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바꼭질 : 보통의 인간에 대하여(2)

제2장. 부메랑의 법칙

by 국회의원

제2장. 부메랑 법칙

어느덧 봄기운이 완연해진 오후였다. 대기 중에는 겨울의 서슬 퍼런 냉기를 밀어낸 미지근한 온기가 감돌았지만, 그 포근함은 왠지 모를 이물감을 주었다. 담벼락 너머로 고개를 내민 노란 개나리들은 마치 누군가의 시선을 대신하듯 일제히 한 방향을 향해 피어나 있었다.

하늘은 지나치게 청명해서 오히려 비현실적인 푸른빛을 띠었고, 그 위로 쏟아지는 눈부신 햇살은 비좁은 골목길의 음영을 가차 없이 지워나갔다. 강렬한 빛줄기는 그늘진 구석에 숨겨져 있던 해묵은 먼지들까지 금빛 가루처럼 반짝이게 만들었으나, 그것은 축복이라기보다 치부를 낱낱이 파헤치는 노골적인 조명에 가까웠다.


열네 살의 우진은 초등학교 시절을 함께 보낸 대여섯 명의 친구와 함께 나란히 걷고 있었다. 이제 막 소년의 흔적을 지우고 빳빳하고 어색한 중학교 교복을 걸친 청소년들의 어깨 위에는 기대감과 두려움이 교차하는 미묘한 공기가 감돌았다.

"야, 우리 진짜 중학생이냐?"

누군가 던진 짤막한 한마디에 친구들의 긴장된 숨소리가 '휴, 휴' 하고 짧게 터져 나왔다. 강당으로 향하는 길목, 길들여지지 않은 낡은 운동화 밑창이 딱딱한 우레탄 바닥을 신경질적으로 긁어댔다. 그 거친 마찰음은 강당 입구의 높은 천장을 타고 넘실대며, 신입생들의 웅성거림과 섞여 묘하게 활기차면서도 위압적인 소음을 만들어냈다.

우진이 육중한 강당 문을 열고 발을 내딛는 순간, 공기의 흐름이 미세하게 변했다. 수백 명의 신입생이 내뿜는 열기와 땀 냄새, 그리고 새 건물 특유의 매캐한 페인트 향이 뒤섞인 강당 안에서 우진은 단연 이질적인 존재였다. 아직 성장이 채 끝나지 않은 또래들 사이에서 우진의 훤칠한 키와 곧게 뻗은 어깨선은 독보적이었다. 날렵하게 뻗은 콧날과 짙은 눈썹, 그리고 묘하게 차가운 분위기를 풍기는 수려한 외모는 칙칙한 감색 교복 무리 속에서 마치 홀로 조명을 받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등장은 곧바로 강당 뒤편에 팔짱을 끼고 서 있던 선배들의 시선을 낚아챘다. 삐딱하게 교복 단추를 풀어헤치고 구석진 자리를 점령한 학교 내 일진 무리의 눈빛이 번뜩였다. 그들에게 우진은 단순한 신입생이 아니었다. 그는 조직의 무게감을 더해주고, 타 학교와의 기 싸움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게 해줄 '상징적인 트로피'와도 같은 존재였다. 그들은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며 우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고, 우진의 일거수일투족을 마치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집요하게 훑어 내렸다.


입학식이 진행되는 내내 강당은 기묘한 긴장감에 휩싸였다. 교장 선생님의 훈화 말씀은 아이들의 귓가를 스쳐 지나갔을 뿐, 실질적인 질서는 강당 가장자리를 에워싼 선배들의 시선에 의해 재편되고 있었다. 3학년 우두머리들을 필두로 한 2학년 행동대장들은 새로운 '전력'을 보충하기 위해 그 어느 때보다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들의 포섭 작전은 치밀하고 단계적이었다. 1차적으로는 이미 인근 초등학교 시절부터 이름깨나 날렸던, 소위 '노는 애들'이라 불리는 '인사'들을 골라냈다. 그들의 명단은 이미 입학 전부터 선배들의 단톡방을 통해 공유된 상태였다.

이어지는 2차 물색은 현장에서 즉석으로 이루어졌다. 선배들은 매의 눈으로 신입생들의 외형에서 풍기는 분위기를 분석했다. 반항기가 서린 눈빛, 유난히 큰 덩치의 압도적인 위압감을 주는 외모가 그 기준이었다.

"저 새끼 물건인데?"

한 선배가 툭 던진 말과 함께 일진 무리의 시선이 다시 한번 우진에게 꽂혔다. 우진은 자신을 향한 그 노골적인 시선을 느끼면서도 아무런 동요 없이 정면만을 응시했다. 하지만 그의 운동화 끝이 바닥을 미세하게 두드리는 소리는, 다가올 학교생활이 결코 평탄치 않을 것임을 예고하는 불길한 박자처럼 들려왔다. 강당 안의 소음은 점점 커졌고, 그 시끄러운 활기 밑바닥에는 서열이라는 차가운 칼날이 서서히 날을 세우고 있었다.

우진의 경우는 앞서 언급된 두 가지 범주 중 어느 것에도 해당되지 않았다. 그는 이미 이름이 알려진 '네임드'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대놓고 험악한 인상을 풍기는 '부류'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존재감은 기묘한 방식으로 선배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주변의 소란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한 무심한 표정은 그의 독특한 분위기를 더욱 강조했다. 그것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대상에 대한 호기심인 동시에, 본능적인 위협을 마주한 자들이 느끼는 긴장감이었다."

"야, 너 주먹 좀 치냐?"

낮고 거친 음성이 공기를 가르며 날아와 박혔다. 인근 중학교에서 올라와 이미 지역 내에서 악명이 자자했던 2학년의 실세, 주영이었다. 그는 삐딱한 자세로 걸어와 우진의 앞을 턱 하니 가로막았다. 주영의 눈동자에는 새로운 먹잇감을 발견한 흥분과 함께, 자신보다 한 뼘은 더 큰 우진의 키를 올려다봐야 한다는 사실에서 오는 미묘하고도 비릿한 불쾌감이 뒤섞여 있었다. 그는 우진의 어깨를 툭 치며 위협적인 거리를 유지했다. 그의 표정은 명백히 도발적이었다.

"관심 없습니다."

우진의 대답은 찰나의 망설임조차 없었다. 목소리는 낮고 평온했으며, 흔한 긴장감으로 인한 떨림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감정의 기복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그 무표정한 얼굴은 주영의 도발을 마치 하찮은 파리의 윙윙거림 정도로 치부하는 듯했다. 그 담담한 태도는 오히려 주변의 온도를 순식간에 영하로 떨어뜨리는 기묘한 힘을 발휘했다. 마치 견고한 얼음 벽처럼 주영의 공격을 막아냈다.

"이 새끼가 진짜 미쳤나…. 이름이, 어디 보자, 정우진? 야, 너 지금 내가 누군지 알고 이딴 식으로 씨부리는 거냐?"

주영의 안색이 순식간에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수많은 신입생이 지켜보는 가운데 무시당했다는 수치심이 그를 집어삼켰다. 주영은 독이 오를 대로 오른 살기등등한 눈빛으로 우진을 뚫어질 듯 노려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의 손등에 핏줄이 불거져 나왔고, 입술은 비틀렸다. 당장이라도 우진의 얼굴을 짓뭉개버릴 것 같은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강당 한복판을 지배했고, 주변에 서 있던 신입생들은 마른침을 삼키며 숨을 죽였다. 강당 안의 소음은 잦아들고 오직 주영의 거친 숨소리만이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뭔데 이렇게 시끄러워?"

그때였다. 웅성거리는 인파를 헤치고 강당 반대편 끝에서 거구의 그림자가 천천히 다가왔다. 족히 180cm는 훌쩍 넘어 보이는 압도적인 체격, 여유로운 걸음걸이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은 앞선 주영의 그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의 가슴팍에 달린 흰색 이름표는 그가 이 학교의 최고 학년인 3학년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기세등등하던 주영이 그 인물을 발견하자마자 눈에 띄게 비굴한 웃음을 지으며 허리를 굽혔다. 그 쩔쩔매는 꼴만 보아도 새로 나타난 인물이 3학년 일진 중에서도 최정점에 서 있는 '탑 티어'급 실세라는 것을 누구나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느릿하게 걸어와 우진과 주영 사이에 섰다.

"어이 신입생, 지금 너한테 선택권 같은 게 있다고 착각하는 모양인데."

배지훈이라는 이름의 3학년 선배는 주영의 어깨에 팔을 툭 걸치며 우진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마치 발밑의 하찮은 벌레를 내려다보는 듯한 오만함이 가득 담긴 시선이었다. 그는 우진의 수려한 얼굴을 조롱하듯 훑어내리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권위와 무시가 동시에 담겨 있었다.

"..."

우진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겁에 질린 기색도, 그렇다고 분노를 표출하지도 않은 채 그저 지훈의 눈을 빤히 마주 볼 뿐이었다. 그것은 굴복하지 않겠다는 무언의 저항이었고, 지훈에게는 생전 처음 겪어보는 불쾌한 도전이었다. 마치 강철 벽에 부딪힌 듯 그의 오만한 태도가 흔들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침묵이 길어지자 지훈이 픽 웃음을 터뜨리며 낮게 읊조렸다. 그의 목소리에는 분명한 경고가 담겨 있었다.

"난 지금까지 우리 제안 거절하고 이 학교에서 편하게 숨 쉬고 다니는 새끼,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거든. 여기는 네가 놀던 놀이터가 아니니까. 잘 생각하고 대답해라. 현명한 선택을 하는 게 네 신상에 좋을 거야."

협박 섞인 충고가 끝나는 것과 동시에, 굳게 닫혀 있던 강당 문 앞을 육중하게 지키고 서 있던 10여 명의 무리가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우진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거친 운동화 소리가 바닥을 울릴 때마다 신입생들의 공포 섞인 웅성거림은 썰물처럼 빠져나갔고, 강당 안은 일순간 기괴한 정적에 휩싸였다. 검은 무리의 파도가 우진을 겹겹이 에워쌌다. 그들의 표정은 굳어 있었고, 시선은 날카로웠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누가 봐도 우두머리임을 알 수 있는, 서늘하고 날카로운 인상의 3학년 선배가 우진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의 차가운 숨결이 닿을 듯한 거리에서 그의 눈빛은 맹수처럼 빛났다. 그는 우진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이유가 뭔데?”

리더로 보이는 선배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온 질문은 지극히 단순했다. 그러나 그 짧은 문장이 강당의 농밀한 공기를 가르고 나아가는 순간, 주변의 온도는 급격히 얼어붙었다. 그것은 단순한 궁금증이 아니라, 자신의 권위에 감히 균열을 낸 하찮은 존재를 향한 최종 선고 전의 확인 작업과도 같았다. 보선이 내뿜는 압도적인 위압감은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이 되어 학생들의 목덜미를 짓누르는 듯한 압박감을 드리웠다. 강당에 모인 수백 명의 눈동자가 약속이라도 한 듯 우진의 창백하리만치 무표정한 얼굴에 고정되었다. 침묵은 날카로운 면도날처럼 예리하게 날을 세우고 있었다.

“공부해야 합니다.”

우진의 입에서 흘러나온 대답은 짧았고, 지나칠 정도로 건조했다. 비유도, 수식도 없는 그 명료한 문장은 마치 고요한 호수에 떨어진 육중한 바위처럼 주변의 모든 이들을 경악 속에 빠뜨렸다. 3학년 짱, 채보선. 그는 자신의 눈 밖에 나는 자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짓밟아버리는, 이 지역 일대에서 ‘괴물’이라 불리며 악명을 떨치던 인물이었다. 그런 보선의 서슬 퍼런 칼날 앞에서 ‘공부’라는 단어를 입에 올린 것은, 누군가에게는 용기일지 모르나 이곳의 생태계를 아는 이들에게는 제 발로 무덤을 파는 미친 짓에 불과했다. 앞서 우진을 몰아세우던 주영과 지훈조차 예상치 못한 답변에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서로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허, 이 새끼 봐라? 진짜 골 때리는 새끼네.”

보선의 입가에 비틀린 실소가 번졌다. 어이가 없어서 터져 나온 웃음이었지만, 그 웃음 뒤에 숨겨진 서늘한 살기는 더욱 짙어졌다. 그는 우진에게 한 걸음 더 다가서며 으르렁대듯 물었다.

“너, 이름이 뭐야?”

“정우진입니다.”

우진은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보선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냈다. 보선은 우진의 얼굴을 마치 해부라도 하듯 빤히 뜯어보기 시작했다. 날렵한 콧날, 무심한 듯 깊은 눈매, 그리고 묘하게 익숙한 분위기. 보선의 눈동자가 무언가 번뜩이는 기억을 포착한 듯 크게 일렁였다. 확신에 찬 표정이 그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어…? 너, 설마 수정 쌤 아들… 정우진 맞지?”

보선의 입에서 나온 의외의 이름에 우진의 짙은 눈썹이 아주 미세하게 경련하듯 떨렸다. 철옹성 같던 우진의 표정에 처음으로 작은 균열이 생긴 순간이었다.


보선에게 초등학교 시절은 온통 잿빛이었다. 그는 교사들 사이에서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자, 교실의 질서를 파괴하는 암적인 존재였다. 열 살 소년이 감당하기엔 너무나 가혹했던 부모님의 이혼은 그의 세상을 단숨에 무너뜨렸고, 보선은 그 무너진 세상의 파편들을 주워 모아 분노라는 무기를 만들었다. 틈만 나면 동급생들에게 주먹을 휘둘러 교무실 문턱이 닳도록 불려 다녔고, 화장실 구석에서 몰래 뿜어내던 매캐한 담배 연기는 세상의 따가운 시선에 대항하는 그만의 유일한 도피처이자 반항의 깃발이었다. 모든 선생이 그를 보며 “부모가 저 모양이니 애도 저 꼴이지”라며 노골적인 멸시를 보낼 때, 오직 한 사람, 우진의 어머니인 이수정 선생님만은 그를 다르게 보았다.

수정은 보선이 두껍게 두른 거칠고 가시 돋친 껍데기 아래, 상처 입어 웅크리고 있는 어린아이의 지독한 외로움을 읽어냈다. 그녀는 징계 서류 대신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코코아를 내밀었고, 날 선 훈계 대신 거칠게 갈라진 보선의 투박한 손을 가만히 맞잡아주었다.

“보선아, 선생님은 믿어. 너의 그 힘은 남을 아프게 하는 게 아니라, 나중에 너보다 약하고 괴롭힘당하는 사람들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데 쓰일 거라는걸. 네가 장래 희망 칸에 꾹꾹 눌러 쓴 ‘경찰’이라는 글자 말이야. 선생님은 네 눈 안에서 그 눈부신 가능성을 분명히 봤단다.”

살을 에듯 시린 칼바람이 불던 어느 겨울날이었다. 낡고 얇은 플리스 한 장으로 겨우 추위를 견디며 떨고 있던 보선에게, 수정은 아무런 대가 없이 새 겨울 점퍼를 입혀주었다. 혹여나 아이가 끼니를 걸러 배를 곯을까 걱정된 그녀는 퇴근길에 보선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 갓 지은 하얀 쌀밥에 고기반찬을 먹이기도 했다. 보선이 우진을 처음 마주했던 장소도 바로 그 따스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찌개 냄새 가득한 집 안 식탁에서였다. 당시 보선은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물건이라도 든 듯 어색하게 숟가락을 쥔 채, 우진의 시선을 피하며 꾸역꾸역 밥을 밀어 넣고 있었다. 그때 보선의 눈에 서려 있던 것은 일진의 광기가 아니라, 어른의 온기에 당황해 어찌할 바를 모르던 소년의 순수한 서글픔이었다.


"네, 맞습니다."

우진의 목소리가 강당을 가득 채운 무거운 적막을 깼다. 그 짧은 긍정의 대답은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처럼 날카로운 긴장감을 만들어냈다. 우진은 흐릿한 어린 시절 기억 속의 파편들을 하나로 맞춰내듯, 보선의 깊고 복잡한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보선의 얼굴에는 스쳐 지나가는 바람처럼 찰나의 묘한 일렁임이 지나갔다. 그것은 과거의 기억이 현재의 냉혹한 현실과 충돌하며 만들어내는 미세한 동요였다.

보선은 더 이상 지체하지 않았다. 그는 곧바로 몸을 돌려, 자신을 중심으로 거대한 검은 소용돌이처럼 서른 명 남짓 에워싸고 있던 무리를 향해 벼락같은 고함을 질렀다. 그의 목소리에는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절대적인 권위가 담겨 있었다.

"야, 이 새끼들아! 앞으로 정우진, 얘는 절대 건드리지 마라! 정우진 건드리다가 내 눈에 띄는 새끼는 그 자리에서 뒤지는 거다, 알았어?!"

태산 중학교의 하늘을 지배하는 절대 권력, 채보선의 선언은 거스를 수 없는 칙령과도 같았다. 그의 말에 일진 무리는 잠시 술렁였지만, 누구 하나 감히 그 명령에 토를 달거나 반기를 들지 못했다. 그렇게 우진은 일진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하게도 학교 짱의 전폭적인 보호를 받는다는, 학교 역사상 전무후무하고 기묘한 존재가 되었다.


이후 우진의 학교생활은 다른 신입생들과는 완전히 다른 궤적으로 흘러갔다. 만화 주인공을 연상시키는 비현실적인 외모는 이미 학생들 사이에서 유명했고, 전교 상위권을 놓치지 않는 비상한 두뇌, 그리고 결정적으로 '학교 짱의 비호'라는 강력한 배경은 우진을 누구도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유리 성벽 안의 존재로 격상시켰다. 그는 의도치 않게, 일진들을 통제하는 ‘보이지 않는 실세’가 되어버렸다.

기이한 역학 관계는 학교 곳곳에서 드러났다. 2학년, 3학년 일진들은 우진의 심기를 거스를까 봐 눈치를 보며 학생 식당 점심시간의 새치기를 멈췄고, 그들이 누리던 온갖 부당한 특권은 자연스럽게 우진에게 이양되었다. 아침 등교 시간, 삼엄하던 복장 검사에서 우진은 언제나 예외였고, 수업 시간 중 교묘하게 양호실 침대에 누워 단잠을 자는 것조차 그에게만 허용된 불문율의 권리처럼 여겨졌다.

그러던 어느 날, 우진과 같은 반인 이준희가 교실로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그의 얼굴은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고,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그는 다급한 얼굴로 우진의 책상 앞으로 다가와 애원하듯 속삭였다.

"우진아, 진짜 한 번만 살려줘라. 이번 국어 수행평가 점수 미달 나면 마동석한테 진짜 죽어. 그 인간 성격 너도 알잖아, 어? 제발."

새로 부임한 국어 교사, 대홍은 험악하고 압도적인 인상에, 한 번 불이 붙으면 앞뒤 가리지 않는 불같은 성미를 가져 학교 내 이름난 일진들이 유일하게 공포를 느끼는 대상이었다. 준희는 이미 공포에 질려 파랗게 질린 얼굴로 우진을 바라봤고, 그 처절한 몸부림이 측은하게 느껴졌다. 우진은 잠시 망설이다 무심한 표정으로 자신의 국어 노트를 준희에게 건넸다.

"그래, 여기. 가져가."

우진은 어차피 공부와는 영원히 담을 쌓을 것 같은 준희가 자신의 노트를 베껴 쓴다고 한들 얼마나 제대로 된 결과가 나오겠나 싶었지만, 눈앞의 매를 피하려는 그 간절한 몸부림이 가여워 선뜻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며칠 후, 2층 복도 커다란 칠판에 국어 수행평가 점수가 빼곡하게 고지되었다. 점수를 확인하기 위해 몰려든 학생들 사이로 순간 기이한 침묵이 흘렀고, 이내 이해할 수 없다는 비명과 웅성거림이 터져 나왔다.

[이준희 : A / 정우진 : D]

충격적인 결과였다. 우진의 정교하고 완벽하게 정리된 필기 노트를 대충 베껴 쓴 준희가 최고 등급인 A를 받았고, 그 노트의 원작자이자 전교권 학생인 우진이 최하점인 D를 받은 것이다. 멍하니 점수표를 올려다보는 우진의 뒤로, 믿을 수 없는 결과에 얼떨떨해하던 준희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다가왔다.

"우진아... 이거, 뭔가 단단히 잘못된 거 같은데?"

주변 친구들의 수군거림과 시선이 모두 우진에게 쏠렸다. 정작 황당한 점수를 확인한 우진의 눈동자에는 흔한 당혹감이나 분노 대신, 알 수 없는 기묘한 빛이 서리기 시작했다. 그의 입가에는 미세한 조소가 걸린 듯했다.

"신경 쓰지 마. 됐어."

우진이 짧게 답하며 돌아섰지만, 교무실 쪽을 향하는 그의 시선은 방금 전까지의 무심함과는 다르게, 마치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단순한 해프닝으로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우진은 곧장 본관 2층 교무실로 향했다. 복도 끝에서부터 이미 대홍의 포효에 가까운 고함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교무실 안은 흡사 수용소 같았다. 복장 불량이나 사소한 잘못으로 불려 온 학생들이 마동석이라 불리는 대홍 앞에 줄지어 서서 벌벌 떨고 있었다.
“야 이 새끼야, 너는 대가리 꼬라지가 이게 뭐냐? 학교가 네 안방이야?”
한 손에는 시퍼런 날이 번뜩이는 바리깡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체념한 학생의 머리채를 움켜쥔 대홍이 광기 어린 눈을 빛냈다. 징징거리는 기계음과 함께 머리카락이 눈송이처럼 바닥으로 떨어졌다. 교무실이 마치 본인 혼자만의 사냥터인 양 큰소리를 치는 대홍을, 우진은 문 앞에 서서 소리 없이 지켜보았다. 폭력적인 행위가 끝나고 억울한 학생이 울음을 터뜨리며 나갈 때까지 우진은 동요하지 않았다.

“정우진이, 무슨 볼일이냐?”
학생의 머리를 사정없이 밀어버린 뒤, 입가에 사악한 웃음을 머금은 대홍이 우진을 향해 물었다. 바리깡을 내려놓는 그의 손등에 솟은 핏줄이 위협적이었다.

“제 수행평가 점수가 잘못 채점된 것 같아서 왔습니다.”
표정의 변화 없이 차분하게 뱉는 우진의 말에 대홍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너 그거, 이준희 거 베낀 거 아니야? 문장 구성이나 핵심 내용이 거의 판박이던데.”
“왜 제가 베꼈다고 단정하시는 거죠? 평소 성적이나 과제의 완성도로 보나 준희가 제 노트를 베꼈다고 보는 게 더 합리적일 텐데요?”

우진의 논리적인 반박에 대홍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베꼈든, 베끼게 해줬든 둘 다 부정행위고 감점 사유야! 토 달지 말고 교실로 돌아가!”
대홍은 다짜고짜 화를 내며 우진의 등을 떠밀었다. 대화가 길어질수록 자신의 억지가 드러날 것을 직감한 듯한 조급한 몸짓이었다.
“부정행위가 감점 사유라면 저와 준희의 점수가 동일해야 합니다. 그런데 왜 준희는 A이고 저는 D입니까?”

“아, 이 새끼가 진짜!”
참다못한 대홍이 우진의 양 어깨를 억센 힘으로 짓눌렀다. 뼈가 으스러질 듯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우진은 신음조차 내지 않고 대홍의 눈을 응시했다. 대홍은 우진을 교무실 밖으로 거칠게 끌어낸 뒤, 주변 선생들이 듣지 못하도록 우진의 귓가에 얼굴을 밀착했다. 비릿한 담배 냄새와 함께 저주 섞인 속삭임이 새어 나왔다.

“내가 너 같은 부류 잘 알거든. 겉으로는 일진 놈들이랑 다른 척 고고하게 굴지만, 내가 근래 자세히 보니까 넌 그 쓰레기들보다 더 질이 나빠. 뒤에서 애들 조종하면서 호박씨 까는 놈들이 내가 제일 혐오하는 부류다. 점수 잘 받고 싶었으면 애초에 처신을 잘했어야지, 새끼야.”

열네 살 중학생을 향해 쏟아내는 말 치고는 너무나 비열하고 논리가 결여된 오물 같은 언사였다. 우진은 대홍의 눈 속에 서린 비뚤어진 열등감을 읽어냈다. 더 이상의 대화는 벽을 보고 소리치는 것과 다름없는 에너지 낭비였다.
“네, 잘 알겠습니다.”
우진은 짧은 대답을 끝으로 미련 없이 발길을 돌렸다.


그로부터 며칠 뒤, 주말의 공기는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우진은 외할아버지의 제사를 위해 부모님과 함께 대구 외가댁을 찾았다. 제사는 엄숙했다. 병풍 뒤에서 피어오르는 향연기가 거실 천장을 유영하듯 맴돌았고, 어른들의 낮은 읊조림과 절을 할 때마다 들리는 옷깃 스치는 소리만이 정적을 메웠다. 우진은 그 정제된 소음 속에 몸을 맡긴 채, 며칠 전 학교에서 겪었던 수치스러운 기억을 잠시 덮어두려 애썼다.

오후가 되자 모든 절차가 마무리되었다.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인 어머니의 형제들은 긴장을 풀고 남은 시간을 함께 보내기로 했다. 누군가 팔공산 자락에 경치가 빼어난 카페가 생겼다는 말을 꺼냈고, 대가족의 이동이 시작되었다. 우진과 사촌 형제들도 어른들의 들뜬 기색에 이끌려 가벼운 발걸음으로 차에 올라탔다.

산기슭을 따라 굽이굽이 이어지는 도로는 주말의 여유를 만끽하려는 나들이객들의 차량으로 빈틈없이 메워져 있었다. 차는 거북이걸음으로 산을 올랐다. 우진은 뒷좌석 창가에 머리를 기댄 채, 창밖으로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초여름의 녹음을 무심하게 응시했다. 울창한 나무들 사이로 낡은 백숙집과 세련된 대형 카페, 그리고 화려한 조명과 원색의 간판을 내건 숙박업소들이 기괴한 조화를 이루며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목적지에 거의 다다랐을 즈음, 서행하던 차창 밖으로 낯익은 실루엣 하나가 우진의 망막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우진은 본능적으로 숨을 멈췄다.

그곳에는 결코 잊을 수 없는, 보통 사람의 범주를 한참이나 벗어난 거대한 체구가 서 있었다. 꽉 끼는 반소매 티셔츠 위로 불거진 위협적인 근육, 그리고 자로 댄 듯 한치의 오차도 없이 각진 스포츠머리. 영락없는 대홍이었다. 교무실에서 바리깡을 들고 광기를 내뿜던 그 야만적인 뒷모습이 팔공산의 한적한 도로변에 서 있었다.

우진의 눈이 가늘게 떨렸다. 하지만 우진을 더욱 경악하게 한 것은 그의 곁에 바짝 밀착해 서 있는 여자의 존재였다. 그녀는 단아하고 차분한 성품으로 학생들 사이에서 '천사'라고 불리던 미술 교사, 장희진이었다. 학교에서 늘 정갈한 셔츠와 긴 치마 차림으로 격식을 갖췄던 그녀는 온데간데없었다. 대홍의 굵은 팔뚝에 자연스럽게 팔짱을 낀 채, 수줍은 듯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그녀의 모습은 영락없이 사랑에 빠진 연인의 얼굴이었다.

두 사람은 각자의 가정이 있는 이들이었다. 학교라는 거대한 연극무대 위에서 한 명은 엄격한 도덕의 수호자로, 한 명은 우아한 예술가로 분장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들의 가식적인 가면이 팔공산의 뜨거운 햇살 아래 속절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무엇보다 우진의 시선을 차갑게 고정시킨 것은 그들이 서 있는 장소였다. 화려한 대리석 외벽과 불투명한 커튼으로 내부를 철저히 가린 ‘무인텔’의 입구. 그들이 방금 막 도착해 차에서 내린 것인지, 아니면 은밀한 탐닉을 끝마치고 나오는 길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대낮의 환한 태양 아래, 두 남녀가 나란히 그 은밀한 공간의 경계에 발을 들이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 어떤 변명도 허용하지 않는 명백한 진실을 가리키고 있었다.

차는 무심하게 속도를 높여 그들을 지나쳐 갔지만, 우진의 머릿속에는 방금 본 장면이 고해상도 사진처럼 선명한 잔상으로 각인되었다. 불과 며칠 전, 교무실의 매캐한 공기 속에서 자신을 향해 ‘버러지’니 ‘쓰레기’니 하며 가래 섞인 훈계를 늘어놓던 대홍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귓가를 맴돌았다.

“점수를 잘 받고 싶었으면 애초에 처신을 잘했어야지, 새끼야. 너 같은 놈들은 근본부터가 글러 먹었어.”

우진의 어깨를 으스러뜨릴 듯 짓누르던 그 오만한 손길, 비릿한 담배 냄새와 함께 쏟아내던 저주 섞인 충고들. 타인의 사소한 실수는 범죄 취급하며 바리깡을 휘두르던 그 서슬 퍼런 도덕적 잣대가, 정작 본인의 추악한 욕망 앞에서는 얼마나 무력하게 휘어져 있었는가. 우진의 입가에 아주 미세하고도 서늘한 미소가 번졌다. 그것은 분노라기보다, 완벽한 사냥감을 포착한 포식자의 서늘한 유열에 가까웠다. 대홍이 그토록 강조하던 '올바른 생활'과 '도덕적 처신'. 우진은 이제 그 대가가 무엇인지, 위선의 대성당이 무너질 때 어떤 비명소리가 나는지 아주 잔인하고도 확실한 방법으로 가르쳐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우진은 주머니 속에서 차갑게 식어 있는 스마트폰을 천천히 만지작거렸다. 손끝에 닿는 매끄러운 액정 화면이 마치 날이 잘 선 칼날처럼 느껴졌다. 숲을 흔드는 바람 소리 사이로, 우진의 낮은 혼잣말이 차 안의 소음에 섞여 들어갔다.

‘처신을 잘하셨어야죠, 선생님.’

우진의 시선은 백미러 너머로 멀어지는 무인텔의 화려한 간판을 끝까지 놓지 않았다. 이제 주도권은 완전히 뒤바뀌어 있었다.


계절은 어느덧 초여름의 입구에 다다랐다. 교실 천장에서 덜컹거리며 돌아가는 낡은 선풍기는 미지근한 바람을 뿜어냈지만, 기말고사를 앞둔 교실의 열기를 식히기엔 역부족이었다. 평소라면 시험지를 받자마자 책상에 침을 흘리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을 교실 뒷좌석의 일진들. 하지만 오늘의 그들은 평소와 사뭇 달랐다.

그들의 눈동자에는 나른한 권태 대신, 묘하게 번들거리는 장난기와 팽팽한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마치 거대한 폭죽의 도화선에 불을 붙이기 직전의 아이들처럼, 그들은 서로 의미심장한 시선을 주고받으며 낄낄거렸다. 감독관이 시험지를 배부하자, 평소라면 ‘드르렁’ 소리가 났어야 할 교실엔 오직 사각거리는 펜 소리만이 감돌았다. 일진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객관식 문제는 대충 찍어 넘기면서도 맨 뒷장의 서술형 답안지 앞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표정으로 펜을 고쳐 잡았다. 마치 성경을 필사하는 수도승처럼, 그들은 한 자 한 자 공들여 문장을 채워 내려갔다.


그날 오후, 채점실은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에어컨 냉기가 가득한 실내였지만, 국어과 교사들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혔다.
“이… 이게 뭐야…?”
한 교사가 경악 섞인 목소리로 답안지를 떨어뜨렸다. 채점하던 교사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그들의 눈앞에 놓인 것은 시험 답안지가 아니라, 한 편의 정교한 폭로장이었다. 한 명도 아니고, 이른바 ‘노는 무리’라고 불리는 학생들 대여섯 명의 답안지에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국어 고대홍 선생님과 미술 장희진 선생님은 불륜이다. 경북 모 지역 무인텔 앞에서 다수의 목격자에 의해 발각되었으며, 이런 반사회적 행위를 일삼는 부도덕한 자에게 교육받는 것은 학생으로서 부당하다. 학교는 즉각 해당 사항을 조사하고 조치를 취해라.]

정갈하게 쓰인 문장들은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교사들의 눈을 찔렀다. 성적 따위는 태생부터 포기했던 자들의 무모한 반란. 단 한 명의 객기였다면 ‘정신 나간 놈의 헛소리’로 치부했겠지만, 조직적으로 쏟아져 나온 동일한 진술 앞에서 학교의 권위는 휴지조각처럼 구겨졌다.

교무실의 공기는 순식간에 영하로 얼어붙었다. 소문은 빛보다 빨랐다. 학생들의 단톡방은 이미 불이 났고, 소식을 접한 학부모들의 항의 전화가 교무실 전화기를 쉴 새 없이 울려댔다.

몇일 전 까지만 해도 교도관처럼 당당하게 바리깡을 휘두르며 학생들의 머리칼과 인격을 유린하던 고대홍. 그의 위풍당당하던 기세는 온데간데없었다. 계약직이라는 불안정한 신분은 그에게 소명할 시간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재단 측은 사태가 커지기 전 꼬리를 자르기로 결정했다.

“짐 싸게. 당장.”
교감의 냉정한 한마디에 대홍의 얼굴은 흙빛으로 변했다.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우진의 어깨를 으스러뜨릴 듯 짓누르던 그 단단한 손은, 이제 자신의 낡은 서류 가방을 챙기며 볼품없이 떨리고 있었다. 복도를 지나가는 그의 등 뒤로 학생들의 비웃음 섞인 수군거림이 화살처럼 박혔다.

폭풍이 휩쓸고 간 방과 후, 텅 빈 교실엔 우진만이 홀로 앉아 있었다. 창밖으로 운동장을 가로질러 도망치듯 학교를 떠나는 대홍의 뒷모습이 보였다. 우진은 그 광경을 마치 잘 만들어진 다큐멘터리를 감상하듯 무표정하게 지켜보았다.


며칠 전, 우진이 준희와 일진들을 은밀히 불러 모았던 옥상에서의 대화가 머릿속을 스쳤다.

“마동석 때문에 학교 다니기 피곤하지? 툭하면 때리고, 머리 밀고. 내가 아주 합법적으로, 그리고 확실하게 그 인간을 치울 방법을 아는데. 너희는 그냥 답안지에 내가 적어주는 대로 쓰기만 하면 돼. 성적? 어차피 너희 상관 없잖아. 대신 이건 ‘정의구현’이 되는 거지.”

모든 것은 우진의 설계대로였다. 그는 자신의 손에 단 한 방울의 피도 묻히지 않았다. 타인의 욕망과 분노를 이용해 거대한 괴물을 축출했다. 평소 남의 사생활을 캐내며 ‘호박씨 까는 놈들’이라며 우진을 경멸하던 대홍은, 정작 본인이 판 가장 저질스러운 함정에 빠져 파멸했다.


우진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어깨에 메었다. 그리고 대홍이 머물던 빈 교탁을 향해 아주 낮고 서늘하게 읊조렸다.

“점수를 잘 받으려면 애초에 생활을 잘했어야죠, 선생님. 당신이 가르친 수업에 그런 도덕은 없었나 봐요.”

학교를 빠져나오자마자 거센 비바람이 우진의 얼굴을 때렸다. 하지만 그는 인상을 찌푸리는 대신 눈을 감고 그 감각을 즐겼다. 교실 안의 퀴퀴한 먼지 냄새와 대홍의 비릿한 땀 냄새가 섞인 역겨운 공기와는 비교할 수 없는, 투명하고 시원한 공기였다.

우진은 폐부 깊숙이 그 공기를 들이마셨다.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기묘한 감각이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소름 돋게 퍼져 나갔다. 그것은 단순히 복수에 성공했다는 저급한 승리감이 아니었다. 상대의 가장 치명적인 급소를 정확히 꿰뚫어 보고, 치밀하게 짜인 체스판 위에서 말들을 움직여 체크메이트를 받아냈을 때의 희열이었다.

세상은 생각보다 쉽게 움직였다. 오직 정보와 근거, 그리고 인간의 취약성을 이용한 설계만이 완벽한 질서를 만들어냈다. 우진은 깨달았다. 자신에겐 이 세상을 통제할 재능이 있다는 것을. 빗물에 젖은 우진의 수려한 얼굴 위로, 차가운 미소가 번졌다. 이제 학교라는 작은 왕국에서 우진의 앞길을 가로막을 체스 말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우진의 진정한 통치는,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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