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바꼭질 : 보통의 인간에 대하여(3)

제3장. 박제된 찬사

by 국회의원

제3장. 박제된 찬사

우진은 소음 하나 발생시키지 않는 매끄러운 기계처럼 성장했다. 그의 하루는 오차 없이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의 연속이었고, 그의 삶에는 감정의 요동이나 예기치 못한 변수가 끼어들 틈이 없었다. 새벽 6시의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을 뜨는 습관부터, 일정한 각도로 정돈된 책상의 연필꽂이까지, 모든 것은 철저히 계산된 궤적 위를 달렸다. 시계의 초침이 각진 금속 소리를 내며 시간을 깎아 먹을 때, 우진 역시 정해진 속도로 자신의 인생을 조각해 나갔다. 그 지독한 일관성은 한국 사회의 가장 거대한 필터인 ‘입시’라는 관문을 통과할 때도 변함이 없었다. 수험장의 긴장감 섞인 공기조차 그의 펜 끝을 흔들지 못했다. 우진은 흔들림 없는 성적을 유지하며 한양대학교 공과대학의 문을 넘어섰다.

대학이라는 공간은 거대한 용광로 같았다. 갓 성인이 된 해방감과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수천 명의 야심, 그리고 서툰 개성들이 뒤섞여 형체 없는 연기를 내뿜었다. 하지만 그 혼란스러운 집단 속에서도 우진의 존재감은 독특한 색채를 띠었다. 그는 누군가와 어깨를 맞대고 걷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무리에서 뒤처져 보이지도 않았다. 마치 투명한 막에 둘러싸인 채 군중 속을 유영하는 존재 같았다. 그는 필요 이상의 말을 섞지 않았고, 타인의 시선에 갈구하지도 않았다. 그저 자기에게 주어진 좌표를 묵묵히 지킬 뿐이었다.

입학 후 1년의 폭풍 같은 시험과 과제들이 지나가자, 학생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서열과 계급도가 정교하게 그려지기 시작했다. 강의실 앞줄을 차지하는 이들의 눈빛 속에서, 혹은 술자리에서 오가는 가벼운 농담 속에서 ‘누구의 뇌가 가장 비범한가’에 대한 판별이 끝났다. 209명의 동기 중 우진의 이름은 3번째 칸에 새겨졌다.

이렇게 선명하게 그어진 계급에 따라 각 과별 상위 3명에게는 대기업 연계 대학생 인턴십의 기회가 주어졌다. 이는 단순한 경험이 아니었다. 과 동문 중 현직 대기업 재직자 2명이 직접 멘토로 강림하여 주 2회 학교를 방문하고, 함께 과제를 수행한 뒤 본사 회의실에서 최종 발표를 진행하는 파격적인 프로세스였다. 여기서 선정된 이에게는 곧바로 채용과 직결되는 인턴십 자격이 부여되었다. 대기업 취업이라는 단 하나의 골인 지점을 향해 달리는 학생들에게 이 제도는, 서울에서 부산까지 12시간이 걸리던 국도를 단 4시간 만에 주파하게 만드는 KTX의 1등석 티켓과도 같았다.

각 과별로 선발된 3명의 학생이 한 조가 되어 총 10개의 조가 이 소리 없는 전쟁터에 투입되었다. 그리고 우진이 속한 조의 멘토로는 우진보다 7학번이나 앞선 대리 정민기와, 4학번 선배인 사원 성민아가 배정되었다.

민기는 이십대 후반이라는 나이에 비해 지나치게 비어버린 머리숱과, 50대 임원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둔탁하게 무너진 체형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그의 타고난 결핍을 상징했다. 그는 동기들보다 1년 먼저 대리를 달았을 만큼 지독한 업무 몰입도와 사내 정치 능력을 갖춘 인물이었으나, 그 성취는 오로지 열등감을 동력으로 얻어낸 것이었다.

민기는 우진을 처음 본 순간부터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꼈다. 우진은 존재 자체만으로 공학관의 공기 분자를 재배열했다. 180cm가 넘는 훤칠한 키와 조각처럼 빚어진 외모, 무엇보다 타인의 시선이나 평가에 단 1%도 연연하지 않는 그 특유의 무심함은 사람들을 자석처럼 끌어당겼다. 민기가 대학 시절, 관심을 얻기 위해 과방을 청소하고 궂은일을 도맡아도 얻지 못했던 찬사를 우진은 가만히 서서 누리고 있었다. 여학생들은 우진의 무심한 태도에 오히려 안달하며 먼저 다가와 간식을 건 넸고, 그의 사물함 위에는 정체 모를 커피캔과 응원의 메시지가 적힌 알록달록한 포스트잇이 수시로 쌓였다. 민기에게 우진은 단순한 후배가 아니었다. 자신이 수년간 땀과 오욕, 그리고 굴욕적인 아부를 통해 쌓아 올린 ‘사회적 위치’라는 성벽을 단숨에 무너뜨리는, 태생적 우월함을 가진 불쾌한 침입자였다. 우진의 존재는 민기가 외면해온 자신의 초라한 본질을 비추는 거울이었다.

반면, 민기와 함께 멘토로 선정된 민아는 공학관의 삭막한 시멘트 벽 사이에서 피어난 한 송이 꽃 같았다. 2년 차 사원 특유의 단정한 비즈니스 캐주얼과 차분하면서도 지적인 목소리는 그녀가 등장하자마자 모든 남학생의 호흡을 멈추게 했다. 과제 기간 내내 그녀의 주변은 늘 취업 상담이나 전공 질문을 핑계로 서성이는 남학생들로 북적였다. 그들에게 민아는 단순한 선배가 아니었다. 밤샘 과제와 기름진 야식으로 점철된 공학관 생활의 끝에 주어지는 최종 보상 체계이자, 그들이 꿈꾸는 미래의 가장 완벽한 이상향이었다.

민기 또한 들과 다르지 않았다. 아니, 그는 훨씬 더 절박했다. 민아 앞에서 그는 능력 있는 선배로서, 혹은 직장 상사가 아닌 한 명의 매력적인 남자로 보이고 싶어 안달했다.

민아의 시선이 아주 찰나라도 우진의 얼굴에 머물 때마다, 민기는 본능적인 패배감에 휩싸였다. 그는 자신의 비루한 체형을 어떻게든 감추려는 듯, 땀이 밴 목덜미를 만지작거리며 넥타이를 과도하게 고쳐 맸다. 숨이 막힐 듯 조여오는 실크 넥타이는 마치 자신의 목을 조르는 올가미 같았다. 우진의 그 무심한 눈빛, 마치 세상 모든 것을 통달한 듯한 건조한 시선이 민아의 다정한 목소리를 관통할 때마다 민기의 심장 밑바닥에서는 알 수 없는 파괴 본능이 뱀처럼 고개를 들었다. 그것은 질투를 넘어선, 자신을 비참하게 만드는 빛나는 존재에 대한 원초적인 증오였다.


대학생들에게 주어진 첫번째 과제는 실무와는 거리가 먼, 지극히 관성적인 업무였다. '멘토 인터뷰를 통한 기업 문화 적응 보고서 작성'. 입사 준비 과정의 고충, 면접 당시의 압박 질문, 그리고 입사 후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느끼는 괴리감 등 뻔하고 지루한 질문들로 채워질 요식 행위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 지루한 과제가 팀 내에서는 보이지 않는 전쟁터가 되었다. 3명의 학생 중 2명은 민기와, 단 1명만이 민아와 인터뷰를 진행해야 했다. 학생들 사이에서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모두가 화사한 민아의 멘토링을 원했고, 칙칙한 민기의 멘토링은 피하고 싶어 했다. 이견이 좁혀지지 않자 결국 고전적인 방식인 '사다리타기'가 도입되었다.

민기는 책상 밑으로 깍지 낀 손을 꽉 맞잡았다. 손바닥에 축축하게 땀이 배어 나왔다. ‘아 제발, 제발 정우진만은 안 된다!’ 그는 속으로 비명을 지르듯 기도했다. 지난 1년간 봐온 민아는 누구에게나 친절했지만, 우진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는 생전 처음 보는 미묘한 파동이 일렁이고 있었다. 민기는 그 파동이 거대한 파도가 되어 자신을 집어삼킬 것 같다는 공포를 느꼈다. 하지만 잔인한 운명은 민기의 편이 아니었다. 사디리 끝에 적힌 우진의 이름은 정교하게 그어진 선을 타고 내려가 결국 민아의 이름 위에 멈춰 섰다.
“아씨...”
민기의 입술 사이로 억눌린 신음이 새어 나왔다.


첫 번째 과제 인터뷰 당일, 우진은 민아와 함께 후문 근처의 한적한 카페로 나섰다.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멀어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민기는 자리에 앉지도 못한 채 창가에 붙어 끝까지 시선을 떼지 못했다. '선남선녀가 밀폐된 공간에서 몇 시간 동안 눈을 맞추면 없던 감정도 생길 텐데.' 질투와 피해망상이 뒤섞인 검은 독소가 그의 뇌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결코 가질 수 없는 우진의 광채를 어떻게든 끄고 싶다는 파괴적인 욕구에 사로잡혔다.

카페 안은 클래식 음악이 나직하게 깔려 고요했다. 테이블 위에는 층이 진 달콤한 바닐라 라테 두 잔이 놓였다. 우진은 스마트폰의 녹음 버튼을 누르며 인터뷰의 서두를 열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첫마디는 배부된 매뉴얼과는 거리가 멀었다.

“면접 때 질문, 거의 안 받으셨죠?”

민아는 예상치 못한 질문에 동그란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생긋 웃으며 되물었다.

"어머, 어떻게 아셨어요? 신기하네.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이유야 뻔하죠.” 우진은 찻잔을 천천히 만지작거리며 덧붙였다.

“선배님처럼 이렇게 예쁘신 분이 면접장에 들어오면, 면접관들도 질문할 내용을 잊어버리거든요. 그저 이 사람이 우리 회사에 들어와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바라만 봤을 게 눈에 보입니다.”

낮고 차분하게 울리는 우진의 목소리는 민아가 그동안 들어왔던 천박한 아부들과는 결이 달랐다. 그것은 찬양이라기보다 객관적인 사실을 보고하는 관찰자의 명제 같았다.

“과제 할 때 선배님 주위에는 늘 사람들이 두 겹, 세 겹으로 북적거려서 저 같은 사람은 말 한마디 걸 기회조차 없더라고요. 오늘 인터뷰가 아니었으면 평생 멀리서 구경만 할 뻔했습니다.”

우진의 정교하게 조율된 화법은 민아의 견고한 경계심을 순식간에 녹여버렸다. 인터뷰는 형식적인 질의응답을 벗어나 빠르게 사적인 대화의 영역으로 침투했다. 민아는 어느새 차가운 라테 온도도 잊은 채, 상체를 우진 쪽으로 바짝 기울이며 흥분된 어조로 물었다.

“우진 씨야말로 정말 미스터리해요. 입학한 지 고작 1년이라면서요? 그런데 어떻게 공대 전체가 우진 씨를 아는 것 같죠? 아까 오면서 보니까 80%는 우진 씨한테 인사를 건네더라고요. 그 짧은 시간에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비결이 도대체 뭐예요?”

우진은 대답 대신 무심하게 민아의 눈동자를 깊게 응시했다. 그것은 유혹을 위한 시선이 아니라, 실험체의 반응을 살피는 무미건조한 관찰이었으나 민아에게는 거부할 수 없는 깊은 심연의 이끌림으로 전달되었다. 우진은 이제 '민아'라는 이름의 정교한 도구를 자신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는 아주 천천히,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그녀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민아와의 인터뷰 사건 이후, 민기의 마음속에 자리 잡았던 열등감은 임계점을 넘어섰다. 그것은 더 이상 개인적인 질투의 영역에 머물지 않았다. 민기의 공격성은 이제 숨길 수 없는 비릿한 악취가 되어 공학관의 무거운 공기 속으로 서서히, 그리고 확실하게 퍼져 나갔다. 멘토로서 마땅히 제공해야 할 업무적 가이드나 실무적인 조언의 통로는 완전히 봉쇄되었다.

그가 선배로서 보여주어야 할 격조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 빈자리를 채운 것은 논리도, 목적도, 생산성도 없는 감정의 배설물들이었다. 민기는 매일같이 우진의 주변을 맴돌며 폭발할 구실만을 찾았다

“아, 진짜 정우진 씨! 도대체 내 말귀를 어떻게 알아먹는 겁니까?”

어느 오후, 정적이 흐르던 공학관 대강의실에 민기의 날카로운 고함이 터져 나왔다. 수십 명의 학생과 관계자들이 지켜보는 개방된 공간이었지만, 민기는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권위를 증명이라도 하듯 일부러 목소리를 더욱 높였다.

“PPT 핵심 문구는 세 줄을 넘기지 말라고 내가 몇 번을 말했어! 여기가 무슨 논문 발표장이야? 대학생 인턴이면 인턴답게 시키는 것만 딱딱 하란 말이야. 왜 이렇게 자기주장이 강해?”

민기는 책상 위에 놓인 우진의 출력물을 신경질적으로 내팽개쳤다. 사실 우진의 결과물에 실수는 없었다. 오히려 민기 본인이 작성한 보고서보다 훨씬 정교하고 세련된 레이아웃이었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민기의 비난은 매번 본질을 벗어난 유치한 트집으로 향했다. 비난에는 일관성도, 설득력도 없었다. 그저 ‘상급자인 나의 기분을 거스르게 했다’는 해괴한 논리뿐이었다.

폭풍 같은 민기의 히스테리 앞에서도 우진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마치 방음벽 뒤에 서 있는 사람처럼, 민기의 사자후를 그저 물리적인 진동으로만 받아들이는 듯했다. 우진은 매번 꼿꼿하게 허리를 세운 채, 아주 미세하게 고개를 낮게 끄덕이며 짧고 건조하게 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수정하겠습니다.”

단 한마디의 변명도, 억울함을 호소하는 흔들리는 눈빛조차 없었다. 우진의 이 지독한 평온함은 민기를 더욱 미치게 만들었다. 민기는 우진의 얼굴에서 처참한 굴욕감이나 당혹감을 읽어내고 싶어 안달했다. 상대가 무너지는 모습을 보아야만 자신의 깎여나간 자존감이 회복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진에게 민기의 고함은 시스템 가동 중에 발생하는 불가피한 ‘화이트 노이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기계가 돌아가면 열이 나고 소음이 발생하듯, 민기라는 불완전한 객체에서 발생하는 마찰음 정도로 치부하는 우진의 태도. 그 완벽한 무심함은 민기에게 있어 자신의 존재 가치가 통째로 부정당하고 있다는 가장 강력하고 잔인한 증거였다.


대학생 인턴제도의 마침표이자 대기업 인턴직 기회의 당락을 결정지을 최종 발표가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이번 과제의 주제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기업의 핵심 신입사원 교육 솔루션인 ‘CNC(Core & Culture) 교육 프로그램’을 외부로 확장할 수 있는 실질적인 비즈니스 방안을 도출하는 것이었다. 이 과제는 단순한 리서치가 아니었다. 준비 기간 동안 직접 본사에 출근하여 현직자들과 부딪히며 정보를 캐내고, 실현 가능한 데이터를 구축해야 했다. 최종 발표 날에는 대기업 임원진들의 날 선 질문 세례를 견뎌내야 하는, 말 그대로 30명 지원자 사이의 ‘서바이벌 게임’이었다.

우진은 노트북 앞에 앉아 최근 보았던 병영 개선 관련 다큐멘터리를 데이터베이스에서 호출했다. 전역을 한 달 앞둔 병장들을 대상으로 진행한다던 조잡한 진로상담 캠프의 장면이 떠올랐다. 형식적인 설문지, 청춘의 불안을 잠재우기엔 턱없이 부족했던 상담사들의 공허한 위로들. 우진은 그 화면 속에서 날 것의 비즈니스 기회를 포착했다.

‘CNC 프로그램을 군부대에 선제적으로 도입한다면, 사회로 방출되기 직전의 거대한 잠재 고객군을 독점할 수 있다. 이는 단순한 교육 수익을 넘어, 기업의 브랜드 가치를 차세대 경제 주체들에게 각인시키는 고도의 마케팅 전략이 된다.’

우진의 통찰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예전에 아버지가 어머니와 식탁에서 나누던 대화를 기억해 냈다. "평생을 바친 곳에서 나오는 기분이 참 묘해." 우진은 시장을 수평이 아닌 수직으로 확장했다.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신입사원만큼이나 평생을 바친 조직에서 밀려나기 직전의 고연봉 임원들 역시 정체성 혼란을 겪는 ‘신입’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그들이 가진 막대한 자본력과 재취업에 대한 갈망은 CNC 프로그램의 가장 강력한 캐시카우(Cash Cow)가 될 수 있었다. 우진은 정교한 통계 자료와 우상향하는 수익 곡선을 덧붙여 빈틈없는 보고서를 구축했다.

그러나 이를 검토한 민기의 반응은 예상대로 편협한 조소였다. 그는 우진의 기획안을 훑어보며 미간을 찌푸린 채 펜을 신경질적으로 돌렸다.

“군대 아직 안 갔다 왔죠? 병장들이 보통 20대 초반 애들인데, 우리 하이엔드 프로그램을 적용한다고? 우진 씨, 너무 오버하는 거 아니야? 비즈니스는 현실이야. 애들 장난이 아니고.”

민기는 콧방귀를 뀌며 다음 장을 넘겼다. 임원 대상 확장안을 보자 그의 얼굴은 비릿한 실소로 물들었다.

“임원들한테 이런 게 필요할 것 같아? 그 사람들 연봉이 얼만데 퇴직 후 진로 상담 같은 소릴 하고 있어. 가당치도 않으니까 이런 아마추어 같은 아이디어 말고, 그냥 남들 다 하는 대학 협력 방안이나 다시 짜와요. 알겠어요?”

민기는 구체적인 대안이나 논리적 반박은 단 한 마디도 제시하지 않았다. 그는 우진이 쌓아 올린 공든 탑을 무너뜨리는 행위 자체에서 기괴한 권력의 희열을 느끼는 듯했다. 우진은 아무런 대꾸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료를 챙겼다. 그의 무표정 뒤에서는 민기의 이 오만한 피드백들이 차곡차곡 ‘증거’로 기록되고 있었다.


드디어 최종 발표 날이 밝았다. 생전 처음 발을 들여놓는 대기업 본사 대회의실의 내부는 압도적인 위용을 자랑했다. 높은 층고와 은은한 조명, 그리고 중앙을 가로지르는 육중한 마호가니 테이블 위에는 날 선 긴장감이 마치 보이지 않는 연기처럼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다른 대학생 참가자들은 사색이 된 채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손바닥에 밴 땀을 닦아내며 이미 수백 번은 읽었을 스크립트를 달달 외우고 있었고, 입술은 바짝 말라 하얗게 터져 있었다. 그들의 멘토들 역시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자신이 공들여 가르친 후배가 혹여나 임원들 앞에서 망신이라도 당할까 초조해하며, 의미 없이 다리를 떨거나 시계만 확인했다.

하지만 오직 한 사람, 우진만은 이 이질적인 공간 속에서도 기묘한 안온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마치 집 앞 공원을 산책하러 나온 사람처럼 여유로웠다. 흔들림 없는 그의 눈동자는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어떠한 감정적 동요를 내비치지 않았다.


“다음 발표자, 정우진 님 앞으로 나오세요.”

발표자로 호명된 우진이 단상으로 향했다. 그가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구두 굽이 바닥에 부딪히며 내는 규칙적인 소리가 정적을 깨웠다. 우진이 슬라이드를 넘기자, 거대한 스크린에 그동안 민기가 ‘쓰레기’ 취급하며 가차 없이 반려했던 기획안들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발표가 시작되자 우진의 목소리는 회의실 안을 서늘하면서도 명징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순한 과제 발표가 아니었다. 모든 음표가 계산된 완벽한 악기의 연주에 가까웠다. 민기가 “현실 감각 없는 아마추어의 몽상”이라며 비웃었던 ‘군부대 및 은퇴 임원 대상 확장안’은 우진의 입을 통해 거대한 비즈니스 비전으로 재탄생했다.

대학생의 수준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정교한 데이터 분석, 그리고 시장의 틈새를 찌르는 파격적인 전략에 심사 위원석의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팔짱을 낀 채 무심하게 서류를 넘기던 임원들이 자세를 고쳐 잡았고, 실무진들의 눈빛에는 당혹감을 넘어선 경외심이 서리기 시작했다. 질의응답 시간이 되자 임원들의 날카로운 송곳 질문들이 쏟아졌지만, 우진은 이를 미리 준비해 둔 보충 데이터로 여유롭게 방어해 냈다. 창과 방패의 싸움이 아닌, 압도적인 무력 차이를 보여주는 학살에 가까운 광경이었다.

발표가 끝난 순간, 회의실에는 기묘한 정적이 흘렀다. 그것은 압도적인 성취를 목격했을 때 인간이 본능적으로 느끼는 경외감 섞인 침묵이었다. 3초간의 정적 뒤에 터져 나온 박수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길고 묵직했다.

우진은 담담하게 단상에서 내려오며 자신의 멘토, 민기를 응시했다. 민기의 얼굴은 이미 경악과 공포로 처참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자신이 그토록 비하했던 아이디어가 회사의 결정권자들을 매료시키는 과정을 지켜보며, 민기는 자신의 커리어가 부정당하는 환청을 들었다. 멍하게 입을 벌린 채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은 마치 박제된 패배자의 표본 같았다.


“이번 대학생 인턴십에서 압도적인 성적으로 최우수 발표에 선정된 분은, 한양대학교 정우진 님입니다!”

인사 팀장의 선언과 함께 대회의실은 환호와 찬사로 가득 찼다. 하지만 우진은 미동조차 없었다. 그는 승리자의 도취감에 젖지도, 조급해하지도 않았다. 그는 무심한 표정으로 다시 단상에 올랐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이 기획안은 저 혼자만의 결과물이 아닙니다. 과제 기간 내내 저를 지도해 주신 멘토님 외 많은 선배님의 피드백과 통찰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마지막 소감을 대신하여, 제 기획안이 어떤 검증 과정을 거쳐 완성되었는지 그 지도 과정의 기록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우진이 리모컨을 눌렀다. 발표용 슬라이드의 마지막 페이지가 넘어가고, 그동안 숨겨져 있던 부록 슬라이드가 거대한 스크린에 투사되었다. 그것은 우진이 과제 기간 내내 수집한 소위 ‘권위자’들의 데이터였다. 화면이 바뀌는 순간, 장내의 공기가 일렁였다. 스크린 위에는 우진의 아이디어를 사전에 검토했던 부서 내 주요 인물들의 실명과 그들의 코멘트가 정갈하게 박혀 있었다.

민기는 스크린을 마주한 순간 돌처럼 굳어버렸다. 예기치 못한 전개에 그의 심장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1. 마케팅 1팀 김OO 대리

“군 조직을 하나의 ‘전환기 집단’으로 설정한 시각이 매우 흥미롭다. 개인의 심리적 결핍을 기업의 사업 아이템으로 연결한 접근은 기성세대가 내놓지 못할 신선한 충격이다.”

김 대리의 긍정적인 평이 읽히자, 장내 여기저기서 수긍하는 고갯짓이 이어졌다. 실무자의 예리한 시선이 우진의 아이디어에 '참신함'이라는 인장을 찍어준 셈이었다. 우진은 무표정하게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2. 영업 2팀 박OO 부장

“퇴직 이후의 자아 정체성을 관리하는 프로그램이라는 관점이 훌륭하다. 임원뿐만 아니라 명예퇴직을 앞둔 중간 관리자층까지 유료 타겟으로 확장할 수 있는 실질적인 수익 모델이다.”

실무 결정권자인 부장의 강력한 지지였다. 발표장에 묵직한 무게감이 실리기 시작했다. 이는 단순한 아이디어를 넘어 당장 '돈이 되는 사업'이라는 선언과도 같았다. 그리고 결정적인 한 방이 뒤를 이었다.

3. 신사업 전략부 최OO 상무

“임원은 자본보다 ‘역할 상실’을 더 두려워한다. 그 공백을 관리해 주는 프로그램이라는 점이 매우 설득력 있다. 당장 신사업 추진 과제로 검토할 가치가 충분하다.”

이 시점에서 회의실의 분위기는 완전히 뒤바뀌었다. 우진의 아이디어는 이제 일개 대학생의 치기 어린 발상이 아니었다. 부장과 상무가 이미 '검증을 마친 안건'이라는 절대적인 공신력을 얻게 된 것이다. 임원들의 눈빛에는 우진을 향한 무한한 신뢰가 서렸다. 그리고 마지막 슬라이드가 정점을 찍었다.

4. 마케팅 1팀 정민기 대리(지도 멘토)

“군이라는 특수한 폐쇄 조직의 특성을 기업 교육의 범주로 끌어올린 점이 인상 깊다. 임원과 퇴직자 등 사회적 소외를 겪는 다양한 계층의 미래 설계에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완성도 높은 제안이다.”

민기는 화면을 똑바로 볼 수 없었다. 슬라이드 속에 적힌 문장은 몇 주 전 자신이 우진에게 쏟아냈던 비아냥과 완벽하게 상반되는 내용이었다. 자신이 한 적도 없는 말이, 자신의 이름과 직함 아래 박제되어 전 임직원 앞에서 '공식 기록'으로 읽히고 있었다.

우진은 민기가 뱉었던 “군대 아직 안 갔죠?”, "아마추어적이다", “비즈니스는 애들 장난이 아니다”라는 독설을, 가장 완벽하고 세련된 찬사로 '번역'하여 공표해 버린 것이다. 만약 민기가 여기서 "나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라고 부정한다면, 그는 상무와 부장의 안목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꼴이 됨과 동시에 어린 대학생 후배를 시기하여 거짓을 말하는 옹졸하고 무능한 인간이 될 뿐이었다. 우진은 민기에게 '찬성' 외에는 그 어떤 선택지도 남겨두지 않은 채 그를 자신의 영광을 위한 장식물로 박제해 버렸다.

“감사합니다. 이처럼 멘토이신 정민기 대리님을 비롯해 많은 분께서 사전에 귀한 피드백을 주신 덕분에, 제 아이디어가 이 자리에서 빛을 낼 수 있었습니다.”

우진은 마이크를 잡고 단상 위에서 민기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승리자의 미소조차 없는 그 서늘하고 깊은 눈동자가 그의 심장을 꿰뚫었다. 민기는 자신이 결코 이 괴물을 통제할 수 없음을, 아니 이미 그 괴물의 위 속에서 소화되고 있음을 깨닫고 온몸을 떨었다. 우진은 정해진 순서대로 트로피를 거머쥐었고, 민기는 사람들 속에서 서서히 풍화되어 가는 박제된 패배자가 되었다.

“특히 사수이신 정민기 대리님께서 프로젝트 초기 방향 설정부터 실행 전략의 세세한 부분까지 정말 많은 조언을 주셨습니다. 제가 인턴으로서 길을 잃고 헤맬 때마다, 대리님께서 보여주신 정확하고 때로는 따끔한 가이드가 없었다면 이 보고서는 결코 완성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자리를 빌려 정민기 대리님께 다시 한번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우진의 목소리가 회의실을 가득 채웠다. 순간, 모든 시선이 객석에 앉아 있던 민기에게로 쏠렸다. 상무와 부장을 비롯한 임원진들이 그를 향해 미소를 보냈다.

팀장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정 대리, 고생했어. 역시 사람 보는 눈이 있구만!"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민기는 웃어야만 했다. 입안은 사막처럼 말라붙었고 심장은 터질 듯이 요동쳤지만,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그는 수십 명의 환호와 박수갈채 속에 홀로 고립된 섬처럼 서 있었다. 우진이 계획한 이 '화려한 공개 처형'은 소리 없이 잔인했다. 우진은 민기의 입에 '거짓된 칭찬'이라는 재갈을 물리며, 그가 평생 우진의 업적을 부정하지 못하도록 결박해 버렸다.

민기는 깨달았다. 자신이 통제하고 괴롭혔던 존재는 평범한 대학생이 아니었다. 그는 이미 정우진이라는 거대한 괴물의 위 속으로 빨려 들어갔으며, 서서히 소화되어 사라질 운명이었다. 우진은 정해진 순서대로 트로피를 거머쥐며 빛의 계단을 걸어 올라갔고, 민기는 그 눈부신 빛 아래에서 서서히 풍화되어 가는 박제된 패배자가 되어갔다. 장내를 가득 채운 박수 소리는 민기에게 있어 자신의 장례식에서 울려 퍼지는 조종과도 같았다.


최우수 발표 상금으로 마련된 저녁 회식 자리는 그야말로 열광의 도가니였다. 회사 인근의 이름난 고깃집은 왁자지껄한 소란으로 가득 찼다. 불판 위에서 고기가 익어가는 지글거리는 소리, 차가운 맥주잔이 부딪치며 내는 청명한 타격음, 그리고 끊이지 않는 웃음소리가 뒤섞여 활기찬 불협화음을 만들어냈다.

사람들은 이미 우진의 인턴 합격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정우진 씨, 아니 정 사원! 미리 축하해!”라는 말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우진은 그 모든 축하의 중심에 서서,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미소로 화답하며 분위기를 주도했다. 그 완벽한 사교적 태도는 보는 이로 하여금 그가 이미 이 조직의 일원임을 확신하게 했다.

하지만 그 화려한 조명 아래, 민기는 철저히 소외되어 있었다. 그는 마치 투명 인간이라도 된 듯 테이블 구석에 앉아 독한 소주를 연거푸 들이켰다. 그의 땀에 젖은 얼굴은 숯불 열기 때문인지, 아니면 수치심 때문인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회식이 막바지에 다다를 무렵, 민기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우진에게 다가갔다. 술기운을 빌리지 않고서는 도저히 그를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민기의 눈은 초점이 풀려 흐릿했고, 우진의 어깨를 붙잡은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가 따지러 온 것인지, 아니면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챙기러 온 것인지 알 수 없는 기괴한 형국이었다.

“우진 씨… 오늘 그 발표 자료… 그거…”

“아, 선배님! 오셨습니까?”

우진은 망설임 없이, 맑은 눈빛으로 답했다.

“선배님 덕분에 제가 이렇게 큰 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선배님의 날카로운 조언들이 아니었다면 제 생각은 그저 머릿속에만 머물렀을 겁니다.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우진의 말은 겉으로는 정중했지만, 민기에게는 가슴을 찌르는 송곳 같았다. 그는 우진의 흔들림 없는 눈빛에서 낯선 감정을 느꼈다. 이길 수 없는 상대임을 깨달은 민기의 자존심은 무너졌다.

“아… 그래요… 네… 그동안 고생 많았어요. 제가… 제가 좀 잘 못 챙겨준 것 같아서,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우진 씨.”

민기는 고개를 푹 숙이며 말을 흐렸다. 평소의 오만한 대리 정민기는 온데간데없었다. 그는 자신의 추악한 시기와 질투를 '미안함'이라는 비겁한 단어로 포장하며 사실상의 굴복을 선언했다. 우진의 발치 아래 엎드려 자비를 구하는 패배자의 비굴한 뒷모습이었다.

“아닙니다, 선배님. 아! 그리고 이건 선배님께만 조용히 말씀드리는 건데… 다른 분들께는 아직 비밀입니다.”

우진은 민기에게 다가가 자신의 스마트폰 화면을 보여주었다. 낮은 목소리는 비밀스러웠고 충격적이었다. 민기는 홀린 듯 우진의 휴대폰 화면을 보았다.

“저희, 이번주부터 사귀기로 했습니다.”

민기의 숨이 순간적으로 멎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화면 속에는 환하게 웃고 있는 두 남녀가 있었다. 우진의 볼에 입을 맞추며,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한 표정으로 우진의 품에 안겨 있는 그녀의 모습은 민기가 꿈속에서조차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눈부신 생기였다.

민기의 머릿속에서 거대한 성벽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업무적인 자존심보다 훨씬 더 원색적이고 고통스러운 상실이었다. 자신이 그토록 혐오했던 남자에게, 자신이 그토록 갈망했던 여자가 안겨 있었다. 우진은 민기의 사회적 위치뿐만 아니라, 그가 현실의 고단함을 견디게 해주던 유일한 환상과 연모의 대상까지 완전히 짓밟아 으깨버렸다.


사진 속의 여자는 민아였다.


민기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입을 벌린 채 굳어버린 그의 모습은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허울 같았다. 우진은 그런 민기를 보며 아주 짧게, 하지만 잔인할 정도로 아름답게 입꼬리를 올렸다.

우진은 친절하게 민기의 어깨를 토닥여준 뒤, 다시 동료들의 환호성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민기는 시끌벅적한 고깃집 한복판에서 홀로 얼어붙어 있었다. 자신의 모든 것이 털리고, 찢기고, 결국에는 거대한 괴물의 위 속에서 천천히 소화되고 있음을 깨달은 패배자의 눈에는 이제 아무런 빛도 남아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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