폭언과 인격 모독을 견디다 못해… 죽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기영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지만, 그 내용은 정교하게 짜인 대본처럼 막힘이 없었다. 평소 말수가 적고 냉철했던 우진의 이미지는, 폐쇄적인 군대 사회에서 도리어 ‘속을 알 수 없는 가해자’의 프레임으로 손쉽게 치환되었다. 부대는 발칵 뒤집혔고, 우진은 일말의 소명 기회도 제대로 얻지 못한 채 중대 내부 징계위원회에 전격 회부되었다


징계위원회의 최종 심판은 4일 뒤, 차주 월요일로 확정되었다. 영창 혹은 강제 전출이라는 파멸의 벼랑 끝에 섰음에도 불구하고, 우진의 표정은 평소와 다름없이 고요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은 거대한 체스판처럼 빠르게 회전하고 있었다.

‘왜 김기영인가. 평소 접점도 없던 그가 왜 자기 목숨을 담보로 이런 무모한 연극을 자행한 거지?’

우진은 기영이 단순히 개인적인 원한으로 이런 일을 벌였다고 보지 않았다. 기영의 눈에서 보았던 것은 우진을 향한 증오가 아니라, 무언가에 압도당한 자의 '공포'였기 때문이다. 누군가 기영의 등 뒤에서 총구를 겨누고 있지 않고서야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사건 이틀째 되던 날 오후, 개인정비 시간이었다. 우진은 평소와 다름없이 부대 뒤편을 산책하며 주변을 살폈다. 그때, 막사 뒤편 후미진 분리수거장 근처에서 낯익은 두 명의 실루엣이 우진의 시야에 포착되었다.

우진은 몸을 숨기고 숨을 죽였다. 담배 연기 너머로 보인 인물은 뜻밖에도 사건의 당사자인 김기영, 그리고 그를 유유히 내려다보고 있는 권영규였다.

“야, 이번에 제대로 먹혔어. 중대장도 정우진 그 새끼 전출 보낼 생각뿐이더라.”

영규가 기영의 어깨를 툭툭 치며 비릿하게 웃었다.

“약속한 건 걱정 마. 내일 외출 때 네 계좌로 꽂아줄 테니까. 그리고 남은 군 생활은 내 밑에서 편하게 지내면 돼. 알겠냐?”

“네 감사합니다. 병장님.”

기영은 안도와 비굴함이 섞인 표정으로 고개를 연신 조아렸다. 둘은 무슨 대단한 작전이라도 성공시킨 것처럼 은밀하게 낄낄거리며 대화를 마무리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우진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우진은 이제 확신했다. 이것은 우진을 눈엣가시처럼 여겼던 영규가 자신의 금권과 위력을 이용해 기영을 매수하고 조종한, 추악한 '정치질'의 결과물이었다. 기영의 가짜 자살 소동은 우진을 사회적으로 말살시키기 위해 영규가 설계한 정교한 덫이었던 것이다.


분리수거장에서 영규와 기영의 밀담을 확인한 다음 날 밤, 부대는 평소와 다름없는 정적에 잠겨 있었다. 우진은 당직 근무자로서 저녁 점호가 끝난 뒤 부대 곳곳을 점검하는 순찰 업무를 수행 중이었다. 복도 끝, 이미 불이 꺼져 있어야 할 공동 목욕탕 안에서 미세한 마찰음과 억눌린 신음이 새어 나왔다.

단순히 늦게 복귀한 근무자의 목욕 소리라고 치부하기엔 음습한 기운이 역력했다. 우진의 예민한 감각은 그 소리에서 ‘비정상적인 데이터’의 파동을 감지했다. 우진은 소리 없이 다가가 목욕탕 문을 아주 천천히, 틈새만큼 열었다.

그 틈새, 습기가 가득 찬 뜨거운 공기 사이로 지옥 같은 광경이 펼쳐졌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영규가, 이제 갓 자대 배치를 받은 전병철 이병을 구석진 벽 끝으로 몰아붙이고 있었다. 병철은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며 바닥만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고, 영규의 눈에는 이성을 잃은 자의 비릿한 욕망과 비뚤어진 폭력성이 광기처럼 서려 있었다. 소문으로만 떠돌던 영규의 성범죄가 실시간으로 자행되고 있는 현장이었다.

우진은 그 추악한 광경을 한참 동안 지켜보았다. 분노에 휩쓸리는 대신, 마치 고장 난 기계의 부품을 관찰하는 기술자처럼 냉정하게 그 장면을 눈에 담았다. 그러고는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유령처럼 소리 없이 문을 닫았다. 우진의 얼굴은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는 이제 이 썩은 뿌리를 뽑아낼 마지막 퍼즐 조각을 손에 넣었다.


행정반으로 돌아온 우진은 주위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했다. 모두가 취침한 것을 확인한 후, 조용히 행정용 컴퓨터 앞에 앉았다. 화면 보호기를 해제하자, 둔탁한 소음과 함께 모니터의 푸른 빛이 그의 무표정한 얼굴을 창백하게 비췄다. 그는 망설임 없이 국방부 인트라넷의 고충 제보 게시판에 접속했다. 보안 로그인을 거쳐 익명 게시판에 들어선 그는, 단 한 번의 머뭇거림도 없이 자판을 두드려 제목을 입력했다.

[262중대, 정우진 일병의 상습적인 범죄를 고발합니다]

우진은 차가운 화면을 응시하며 잠시 숨을 골랐다. 스스로를 가해자로 지목하는 이 글이 불러올 파장을 모르지 않았다. 그는 김기영 일병이 진술했던 ‘조작된 가혹행위’ 내용에 살을 붙여 ‘정우진 일병’이 얼마나 잔인하고 악의적인 가해자인지 서술해 나갔다. 그 글의 행간에는 교묘하게 설계된 장치들이 숨겨져 있었다.

가혹행위를 저질렀다고 주장하는 일시와 장소를 적으면서, 그는 동시에 영규가 실제로 저질렀던 폭언, 금품 갈취, 의무 외출을 빙자한 성매매 출입, 그리고 방금 목격한 목욕탕 내 성범죄를 ‘정우진 일병이 한 행위인 양’ 아주 구체적이고 치밀하게 기재했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실명, 범행 일자, 장소까지 곁들여진 이 문서는 단순한 고발장을 넘어선 완벽한 범죄 일람표였다. 우진은 마지막 문장을 입력하고 '게시' 버튼을 눌렀다. 마우스에서 손을 떼는 순간, 그의 눈동자에는 더 이상 일말의 감정은 남아 있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평온하던 중대 연병장에 헌병대 차량이 들이닥쳤다. 검은색 관용 세단과 헌병대(군사경찰) 로고가 선명한 승합차였다. 타이어가 비명을 지르며 연병장의 파쇄석을 짓이겼다.

국방부 게시판에 올라온 익명의 글은 평소 중대장 선에서 무마되던 ‘마음의 편지’와는 차원이 달랐다. 글의 수위와 구체성은 군 수사기관이 움직이지 않을 수 없을 만큼의 수준이었다.

부대는 순식간에 전시 상황처럼 얼어붙었다. 아침 점호가 끝난 뒤에도 병사들은 생활관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했다. 헌병 수사관들이 분주하게 복도를 누볐고, 그들의 서늘한 시선이 닿는 곳마다 병사들은 마른침을 삼켰다. 수사관들은 게시글에 가해자로 지목된 우진을 가장 먼저 격리했다.

"행보관님, 이게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외출 중 급히 복귀한 중대장의 얼굴은 핏기가 가시다 못해 푸르스름하게 질려 있었다. 자신의 진급이 걸린 부대 관리 실태가 국방부 직속 수사기관에 통째로 넘어갔다는 사실은 그에게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행보관은 대답 대신 떨리는 손으로 상황 보고서를 건넬 뿐이었다.

임시 취조실로 꾸려진 소대장실. 낡은 책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베테랑 수사관과 우진이 마주 앉았다. 그의 표정은 기묘할 정도로 차분했다.

“7월 27일, 생활관에서 정우진 일병, 당신이 김태형 이병에게 단독 군장을 50회 이상 반복해서 싸고 풀게 하며 가혹행위를 했다는 제보가 있어. 군장을 내동댕이치며 폭언 폭설을 했다는데, 인정하나?”

수사관의 낮은 저음이 우진의 귓가를 때렸다. 우진은 대답 대신 책상 위의 얼룩을 가만히 응시했다. 수사관이 서류 뭉치를 신경질적으로 넘기며 다음 질문을 던졌다.

“8월 12일 밤 20시경. 저녁 점호 직전에 생활관에서 김태형과 서인우 이병에게 변비약을 강제로 먹이고, 화장실 출입을 통제하며 가혹행위를 했다는 기록도 있네. 인간이 할 짓인가? 인정해?”

이어지는 질문은 더욱 가관이었다. 10월 1일 국군병원 진료를 핑계로 외출해 인근 성매매 업소에 출입했다는 구체적인 시간대까지 제시되었다. 고발장에 적시된 ‘가해자 정우진’은 그야말로 군대라는 폐쇄적인 조직이 낳은 괴물 그 자체였다. 수사관들은 당연히 우진의 입에서 비굴한 변명이나 눈물 섞인 호소가 나올 것이라 예상했다.

우진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동자엔 일말의 동요도 없었다.
“아닙니다. 전부 사실무근입니다.”

수사관은 비웃음을 흘리며 우진에게 말했다.

“원래 너 같은 새끼들 대답은 다 정해져 있지. 하지만 이건 네 부정만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야. 증거와 증인이 차고 넘치거든.”

하지만 수사가 진행될수록 헌병 수사관들의 표정은 묘하게 변해갔다. 고발 글에는 우진이 가해자로 적혀 있었지만, 정작 수사관들이 그 날짜와 장소의 CCTV를 확인하거나 주변 인물들을 심문하자 전혀 다른 이름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우진이 고발장에 적시한 ‘범죄의 현장’에는 항상 우진이 아닌 영규가 있었다.

수사관이 “정우진 일병이 여기서 가혹행위를 했다는데 맞나?”라고 물을 때마다, 잔뜩 겁에 질려 있던 피해 병사들은 우진이 적어놓은 정교한 가이드라인을 토대로 진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아닙니다… 그날 거기 있었던 건 정우진 일병이 아니라 권영규 병장입니다. 사실은…”

봇물 터지듯 쏟아지는 증언들은 우진의 가짜 범죄가 아니라, 영규의 진짜 범죄를 향해 화살표를 돌렸다. 우진은 자신을 미끼로 던져 영규를 보호하던 부대 내 부패한 방패막을 무력화시키고, 영규의 죄상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 것이다.


영규는 자신의 생활관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며 극도의 불안감에 휩싸였다. 자신이 기영을 매수해 짜 놓았던 ‘사격장 자살 소동’의 대본이 오히려 우진의 고발장에 의해 역이용당하고 있음을 직감했다.

우진은 기영이 했던 가짜 진술을 고발장에 그대로 인용함으로써, 기영이 중대 조사에서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과 이 사건을 중대장이 은폐했다는 사실까지 한꺼번에 들통나게 설계했다.

이것은 도박이 아니었다. 시스템의 맹점을 완벽하게 이해한 자가 벌이는 필승의 게임이었다. 우진은 스스로를 죄인으로 명명함으로써 부대 전체를 심판대에 올렸고, 이제 그 심판의 칼날은 영규의 목을 향해 정확히 낙하하고 있었다. 영규의 아버지가 쌓아 올린 금권의 성벽은, 우진이 단 하룻밤 만에 짜낸 ‘자기 고발’이라는 정교한 바이러스에 의해 처참하게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조사가 거듭될수록 사태는 권영규 개인의 일탈을 넘어 부대 전체의 비리 게이트로 번졌다. 피해 병사들은 공통적으로 진술했다. 이미 수차례 ‘마음의 편지’를 통해 고발을 시도했지만, 행정 보급관이 이를 중간에서 가로채 파쇄하거나 오히려 피해자들을 협박했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권영규 병장 아버지가 보내준 선물들이 행정 보급관 관물대에 가득합니다. 중대장님도 이 사실을 알고 계셨지만 묵인했습니다!”

이 진술은 헌병대에게 단순한 병사 간의 폭행 사건이 아닌, 군 기강을 뒤흔드는 ‘지휘 계통의 부패 및 뇌물 수수 사건’이라는 명분을 제공했다. 헌병대장은 즉시 권영규 병장에 대한 긴급 체포 명령을 내리는 동시에, 중대장과 행정 보급관, 그리고 외출을 방조한 장용 군무원과의 커넥션에 대한 전면적인 압수수색과 추가 조사를 지시했다.

헌병대의 수사에는 자비가 없었다. 우진이 스스로를 제물 삼아 터뜨린 고발장은 군 검찰의 서슬 퍼런 칼날이 되어 부대를 난도질했다. 영규는 조사 과정에서 그간 자행해온 성범죄 및 입에 담지 못할 가혹행위 혐의가 낱낱이 드러나며 군법원에 회부되었다. 아버지의 재력도, 명품 지갑으로 매수했던 인맥도 군 검찰의 실적 의지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결국 영규는 군 교도소행이라는 파멸적인 실형을 선고받았다.

부패의 고리는 거기서 끊이지 않았다. 영규의 아버지가 중대 간부들에게 상습적으로 전달해온 뇌물 리스트가 확보되면서 중대장, 행정 보급관, 그리고 외출을 방조했던 장주사 등 간부 4명에게도 중징계와 파면 조치가 내려졌다. 한때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군림하던 이들이 수갑을 찬 채 연병장을 떠나는 모습은 부대원들에게 형언할 수 없는 해방감을 안겨주었다.


수사가 종결을 향해 치닫던 무렵, 취조실의 서류 더미 속에서 기어나온 진실은 우진이 설계한 논리 구조보다 훨씬 추악하고 복잡한 형상을 띄고 있었다. 헌병대 조사 과정에서 마땅히 구제받아야 할 '순수한 피해자'로 분류되었던 5명의 병사들. 그러나 그들의 진술서를 대조하고 내무반의 숨겨진 위계질서를 파헤칠수록, 수사관들의 안색은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들 중 상당수는 권영규 병장이라는 거대한 포식자 아래에서는 신음하는 약자였지만, 영규가 자리를 비운 음지에서는 자신들만의 작은 제국을 건설하고 있었다. 그들은 후임의 관물대를 뒤지고, 부모님의 편지를 조롱하며, 자신들이 당했던 가혹행위의 방식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후임들에게 그대로 답습했다.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고, 그 피해자가 다시 증오를 양분 삼아 괴물로 변이하는 지옥 같은 악순환. 계급이라는 피라미드 구조 속에서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짓눌려 있던 유일한 인간은, 그 계급의 최말단에서 숨죽이던 이등병 전병철뿐이었다. 시스템은 이미 뿌리부터 썩어 문드러져,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는 진흙탕이 되어 있었다.


사건의 가장 잔혹한 희생자였던 병철은 수사 과정에서 자신의 치부가 낱낱이 파헤쳐지는 충격을 견디지 못했다. 그는 넋이 나간 눈으로 국군병원 폐쇄 병동에 수용되었다. 창살 너머로 보이는 하늘을 보며 그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무너진 자아를 붙잡으려 애썼다. 신경안정제 없이는 잠들지 못했고, 상담사가 건네는 위로조차 날카로운 파편이 되어 그의 살점을 후벼팠다.

병철은 이 지옥 같은 연쇄의 고리를 끊기 위해, 군 밖으로 나가기 위한 의가사 제대를 간절히 신청했다. 그러나 거대한 관료주의의 벽은 병철의 절규보다 높았다. 군 당국은 '치료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형식적인 답변과, 사건이 사회적 이슈로 번지는 것을 막으려는 행정적 결벽증을 내세워 그의 신청을 반려했다. 군에게 병철은 치유해야 할 청년이 아니라, 덮어야 할 결함 있는 부품에 불과했다.

결국 그해 겨울, 연병장의 흙먼지가 칼바람에 섞여 비명을 지르던 어느 새벽이었다. 병철은 국군병원 화장실의 차가운 파이프에 목을 매고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군이라는 울타리를 살아서 나가고 싶어 했던 청년은, 심장이 멈추고 온몸이 딱딱하게 굳어서야 비로소 그 높은 담장을 넘을 수 있었다. 수습된 그의 손에는 땀과 눈물에 젖어 구겨진 종이 한 장이 들려 있었다.

[내가 가장 힘들었던 건, 성폭행을 당했다는 사실보다 그 피해자가 나라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이었다.]


병철의 부고가 부대에 전해진 날, 우진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적을 섬멸했다는 승리의 도취감도, 부패한 권력을 무너뜨렸다는 쾌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얼음물 같은 서늘한 죄책감이 발끝에서부터 차올라 그의 폐부를 사정없이 찔렀다.

우진은 자신이 설계한 ‘자기 고발’이라는 전략이 얼마나 잔인한 양날의 검이었는지 뒤늦게 깨달았다. 그는 절대 악이라 믿었던 권영규를 처단하기 위해, 전병철이라는 연약한 인간이 죽기보다 숨기고 싶어 했던 치욕적인 상처를 강제로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정의 구현'이라는 번지르르한 명분을 앞세워, 한 청년의 영혼이 담긴 마지막 자존감을 세상의 구경거리로 던져버린 셈이었다.

데이터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지만, 데이터 안에는 인간이 감당해야 할 수치심의 무게가 계산되어 있지 않았다. 논리는 완벽했으나, 그 논리가 한 인간의 생명을 앗아갈 수 있다는 변수는 우진의 오만한 계산식에 존재하지 않았다.


며칠 후, 병철의 유품을 정리하며 발견된 낡은 일기장은 우진의 가슴을 더 깊이 헤집었다.

[자대배치 받은 날, 선임들이 잘 챙겨주고 정말 좋은 것 같다]

[그의 폭행이 점점 심해진다. 무섭다]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다. 더 이상은 못 버티겠다. 다 끝내고 싶다]

시간에 따라 점점 더 건조하고 절망적으로 변해가는 일기장의 내용은 병철이 겪었을 숨 막히는 고통을 처절하게 대변했다. 우진은 그 일기장을 읽으며 자신이 얼마나 오만한 판단을 했는지 깨달았다. 자신이 정의를 실현했다고 믿었던 그 순간, 병철은 이미 구원의 손길이 닿지 않는 심연에 갇혀 있었다.

일기장에는 영규뿐 아니라, 그간 병철이 당했던 모든 가혹 행위와 가해자들의 이름이 세세히 적혀 있었다. 그것은 또 다른 폭로의 시작이었다. 일기장을 바탕으로 추가 수사가 진행되었고, 예상치 못했던 인물들까지 여럿 포함된 가해자 명단이 드러났다.

추가 조사를 마치고 나오는 가해자들은 반성하기는커녕 서로 눈을 마주치며 낄낄거렸다.

“아씨, 재수 없게 걸렸네 씨발.”

그들은 훈방 조치나 가벼운 징계를 예상하는 듯했다. 그 추악하고 비열한 웃음을 보며 우진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미 과거의 우진과는 다른 우진이었다. 정의라는 명분으로 타인의 삶을 재단하고 ‘설계’했던 오만함은 병철의 죽음과 함께 산산이 조각났다. 텅 빈 연병장을 바라보며 그는 끊임없이 자문했다.

‘내가 한 짓이 저들과 무엇이 다른가? 내가 과연 저들을 심판할 자격이 있는가?’

그것은 단순한 후회가 아니라, 자신의 본성 자체에 대한 근원적인 혐오였다.


그날 이후, 우진의 세계는 기괴하게 뒤틀리기 시작했다. 이성으로 통제할 수 없는 기이한 신체적 증상들이 그의 일상을 잠식해 들어갔다. 밤이 되면 어김없이 병철이 꿈속으로 찾아왔다. 꿈속의 병철은 원망하는 눈빛도, 비명도 지르지 않았다. 그저 밧줄이 팽팽하게 당겨지며 체중을 견디지 못해 내는 ‘끼익, 끼익’ 하는 기분 나쁜 마찰음만을 반복했다. 그 소리와 함께 코끝을 찌르는 비릿한 체액의 냄새, 죽음이 머물다 간 자리의 그 서늘한 악취는 환각이 되어 우진의 수면을 난도질했다.

공포는 현실의 경계를 허물고 침범해왔다. 부대 식당에서 고기 굽는 냄새가 풍겨올 때면, 우진은 그 냄새에서 병철의 시신이 내뿜던 죽음의 냄새를 떠올리며 그 자리에서 구토를 내뱉었다. 행정반에서 누군가 무심코 내는 볼펜의 ‘딸깍’거리는 소리는 정적 속에서 병철이 마지막으로 내뱉은 꺽꺽거리는 신음소리로 변환되어 우진의 고막을 때렸다.

완벽한 통제와 논리를 자부하던 우진의 시스템은 붕괴되었다. 작은 소음에도 몸을 떨고, 평범한 일상의 냄새에도 역겨움을 느끼는 비정상적인 반응들. 자신을 통제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주는 무력감은 그를 더욱 깊은 나락으로 밀어 넣었다. 우진은 비로소 알게 되었다. 자신이 설계한 감옥에 갇힌 것은, 평생 이 죄책감의 환각을 짊어지고 살아가야 할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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