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바꼭질 : 보통의 인간에 대하여(6)

제6장. 부활자의 심판

by 국회의원

유정이 욕실로 들어가고 수증기 섞인 샤워기 소리가 거실의 정적을 채울 무렵이었다. 탁자 위에 무방비로 놓여 있던 그녀의 휴대폰이 ‘드르륵’ 하는 짧은 진동과 함께 어둠 속에서 푸르스름한 빛을 내뿜으며 화면을 밝혔다. 우진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액정 위로 떨어졌다. 잠금 화면 위로 떠오른 문장은 선명했다.

[오늘 덕분에 너무 행복했어]

발신자의 이름은 ‘서종엽’. 연애 시절부터 유정이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던, 능력 있고 사려 깊다던 바로 그 상사였다. 우진의 몇 가지 잔상이 스치던 찰나, 확인 사살이라도 하듯 두 번째 메시지가 도착했다.

[벌써 보고 싶다]

액정의 서늘한 푸른 빛이 우진의 무표정한 얼굴을 창백하게 비추었다. 샤워기 소리가 멈추고 유정이 밖으로 나왔을 때, 우진은 휴대폰을 원래의 각도와 위치에서 단 1mm의 오차도 없이 내려놓은 상태였다. 유정은 휴대폰을 확인하자마자 본능적으로 우진의 눈치를 살폈다. 찰나의 흔들림, 우진은 그 짧은 동공의 진동만으로도 유정의 내면이 이미 무너져 내렸음을 읽어내고 있었다.

“문자 계속 오던데, 회사 일 못 끝내고 온 거 아니야?”

우진은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어조로 유정에게 물었다.

“응 요즘 일이 너무 많아서…내일은 회의가 길어져서 오늘보다 좀 더 늦을 것 같아”

유정은 망설임 없이 거짓말을 내뱉었다. 우진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은 단순한 외도가 아니었다. 자신의 헌신과 유정의 기만이 만들어낸 치명적인 ‘불균형’이었다. 그리고 우진에게 불균형은 반드시 바로잡아야 할 오류였다.


군 제대 후 처음, 트라우마 속에 잠자고 있던 그의 머릿속이 다시 차갑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아이가 돌을 맞이할 무렵, 우진의 어머니는 교장직을 마지막으로 명예로운 정년퇴직을 하셨다. 우진은 어머니께 아이의 케어를 부탁하며, 1년간의 긴 공백을 깨고 복직했다.

복직 후 한 달이 지났다. 우진은 업계의 예상을 뒤엎고 갑작스럽게 사직서를 제출했다. 동료들은 최연소 파트장 후보인 그가 왜 퇴사하는지 의아해했지만, 우진의 목적지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유정의 회사였다.

이전 직장에서 쌓아온 우진의 압도적인 커리어와 독보적인 인맥은 그를 업계의 ‘핵심 인재’로 분류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는 회사 인사팀으로부터 동료들보다 훨씬 높은 연봉과 직급, 그리고 독자적인 권한을 보장받으며 이직했다.

최종 합격 통보를 받은 날 밤, 우진은 유정에게 마치 오늘의 날씨를 전하듯 무심하게 이 사실을 알렸다. 그동안 유정은 회식과 야근을 핑계로 밤 11시가 되어서야 귀가했고, 우진은 아이와 함께 잠드는 생활을 반복해 왔기에 두 사람 사이에는 대화할 물리적인 시간이 없었다.

“…뭐? 우리 회사로 이직한다고? 이렇게 중요한 걸 왜 나한테 미리 말 한마디 안 했어? 당신 제정신이야? 우리 회사로 오는 거면 당연히 나랑 상의했어야지!”

유정의 목소리에 당혹감이 서렸다. 경악을 넘어선 공포 같은 것이 그녀의 눈동자를 스쳤다.

“갑자기 잘 다니던 회사를 왜 그만둬? 회사에서 무슨 사고라도 쳤어? 아니면… 회사 여직원이랑 불륜 스캔들이라도 터진 거야?”

이직 소식을 들은 유정의 첫 반응은 경악이었고, 그 다음은 노골적인 짜증이었다. 그녀는 마치 자신의 금기된 영토를 침범당한 침입자를 보듯 우진을 쏘아붙였다. 우진은 폭풍우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고목처럼 무표정을 유지했다.

“아이가 생기고 경제적으로 좀 더 여유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너희 회사에서 좋은 조건으로 오퍼를 줬어. 사실 고민할 것도 없는 조건인데 너랑 사전에 의논하는 게 맞다 싶었는데 네가 평일에 워낙 바쁘고 주말에도 출근하니까 따로 말할 시간이 없었어.”

유정의 흥분이 한풀 꺾일 지점을 정확히 포착해 우진이 나직하게 덧붙였다. 유정은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는지 언성을 높였다.

“그러니까 왜 하필 우리 회사냐고!”

유정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언성을 높였다.

“현재 업계에서 내 몸값을 감당하며 이 정도 연봉을 제시할 수 있는 곳은 당신 회사가 유일해. 다른 선택지가 있었다면 나 역시 가장 후순위에 두었을 거야.”

우진의 차분한 대답은 논리적이었고, 그래서 더 반박하기 어려웠다. 유정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돌렸다.

“아 몰라. 이미 결정해 놓고 지금 나한테 통보하는 거잖아”

“회사에는 당신이 불편할까 봐 우리가 부부라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어. 어차피 본부도 다르고 업무적으로 엮일 일도 없을 테니, 지금과 크게 달라질 건 없을 거야.”

“당연하지! 그걸 왜 말해! 절대 말하지 마!”

유정은 유독 강하게 부정하며 날 선 반응을 보였다. 연봉 계약서에 이미 서명했다는 우진의 말에 그녀는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방으로 들어갔다. 우진은 어둠 속에 홀로 앉아 생각했다. 유정이 그토록 두려워하는 것이 자신의 '존재'인지, 아니면 자신이 발견하게 될 '진실'인지.


2주 뒤, 우진은 두 번째 직장에 첫발을 내디뎠다. 우진에게 적응이란 호흡만큼 쉬운 일이었다. 수려한 외모와 정교하게 조율된 태도, 그리고 압도적인 업무 능력은 순식간에 사내의 화제가 되었다. 사람들은 마치 거대한 중력에 이끌리는 행성들처럼 자연스럽게 우진의 궤도 안으로 모여들었다.

그는 입사한 지 채 6개월도 되지 않아 조직 전체를 장악했고, 압도적인 성과는 고객사를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우리 정우진 과장님이 합류하신 뒤로 정말 많은 게 바뀌었습니다. 장비 BM 지수는 놀라울 정도로 안정화됐고, 무엇보다 고질적이었던 VOC 대응 속도가 비약적으로 빨라졌어요. 덕분에 우리 제품 수율 향상에도 큰 도움이 되었고요. 특히 기존에 지지부진했던 개발 과제들이 정 과장님 손을 거치며 속도감이 붙어, 내년에는 대부분 대규모 투자로 이어질 것 같습니다. 최 대표님, 정말 보석 같은 인재를 곁에 두셨군요. 사실 저희 회사에 협력사 인재 추천 채용 제도가 있는데, 추천인이 채용되면 포상금이 2천만원이나 나옵니다. 제가 정 과장님을 추천할까, 고민 중입니다. 하하!”

고객사의 극찬은 곧 인사고과로 직결되었다. 최 대표는 인재를 놓치지 않기 위해 이듬해 우진을 ‘차장’으로 특진시킴과 동시에 파트장 보직을 맡겼다.

다른 파트장들과 비교했을 때 무려 열 살이나 어린 나이였다. 조직의 허리라 불리는 40대 중후반의 차장들이 우진을 시기했지만, 실무에서 보여주는 그의 빈틈없는 논리 앞에서는 누구도 입을 뗄 수 없었다.

우진은 젊었으나 노련했고, 열정적이었으나 냉혹했다. 그는 팀원들에게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강요하지 않았으며, 상부에서 내려오는 명분뿐인 불필요한 잡무들을 자신의 선에서 필터링하여 팀원들의 부하를 줄여주었다. 업무를 배분할 때는 팀원 각자가 가진 역량과 성향의 데이터값을 정확히 분석하여 최적의 담당자를 선정했고, 기대치에 부합하는 결과만 가져온다면 그 과정이나 방식에는 일절 개입하지 않는 ‘완벽한 자유’를 보장했다. 팀원들에게 우진은 이상적인 상사였고, 그 효율성은 고스란히 숫자로 증명되어 팀의 성과는 연일 정점을 찍었다.


사실 우진에게 있어 압도적인 인사 고과나 업계 최고 수준의 연봉 따위는 부차적인 문제에 불과했다. 타인들이 선망하는 그 화려한 껍데기 뒤에 숨겨진 우진의 진짜 목적은 따로 있었다. 그는 자신의 견고한 세계를 무너뜨린 파괴자, 유정의 외도 상대인 서종엽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그가 구축한 삶의 궤적을 낱낱이 파악해야만 했다.

입사 직후부터 우진은 서종엽의 존재를 특정하기 위해 은밀하고 치밀하게 움직일 계획이었다. 그러나 정작 그를 찾아내는 데에는 별다른 수고가 필요치 않았다. 조직이라는 거대한 기계 장치 안에서, 모든 부품이 우진의 완벽한 회전 속도에 감탄하며 찬사를 보낼 때 유독 불협화음을 내며 그를 부정적으로 응시하는 단 하나의 시선이 있었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그 노골적인 견제와 적의를 숨기지 않는 인물은 바로 영업 2파트장, 서종엽 부장이었다. 그는 우진이 나타나기 전까지 자신이 누려왔던 조직 내 입지와 존재감을 위협받는 것에 대해 본능적인 거부감을 드러냈다. 우진은 자신을 향한 그 천박하고도 날카로운 시선의 주인이 누구인지 확인하는 순간, 자신의 본능이 아직 살아 숨 쉼을 느꼈다.


서종엽은 자타가 공인하는 ‘설계팀의 전설’ 출신이었다.

출신 성분부터 남달랐다. 전문대를 졸업하고 생산직 초급 사원으로 입사한 그는, 학벌 위주의 대기업 생태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악착같이 버텼다. 관리직 전환이라는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데 성공한 이후에는 독학으로 정교한 설계 툴을 익혀, 마침내 설계 파트장이라는 자리까지 올라온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외부에서 보기에 서종엽은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젠틀하고 멋진 중년 부장의 정석이었다. 매일 아침 칼같이 다려 입은 단정한 셔츠,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는 은은한 코롱 향기,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잃지 않는 부드러운 말투까지. 그는 타 부서 직원들에게 ‘개천에서 난 용’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교과서적이고 우아한 성공 사례로 칭송받았다.

하지만 그 우아한 껍질 안쪽은 지독한 기생의 법칙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서종엽은 차장이라는 직급에도 불구하고 설계에 대한 기초적인 감각조차 부족했다. 대신 타인의 성과를 자신의 것으로 포장하는 데에는 천부적인 재능을 보였다. 사원부터 차장까지, 부하 직원들이 밤낮으로 코피를 쏟으며 일궈낸 특허와 기술 명세서에는 어김없이 ‘제1 발명자 서종엽’의 이름이 새겨졌다.

그는 수년간 부하들의 영혼을 갈아 넣어 자신의 인사고과를 황금빛으로 물들였고, 성과급과 수당을 포함한 인센티브를 매년 두둑하게 챙겼다. 부하들의 고혈은 서종엽의 강남 아파트 평수를 넓히고, 자식들의 해외 유학 자금으로 유입되었다.

영원할 것 같던 그의 기생은 사내 익명 커뮤니티에 올라온 한 줄의 폭로 글로 무너졌다.

“우리의 뇌를 도둑질하는 흡혈귀를 고발합니다.”

이 글을 기점으로 그간 억눌려 있던 과장과 대리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감사팀은 즉각 전수조사에 착수했다. 사원부터 과장까지, 서종엽의 밑을 거쳐 간 모든 이들이 감사장에 소환되어 그의 추악한 행태를 증언했다.

결국 서종엽은 모든 혐의를 인정했다. 회사 발전에 기여한 과거의 공로가 참작되어 해고라는 최악의 상황은 면했지만, 그것은 명백한 좌천이었다. 그는 자신이 평생을 바쳐 구축해 온 설계실이라는 성벽에서 쫓겨나, 아무런 기반도 없는 영업부 영업 2파트로 전배되었다.


서종엽의 생존은 경탄스러울 만큼 질겼다. 그는 손용대 팀장의 그림자조차 밟지 않는 철저한 복종을 통해, 영업2파트로 좌천된 지 1년 반 만에 기어이 부장 타이틀과 영업2파트장 자리를 얻었다.

반도체 시장의 사이클이 가파른 하강 곡선(Down Turn)을 그리며 인력 감축의 칼바람이 불어닥쳤을 때, 사실 권고사직 명단의 가장 윗자리는 서종엽의 몫이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명단에 가해진 손용대 팀장의 펜 끝이 행방을 바꾸었다. 결국 묵묵히 제 일을 하던 강효상 부장이 짐을 쌌고, 서종엽은 그 피 묻은 자리에 앉아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이제 영업팀 내부는 기묘한 구도가 형성되었다. 실력과 성과로 무장한 굴러온 돌, 영업1파트장 정우진과, 로비와 아부로 생명을 연장한 영업2파트장 서종엽. 두 사람의 나이 차이는 정확히 열 살이었다. 하지만 서종엽에게 그 열 살이라는 간극은 존경받는 선배의 여유가 아닌, 언제 자신을 잡아먹을지 모르는 젊은 포식자에 대한 공포의 깊이였다.

팀 내부의 회의나 이주형 사업부장에게 향하는 정기 보고 때마다 두 파트장은 항상 나란히 배석했다. 그 자리는 서종엽에게 매번 공개적인 고문실과 같았다. 우진은 오로지 숫자로 말했고, 그 숫자는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우진은 강단 있는 모습으로 이미 폐기 직전에 놓였던 대형 프로젝트들을 수차례 기적적으로 살려냈고, 그 결과물은 고스란히 회사의 매출 곡선을 우상향시키는 동력이 되었다. 타 부서가 업무 협조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태만하거나 기한을 미루면, 우진은 그간 쌓아온 치밀한 근거 자료를 들이밀며 상대를 정면으로 압살했다.

손용대 팀장은 그런 우진을 자신의 오른팔처럼 신뢰했고, 환갑을 훌쩍 넘긴 이주형 사업부장은 우진을 볼 때마다 "우리 회사의 미래"라며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조직의 생리는 자명했다. 조만간 이주형 사업부장이 은퇴하면 손용대 팀장이 그 자리를 이어받을 것이고, 공석이 될 영업 팀장 자리는 두 파트장 중 한 명의 차지가 될 터였다. 사내의 모든 시선은 이미 우진을 향해 쏠려 있었다.

서종엽은 이 기류를 소름 끼치도록 선명하게 감지했다. 겉으로는 중년 부장의 인자한 미소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의 등 뒤로는 매 순간 차가운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나이, 경력, 이 바닥에서 잔뼈가 굵은 짬밥으로 따지자면 차기 팀장은 당연히 자신의 몫이어야 했다. 그러나 조직은 때로 경력보다 '상징성'과 '효율'에 의해 움직인다는 것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압도적인 성과, 고결한 학벌, 그리고 젊음. 우진은 조직이 가장 갈망하는 차세대 리더의 완벽한 표상이었다.

무엇보다 서종엽을 잠 못 들게 하는 것은 이주형 사업부장의 눈빛이었다. 사업부장이 우진을 바라볼 때 느껴지는 그 무조건적인 신뢰. 만약 그가 은퇴하며 손용대 팀장에게 "차기 팀장은 정 파트장이 적임자야"라는 귀띔 한마디만 남긴다면, 자신이 지난 1년간 땡볕 아래서 팀장의 골프 가방을 메며 쏟았던 그 비굴한 노력은 단숨에 폐기처분될 것이었다.

위기감은 이성을 마비시켰다. 서종엽은 실력으로 우진을 넘어서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위계의 사슬로라도 그를 묶어두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주간 미팅 날, 서종엽은 사전 합의 없이 비장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서로 파트는 다르지만, 결국 우리 영업팀은 한배를 탄 사이잖아? 그런데 말이야, 팀장님 보고나 사업부장님 보고 때마다 각 파트의 PPT 양식이 제각각인 건 조직의 효율 측면에서 아주 좋지 않다고 봐. 통일감이 없으면 신뢰도 떨어지는 법이거든.”

서종엽은 안경을 고쳐 쓰며, 짐짓 권위 있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래서 오늘부터 내가 새로 정립한 양식으로 모든 보고서를 통일하자고. 정우진 파트장은 앞으로 파트 내에서 취합된 모든 내용을 나한테 먼저 보내. 내가 최종적으로 검수하고 톤앤매너를 맞춰서 팀장님께 일괄 보고할 테니까. 알겠지?”

그것은 노골적인 관리권 장악 선언이었다. 우진의 정보가 자신의 손을 거치게 함으로써 정보의 길목을 차단하고, 우진을 자신의 하위 하청업자처럼 포지셔닝하려는 조잡하고도 절박한 수였다. 회의실 안의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다른 팀원들이 눈치를 살피며 고개를 숙였을 때, 우진은 노트북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도 않은 채 건조하고 나른한 목소리로 응수했다.

“일단 부장님이 만드신 그 양식부터 보고, 제가 결정하겠습니다.”

마치 귀찮은 스팸 메일을 처리하는 듯한 무심한 태도. 우진은 서종엽의 간절한 권력욕을 단 한 문장으로 쓰레기통에 처박아버렸다. 우진의 노트북 화면에 반사된 서종엽의 얼굴은 분노와 수치심으로 벌겋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아니, 우진 파트장아. 자꾸 왜 이래? 우리가 한 팀인데 보고 양식이 매번 제각각인 게 애초에 말이 안 되는 거야. 내가 팀장님 가독성 생각해서 며칠 밤낮을 고생해서 완벽하게 만들어 놨으니까, 군말 말고 다음 주부터는 무조건 내 양식으로 자료 취합해서 넘겨.”

서종엽 부장의 목소리는 이미 논리적 설득력을 잃고 강압적인 윽박으로 변질되어 있었다. 그는 ‘고생’이라는 단어를 강조하며 자신의 얄팍한 노력을 가련하게 포장하려 애썼다.

“보고 결정한다니까요.”

우진이 비로소 노트북 덮개를 반쯤 닫았다. 딱, 하는 경쾌한 마찰음과 함께 우진의 시선이 서종엽의 조급한 얼굴을 정면으로 꿰뚫었다. 감정이 완전히 소거된 우진의 눈동자는 마치 거울 같아서, 서종엽은 그 안에서 자신의 추악하고 초조한 민낯을 마주해야만 했다. 서종엽은 그 무미건조한 눈빛에서 뼈를 깎는 듯한 모멸감을 느꼈다.

“결정할 게 뭐 있어! 그냥 시키는 대로 차주부터 거기에 데이터 다 집어넣어!”

서종엽은 소리를 높였다. 그는 이 양식 변경을 단순한 디자인 수정쯤으로 치부하려 했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다. 그가 가져온 양식은 실무적인 효율은 안중에도 없는, 오직 보여주기만을 위한 조잡한 장식들로 가득했다. 복잡한 연동 수식과 불필요한 구조 변경, 그리고 모든 데이터를 원점부터 재정렬해야 하는, 이른바 ‘행정적 노가다’의 결정판이었다. 현장의 치열한 속도감은 고려하지 않은 채, 오직 윗사람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실무자들의 영혼을 갈아 넣어야 하는 쓰레기 같은 보고서였다.


다음 날 오전, 우진은 서종엽이 보낸 메일을 열었다. 파일을 검토하는 데 걸린 시간은 1분도 채 되지 않았다. 결론은 이미 도출되어 있었다. 다시 모인 소회의실, 무거운 침묵을 깬 것은 우진의 서늘한 통보였다.

“부장님 보내주신 양식, 검토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저희 1파트는 기존 양식대로 가겠습니다.”

회의실 안의 모든 공기가 일시에 얼어붙었다. 다른 팀원들은 숨을 멈춘 채 고개를 숙였고, 서종엽의 얼굴은 순식간에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우진아… 너 진짜 왜 그러냐? 형이 팀을 위해서 뭐 좀 해보려고 하면, 넌 왜 매번 이렇게 태클을 걸어?”

‘형’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왔다. 논리와 실력으로 밀릴 때마다 서종엽이 꺼내 드는 마지막 방어기제이자 구걸이었다. 직급과 공적 관계를 무너뜨리고 사적인 감정에 호소하려는 그의 목태가 볼품없이 떨렸다.

“지금 우리 파트 업무량만으로도 팀원들 전부 야근에 주말 출근까지 하며 버티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실무에 아무런 도움도 안 되는 양식을 바꾸느라 시간을 버릴 여유는 없습니다. 정 그렇게 양식을 통일하고 싶으시면, 2파트 내용을 저희 1파트 양식으로 맞춰서 취합해 오세요.”

“야, 너 지금 말 다 했냐? 네가 지금 부장인 나를 가르치려 들어?”

“전 바빠서 이만 가보겠습니다.”

우진은 서종엽의 비명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쾅’ 하고 회의실 문이 닫히는 소리는 서종엽이 마지막까지 붙잡고 있던 자존심을 사정없이 짓밟는 소리였다.

자리에 돌아온 우진은 일말의 망설임 없이 마우스를 움직였다. 그는 이번 주 팀장 보고 메일을 열어 ‘전체 회신’ 버튼을 눌렀다. 수신인에는 손용대 팀장뿐만 아니라, 휴직 중인 인원을 제외한 영업팀 전원 40여 명의 이름이 일렬로 박혔다. 우진은 아주 정중하고도 치명적인 메일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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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신: 손용대 팀장님

참조: 영업팀 전원


금일 영업팀 주간보고 중 서종엽 부장님의 제언에 따라,

보고 자료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팀 내 양식 통일화를 추진하기로 하였습니다.

영업팀 내부 최종 협의하여 차주부터는 영업1파트 양식으로 통일하여

보고드릴 예정이니 업무에 참고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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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진의 ‘확정 공지’였다. 서종엽이 제안했다는 명분은 살려주면서도, 알맹이는 우진의 것으로 채워버리는 완벽한 프레임의 전환. 메일을 확인한 영업팀 전체가 동요하기 시작했고, 저 멀리 서종엽의 자리에서는 짐승의 신음 같은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자신의 제안이 우진의 승리를 공식화하는 도구로 전락했음을 깨달았지만, 이미 전체 공표된 메일을 주워 담을 방법은 없었다.

우진은 무표정하게 다음 업무 데이터를 모니터에 띄웠다. 모니터 너머로 비치는 그의 눈에는 승리의 기쁨 따위는 없었다. 이것은 감정 섞인 싸움이 아니었다. 오답으로 가득 찬 시스템을 정답으로 교정하는, 우진만의 차갑고 정교한 ‘업무 처리’ 과정이었을 뿐이다.

잠시 후, 알림음과 함께 손용대 팀장으로부터 짧고 강렬한 회신이 도착했다.

“Very Good. 추진해.”

이 세 마디는 서종엽 부장의 관 속으로 박히는 마지막 못 소리였다. 우진은 마우스를 내려놓고 창밖을 보았다. 한 해의 끝자락, 차가운 빌딩 숲 사이로 지는 태양이 우진의 박제된 무표정 위로 길게 늘어졌다.


손용대 팀장이 보낸 “Very Good. 추진해.”라는 짧고 간결한 회신은 서종엽 부장에게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메일을 확인한 서종엽의 눈동자는 경악으로 뒤물었고, 그는 이성을 잃은 채 곧장 우진의 파트장석으로 들이닥쳤다. 그의 얼굴은 끓어오르는 분노와 감출 수 없는 당혹감으로 인해 평소의 젠틀한 가면을 벗어던지고 흉측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야, 정우진! 너 지금 장난하냐? 이게 대체 뭐 하자는 짓이야!”

우진은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 그는 서류를 넘기는 규칙적인 마찰음 사이로 건조한 음성을 내뱉었다.

“부장님께서 말씀하셨잖습니까. 한 팀인데 보고 양식이 매번 다른 건 말이 안 된다고. 부장님께서 그토록 존경하시는 팀장님께서도 방금 ‘굿 아이디어’라고 승인하셨네요. 자존심 세우실 때가 아닙니다. 차주부터는 1파트 양식으로 데이터 취합하시죠.”

우진의 말은 서종엽이 스스로 판 함정에 그를 밀어 넣는 최후의 일격이었다. 서종엽은 자신의 꾀에 자신이 완벽하게 넘어갔음을 깨달았지만, 이미 전사 메일로 박제된 결정을 되돌릴 방법은 없었다.

결국 그 다음 주부터 영업팀의 모든 보고 체계는 우진의 1파트 양식으로 통일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서종엽은 팀 미팅에서 ‘혁신적인 보고 체계 효율화’를 끌어냈다는 팀장의 칭찬을 들었다. 하지만 그 대가는 굴욕스럽고도 가혹했다. 1파트와 2파트의 방대한 자료를 일일이 취합하고 오류를 수정하는 고된 ‘총괄 서기’의 역할이 고스란히 서종엽의 몫으로 떨어진 것이다. 남의 성과에 이름만 올리며 무임 승차하던 기생충이, 이제는 남의 성과를 빛내기 위해 밤새 엑셀 칸을 채우는 뒤치다꺼리 하급자로 전락한 셈이었다.


계절이 바뀌며 기업의 심장이 가장 가쁘게 뛰는 잔인한 시기가 도래했다. 한 해의 성적표를 확정 짓고, 불확실한 내년의 지도를 그려야 하는 ‘사업계획’ 시즌이었다. 영업 팀원들에게 11월과 12월은 달력에서 증발한 달이나 마찬가지였다. 평일의 개인적 삶은 고사하고 주말조차 반납한 채 사무실의 형광등 아래서 밤을 지새웠다. 오죽하면 이 살인적인 일정을 피하기 위해 아이의 출산 예정일마저 조절한다는 비극적인 농담이 돌 정도였다.

설상가상으로 사업계획 수립이 절정에 달하던 어느 날, 전 세계를 뒤덮은 역병의 파고가 다시금 사무실을 덮쳤다. 변이 바이러스의 공포는 여전했고, 사내 방역 지침은 서슬 퍼런 칼날처럼 직원들을 압박했다. 백신 접종은 선택이 아닌 생존을 위한 반강제적 의무였다. 미접종자는 식당 출입은 물론 사무실 출근조차 허용되지 않는 분위기 속에서 우진 역시 접종을 마쳤으나, 그의 정교한 육체는 예상치 못한 격렬한 거부 반응을 일으켰다.

접종 직후부터 우진의 온몸은 용광로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다. 심할 때는 눈앞의 모니터 글자들이 일그러지며 시야가 암전될 정도로 고열이 몰아쳤다. 며칠 밤낮을 오한과 발열에 시달렸지만, 우진은 자신의 사전에 ‘이탈’이라는 단어를 허용하지 않았다. 해열제를 사탕처럼 씹어 삼키며 출근을 강행하기를 사흘째, 결국 사단이 나고야 말았다.

서종엽 부장과 사업계획 사전 리뷰를 진행하던 중이었다. 수치를 설명하던 우진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더니, 이내 그의 시야가 완벽한 암흑 속으로 침잠했다. 육체가 정신의 통제를 벗어나 바닥으로 곤두박질친 순간이었다. 응급실로 긴급 이송된 우진의 상태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3일 밤을 꼬박 새운 과로와 백신 부작용에 따른 연쇄적 장기 부전 위험까지 겹쳐, 40도에 육박하는 고열은 좀처럼 내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우진이 독한 타미플루 성분이 섞인 링거를 맞으며 병실 침대에 유령처럼 누워 있을 때, 정적을 깨고 휴대폰이 요란하게 진동했다. 화면에는 ‘서종엽 부장’이라는 이름이 불길하게 떠 있었다.

“… 여보세요.”

“우진아, 정신 좀 드냐? 이거 참, 몸 관리도 실력인데 안타깝게 됐네.”

서종엽의 목소리는 짐짓 걱정하는 척했으나, 그 기저에는 먹잇감을 발견한 하이에나의 흥분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1파트 사업계획 핵심 내용이랑 원본 파일 비밀번호 좀 불러줘 봐라. 팀장님이 갑자기 일정을 앞당기셔서 오전 내로 자료 보내달라고 하신다. 너 지금 병상에서 일어날 수도 없는 상황이니까, 내가 네 파트 것까지 대신 보고해야 하지 않겠냐? 선배 노릇 좀 하마.”

서종엽의 목소리는 걱정하는 척했지만, 그 기저에는 기회를 잡은 자의 흥분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통화를 마친 서종엽은 사내 카페테리아에서 식은 커피를 들이켰다. 그때, 손용대 팀장이 다가왔다.

“사업계획은 잘되고 있나? 내일 오전 미팅이지? 하필 내일 사장님 미팅이 앞당겨져서 나랑 사업부장님은 1시간 30분 정도만 참석할 수 있을 것 같네. 최대한 핵심만 빨리 언급하고 넘어가자고.”

서종엽의 눈이 번뜩였다. 그는 우진이 병상에 누워 있는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1파트의 성과까지 자신의 공으로 포장할 절호의 기회임을 직감했다.

“아, 그러시면 팀장님. 지금 내년도 사업계획 초안부터 세부 실행 전략까지 완벽하게 마무리되었는데, 혹시 팀장님하고 사업부장님만 괜찮으시다면, 내일 오전까지 기다릴 것 없이 오늘 바로 미팅을 진행하는 건 어떠신가요?”

서종엽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 톤 높게 들떴다. 그것은 열정의 발로가 아니라, 먹잇감을 눈앞에 둔 포식자의 조급함이었다. 손용대 팀장이 의아한 듯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래? 오늘 바로 한다면 나야 고맙지. 그런데 진짜 다 된 거야? 우진이한테 내가 직접 전화해서 확인해 볼게.”

손용대가 휴대폰을 꺼내려 하자 서종엽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하지만 그는 노련한 기생충답게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가로막았다.

“아, 아닙니다. 팀장님! 안 그래도 제가 조금 전까지 우진 파트장이랑 마주 앉아서 최종 사전 리뷰를 다 끝냈습니다. 미팅 끝나고 우진이가 급하게 어디로 가던데, 제가 따로 연락해 보겠습니다.”

서종엽의 입술 사이로 터져 나온 것은 하이에나와 같은 교활한 거짓말이었다. 우진이 고열로 의식을 잃어가는 틈을 타, 그는 우진의 노력을 자신의 공적으로 치환할 거대한 사기극을 설계했다.

“좋아. 그럼 내가 사업부장님께 바로 보고드릴 테니까 오늘 오후 4시에 대회의실에서 미팅하는 걸로 하지. 이제 6시간 남았네. 서 부장, 애들 시켜서 대회의실 세팅 철저히 해. 이번 사업계획은 회장님께도 보고될 중대한 사안이야. 미팅 중에 파일이 깨지거나 링크 오류 같은 사소한 이슈라도 생기면 나도 감당 안 된다. 알겠어?”

“네, 팀장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 이름을 걸고 완벽하게 준비해 놓겠습니다.”

서종엽은 비열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채 허리를 굽혀 대답했다. 손용대 팀장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는, 팀장이 사라지자마자 차갑게 안경을 고쳐 썼다. 우진의 공든 탑을 가로채 자신의 성으로 만들 생각에 그의 전신이 기분 좋은 전율로 요동쳤다. 우진이 응급실 차가운 침대 위에서 사경을 헤매는 동안, 서종엽은 그를 딛고 올라설 마지막 사다리를 놓고 있었다.


6시간 후, 영업팀뿐만 아니라 전 사업부의 사활을 결정지을 '사업계획 및 경영 전략 미팅'이 시작되었다. 대회의실의 육중한 문이 닫히자, 외부의 일상적인 소음은 완벽하게 차단되었다. 이 자리는 단순히 내년도 예상 매출액을 읊는 요식 행위가 아니었다. 지난 1년간의 실책을 낱낱이 파헤치는 자아비판의 장인 동시에, 불확실성의 파고를 넘기 위한 비즈니스의 사생결단 현장이었다. 전략 한 줄에 수천억 원의 추가 투자가 결정되거나 수백 명의 인력 이동이 결정되는 자리인 만큼, 회의실 내부에는 질식할 것 같은 압박감이 안개처럼 자욱했다.

회의실 중앙의 긴 테이블을 중심으로 영업 1, 2파트를 필두로 R&D 연구소, 요소기술팀, 기구 및 제어 설계팀, SW 개발팀, 재무팀, CS, 구매, 그리고 제조와 생산팀까지. 회사를 지탱하는 30여 명의 핵심 브레인들이 전운이 감도는 표정으로 각자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 팽팽한 밀도의 공간 속에서, 오직 단 한 자리만이 비어 있었다. 영업 1파트장, 정우진의 자리였다.

상석에 앉은 이주형 사업부장은 무거운 침묵 끝에 손목시계를 한 번 확인한 뒤, 곁에 앉은 손용대 팀장을 향해 나직하지만, 위엄 있게 물었다.

“1파트장은 아직인가? 시작 시간이 벌써 5분이나 지났는데.”

손용대 팀장이 당혹스러운 듯 고개를 돌려 서종엽을 쳐다봤다. 서종엽은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입을 열었다.

“사업부장님, 그게… 정우진 파트장 말입니다. 제가 아까부터 수십 번이나 따로 연락을 시도해 봤습니다. 그런데 아까 잠깐 통화가 연결되었을 때, 집에 무슨 급박하고 개인적인 사정이 생겼다면서 제 설명도 듣지 않고 전화를 그냥 뚝 끊어버리더군요.”

서종엽은 우진이 병상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사실을 완벽히 은폐했다. 대신 그는 우진을 공적인 자리보다 사적인 일을 우선시하며, 조직의 운명이 걸린 미팅조차 무책임하게 팽개치는 안하무인의 인물로 둔갑시켰다.

“일단은 제가 1파트 내용까지 다 알고 있으니 발표하겠습니다”

“이런 중차대한 미팅에 파트장이 자리를 비우다니, 집에 어지간히 큰일이 생겼나 보군. 흠.”

이주형 사업부장은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평소 우진을 ‘차세대 리더’로 점찍어두고 각별한 신뢰를 보냈던 그였기에, 예고 없는 공백에서 오는 배신감은 더욱 짙었다. 사업부장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패자, 대회의실 온도는 마치 액체 질소를 뿌린 듯 영하로 급격히 곤두박질쳤다.

“1파트장, 사무실 복귀하는 대로 이유 불문하고 내 방으로 바로 오라고 전해. 일단 시간 없으니 시작하지.”

이주형 사업부장의 차가운 휘슬과 함께 서종엽의 독무대가 시작되었다. 서종엽은 우진이 피와 땀으로 벼려낸 1파트의 정교한 데이터를 마치 자신의 뇌에서 갓 추출한 성과인 양 능숙하게 읊어댔다. 1시간가량 이어진 발표 동안 그는 자신이 영업팀 전체를 진두지휘하는 유일한 적임자이자, 팀장직을 승계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그릇임을 증명하기 위해 모든 연기력을 동원했다.

발표가 끝나고 마지막 슬라이드가 멈추자, 비로소 본격적인 ‘도살’이 시작되었다. 자리에 앉아 있던 임원들과 부서장들의 눈빛이 현미경처럼 날카로워졌고, 서종엽은 등 뒤로 흐르는 차가운 식은땀을 감추며 비열한 미소를 유지했다. 그는 아직 알지 못했다. 자신이 훔친 데이터는 우진의 ‘논리 체계’라는 복잡한 암호로 잠겨 있으며, 그 열쇠 없이는 그저 자폭용 시한폭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회의실의 공기가 비릿하게 변했다. 정적을 깬 것은 사전에 배포된 40페이지 분량의 인쇄물을 현미경처럼 들여다보던 김정아 재무팀장이었다. 그녀는 차가운 은테 안경을 손가락으로 밀어 올리며 포문을 열었다.

“서 부장님, 지금 내년도 총 예상 매출액의 합산 수치가 기이할 정도로 비논리적입니다. 1파트와 2파트 데이터, 정말로 부장님이 직접 검증하신 게 맞습니까?”

김 팀장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안에 담긴 논리는 서종엽의 목줄을 겨냥한 예리한 메스 같았다.

“내년 반도체 시장이 업턴(UP TURN)으로 돌아서고 글로벌 시설 투자(CAPEX)도 비약적으로 늘어날 거라는 전망이 지배적입니다. 대외 전략팀의 보고서도 이를 뒷받침하죠. 서 부장님이 발표하신 자료를 보면 그런 장밋빛 상황은 충분히 반영된 것 같은데, 데이터의 앞뒤가 전혀 맞질 않아요. 1파트는 경쟁사 공정을 3개나 뺏어오는데도 매출 상승 폭이 기형적으로 적게 잡혀 있고, 반대로 2파트는 신규 진입 공정이 단 하나도 없는데 매출 규모가 비정상적으로 부풀려져 있습니다. 이 기괴한 불균형을 대체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질문의 물리적인 무게에 서종엽의 어깨가 눈에 띄게 움찔거렸다. 그는 마른침을 삼키며 마이크를 고쳐 잡았다. 손바닥의 땀 때문에 플라스틱 마이크 손잡이가 미끄러웠다.

“아, 네… 그 부분은, 먼저 제 담당인 2파트부터 상세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2파트는 내년 예상 투자 캐파(CAPA)를 역산해서, 현재 저희가 대응 중인 기존 공정들의 장비 대수만큼 단순히 대입한 수치입니다. 그러니까, 시장 상황을 아주 보수적으로 잡은 것이죠.”

그때, 팔짱을 낀 채 서종엽을 먹잇감 보듯 노려보던 전략기획팀 우원식 상무가 말을 끊고 들어왔다. 그의 눈빛은 사냥감을 포착한 맹수의 그것처럼 서늘하고 잔인했다.

“말 끊어서 미안한데, 서 부장. 그게 지금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그럼, 영업 2파트는 시장이 살아나는 황금기에 신규 진입 계획이나 JDP(공동개발 프로젝트), JEP(공동 평가 프로젝트) 같은 공격적인 전략은 아예 없다는 건가? 그냥 앉아서 감 떨어지기만 기다리겠다는 소리야? 영업이?”

서종엽의 이마와 콧등에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고성능 에어컨이 가동되는 대회의실이었지만, 오직 서종엽이 서 있는 단상 주위만 열대야가 시작된 듯 습하고 뜨거운 공기가 감돌았다. 서종엽이 입술을 달싹이며 논리 없는 변명을 더듬거리자, 김정아 재무팀장이 다시 한번 치명적인 쐐기를 박았다.

“답변하신 대로 기존 공정 유지 조건이라면 더더욱 말이 안 됩니다. 신규 진입도 없이 기존 캐파만 계산하는데 왜 매출이 전년 대비 40%나 높게 잡혀 있죠? 영업팀이 이런 기초적인 산식조차 틀린다는 게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 되네요. 서 부장님, 이 내년도 투자 캐파 예상치, 정말 정확한 근거를 바탕으로 산출한 것 맞습니까? 아니면 그냥 1파트 수치를 대충 쪼개서 2파트에 붙여 넣기를 하신 겁니까?”

김 팀장의 날카로운 지적은 서종엽의 심장을 관통했다. 실제로 그는 우진의 보고서에서 좋아 보이는 숫자들을 가져와 자신의 실적처럼 보이게 하려고 임의로 가공했기 때문이었다. 수치의 논리적 연동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남의 것을 탐냈던 기생충의 한계였다.

서종엽의 입이 금붕어처럼 벙긋거릴 뿐 아무런 대답도 내놓지 못했다. 회의실 내의 30여 명의 시선이 바늘처럼 그를 찔러댔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그의 몰락은 기정사실이 되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시종일관 침묵을 지키며 폭풍 전야의 정적을 유지하던 이주형 사업부장이 결국 폭발했다. 그는 앞에 놓인 두꺼운 보고서를 탁자 위로 내동댕이쳤다.

“서종엽 부장! 지금 여기가 장난치는 자린 줄 알아!”

거대한 사자후가 회의실의 방음벽을 뚫을 듯 울려 퍼졌다. 서종엽의 무릎이 육안으로 보일 만큼 미세하게 꺾였다. 하이라이트의 진정한 파국이 이제 막 막을 올리고 있었다.

“서 부장! 지금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모처럼 반도체 업계에 호황이 찾아온다는데, 기존 공정만 현상 유지하겠다는 그 안일하고 썩어빠진 마인드 자체가 이미 틀려먹은 거 아니야? 대체 영업이 전략도 없이 사업계획을 세운다는 게… 이게 지금 참, 내 참 기가 막혀서. 우스운 노릇이네!”

이주형 사업부장의 사자후가 대회의실의 높은 천장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며 전방위로 퍼져 나갔다. 30여 명의 참석자는 마치 죄지은 수형자들처럼 일제히 고개를 숙인 채 숨을 죽였다. 서종엽의 셔츠 등줄기는 이미 차가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살갗에 쩍쩍 달라붙었다. 2파트의 전략 부재가 처참한 패배로 선언된 직후, 곧바로 1파트 기획안에 대한 잔혹한 칼질이 시작되었다. 이주형 사업부장이 혀를 차며 싸늘한 눈으로 물었다.

“서 부장. 본인 파트도 갈피를 못 잡고 허우적대는데, 남의 파트인 1파트 내용을 제대로 설명할 수나 있겠나? 자신 없으면 관둬.”

“아, 아닙니다! 사업부장님! 1파트 전략 역시 제가 초기 단계부터 정 파트장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세운 거라, 어떤 질문을 주셔도 즉각 답변 가능합니다!”

비굴하게 허리를 굽신거리며 억지 미소를 지어 보이는 서종엽을 향해, 이번에는 공정기술팀 황철호 팀장이 예리한 질문을 던졌다.

“그럼 묻겠습니다. 1파트에서 신규 진입하겠다고 공표한 3개 공정의 기술적 메커니즘이 정확히 무엇이며, 각 공정별 필요 대수는 어떤 로직으로 산출한 겁니까? 저희 공정 팀에서 자체 계산한 시간당 생산량(MPH) 수치와 대조해 보니, 자료상의 매출이 지나치게 적어 보입니다. 산식에 오류가 있는 것 아닙니까?”

순간 서종엽의 사고 회로가 정지되었다. 1파트의 첫 번째 질문조차 그에게는 해석 불가능한 난수표나 외국어와 같았다. 그는 우진의 초안을 훔쳐 와 자신의 이름으로 덮어쓰는 데는 성공했으나, 그 숫자 하나하나의 이면에 숨겨진 우진의 치밀한 논리와 공학적 근거까지 훔칠 수는 없었다. 회의실에 내려앉은 지독한 정적은 서종엽의 무능과 기만을 폭로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가 되어 그를 옥죄었다.

“저런 수준 미달을 파트장이라고 앉혀놨다니! 영업 팀장! 정우진이 아직도 연락 안 돼? 이따위 자료로 내일 사장님께 어떻게 보고하겠다는 거야!”

이주형 사업부장의 얼굴이 끓어오르는 용암처럼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는 책상을 내리치며 포효했다.

“‘내년도 우리 사업부 2파트는 전략이 전무하고, 1파트는 파트장 부재로 아무도 내용을 모릅니다’라고 보고해? 내 목을 내놓으라는 건가? 당장 정우진한테 전화해! 전화받을 때까지 걸란 말이야!”

사업부장의 호통에 대회의실 전체가 빙하기가 찾아온 듯 얼어붙었다. 손용대 영업팀장은 사색이 된 채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들었다. 공포가 지배하는 공간 속에서 통화 신호음이 채 세 번을 울리기도 전에 연결음이 끊겼다. 우진은 스피커폰 너머로 들려오는 사업부장의 광기 어린 분노를, 그리고 곁에서 들려오는 서종엽의 몰락하는 거친 숨소리를 병상에서 아주 차분하게, 마치 미리 준비된 연극을 관람하듯 듣고 있었다.

“여보세요… 팀장님…”

휴대폰의 그릴을 타고 흘러나온 우진의 목소리는 델 듯이 뜨거운 고열에 짓눌려 형편없이 갈라져 있었다. 하지만 그 갈라진 음성 사이로는 병실 특유의 기계적인 신호음과 지독한 정적이 섞여 들어 기묘한 긴장감을 자아냈다.

“스피커폰으로 전환해.”

이주형 사업부장의 명령은 서슬 퍼런 칼날 같았다. 그는 수신기를 향해 노호했다.

“나 사업부장이다. 정우진 파트장, 자네 오늘 내년도 사업계획 미팅이 있다는 거 정말 몰랐나? 자네 그렇게 안 봤는데, 이렇게 중요한 자리에 예고도 없이 빠지다니! 대체 책임감이 어디로 간 건가!”

“아… 사업부장님. 정말 죄송합니다.”

우진의 목소리는 고통스러워 보였으나 그 논리만은 칼끝처럼 예리했다.

“사실… 백신 접종 후 부작용으로 인한 고열이 심해 오전 미팅 중에 정신을 잃고 쓰러졌습니다. 현재 응급실에서 치료 중입니다. 쓰러질 당시 서종엽 부장님과 사전 리뷰 미팅을 하던 중이었기에, 제 상황이 부장님을 통해 실시간으로 공유된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리고… 미팅 일정이 오늘 오후로 급격히 앞당겨졌다는 건에 대해서는, 저는 그 어떤 채널로도 전달받지 못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순간, 대회의실의 공기가 일순간 유리처럼 굳어버렸다. 회의실에 모인 30여 명의 시선이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서종엽을 향해 쏟아졌다. 그 시선들은 비난이자, 경멸이었으며, 확인 사살이었다. 서종엽의 얼굴은 붉은색에서 수치스러운 잿빛으로, 그리고 죽은 자의 얼굴 같은 흙빛으로, 실시간 변해갔다. 기생충의 숙주를 향한 반역이, 가장 화려한 무대 위에서 가장 추악하게 폭로되는 순간이었다.

“야, 서종엽!”

이주형 사업부장의 사자후가 대회의실의 빳빳한 천장을 때리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것은 단순한 고함이 아니라, 신뢰를 배신당한 권력자가 내뱉는 파문의 선언이었다.

“너, 지금 제정신이야? 정우진이 고열로 응급실에 실려 간 걸 뻔히 알면서 왜 보고를 안 했어? 집에 급한 일이 생겼다고? 전화를 바로 끊어버려? 너 지금 나랑 장단 맞추자는 거야, 뭐야!”

“아, 그게… 사업부장님, 아까 분명히 제가 미팅 일정 당겨졌다고 전해줬는데… 아마 우진이가 정신이 없어서 착각을… 그게 그러니까…”

서종엽의 변명은 비루하다 못해 애처로웠다. 그는 책상 아래로 땀에 젖은 양손을 연신 비벼댔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은 그의 발등을 적시고 있었다. 사업부장의 눈은 이제 타오르는 분노를 넘어, 벌레를 보는 듯한 멸시에 가까운 감정을 담고 있었다.

“너, 지금 당장 입 닥쳐. 이 미팅 끝나고 한걸음에 내 방으로 튀어와. 알았어? 단 1초라도 늦으면 네 발로 나가게 될 줄 알아!”

이주형 사업부장은 거칠게 콧김을 내뿜으며 전화를 향해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우진을 향하는 그의 음성은 방금 전의 사자후와는 대조적으로, 짙은 미안함과 안쓰러움이 섞인 습기를 머금고 있었다.

“정 파트장, 미안하네. 내가 자네 사정을 전혀 모른 채 화부터 냈군. 미팅은 걱정하지 말게. 일단 몸부터 추스르고 나중에 연락하게.”

“아닙니다, 사업부장님. 내일 사장님 보고가 예정되어 있다고 들었습니다. 질문 주시면 간단한 답변은 충분히 드릴 수 있습니다.”

병상에 누워 초점이 흐릿해진 와중에도 우진의 뇌는 영하의 냉기를 띤 채 정교하게 작동하고 있었다. 그는 서종엽이 망쳐놓은 판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그리고 그 난장판 위에서 서종엽이라는 존재를 어떻게 영구적으로 삭제할지 이미 계산을 끝낸 상태였다.

황철호 공정 팀장이 아까 서종엽이 입도 뻥끗하지 못했던 질문을 다시 던졌다. 우진은 거친 숨을 고르며, 마치 곁에서 보고서를 한 장 한 장 넘겨주는 것처럼 명확하게 수치와 전략을 읊기 시작했다. 병실의 산소포화도 측정기 소리가 비트처럼 깔리는 가운데 우진의 선고가 시작되었다.

“3개 공정에 신규 진입하는 것은 이미 확정적인 단계입니다. 하지만 여기엔 한 가지 치명적인 변수가 숨어 있습니다. 고객사에서 내년도 투자로부터 우리 2파트가 현재 대응 중인 기존 공정의 유지 능력이 현저히 떨어진다고 판단했습니다. 결국 2파트의 기존 공정을 유지해 주는 것을 조건으로, 1파트가 신규로 진입하는 장비의 가격을 50%나 낮춰달라는 무리한 요청을 해왔습니다. 결과적으로 1파트의 매출 수치가 낮게 책정된 이유는, 바로 이 ‘2파트의 기술적 리스크’를 1파트의 수익으로 상쇄하며 떠안았기 때문입니다.”

순간, 서종엽의 고개가 단두대에 선 죄수처럼 힘없이 꺾였다. 우진의 목소리는 멈추지 않고 그의 목줄을 조여왔다.

“참고로 2파트의 공정 유지 불가 사유는 심각합니다. 장비 BM 수 증가에 따른 기술 대응 불가, 공정 대응 능력 상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경쟁사 대비 가격 경쟁력 열위 등 총체적 난국입니다. 해당 부분에 대해서는 금년도 반도체 장비사 종합 평가 결과에 이미 반영되었으며, 조만간 공식 공유될 예정입니다. 저는 오늘 이 치명적인 리스크를 서 부장님께 공유하고 함께 대책을 논의하고자 했으나, 공교롭게도 제가 응급실에 실려 오는 바람에 미처 다 전해드리지 못했습니다.”

대회의실 안은 찬물을 끼얹은 듯 괴괴한 정적에 휩싸였다. 서종엽이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아니 무능해서 보지 못했던 치부가 우진의 차가운 메스에 의해 낱낱이 해부되고 있었다. 우진은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고객사는 현재 우리 영업팀을 단일 개체로 보고, 2파트의 결함을 1파트의 수익으로 보전하라는 논리를 펴고 있습니다. 혹시 몰라 제가 2파트의 리스크가 해결되지 않았을 때와 해결되었을 때를 구분하여 시나리오별 플랜 B를 짜두었습니다. 특히, ‘2파트 리스크 극복 방안’은 사업계획서 가장 마지막 페이지에 보안 슬라이드로 삽입해 두었으니 확인 부탁드립니다. 제가 몸이 좋지 않아 직접 설명해 드리지 못한 점, 다시 한번 양해 부탁드립니다.”

우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손용대 영업팀장이 서둘러 마우스를 조작했다. 프로젝터 빔이 백색의 스크린 위에 우진이 숨겨둔 마지막 슬라이드를 환하게 투사했다.

우진의 설명대로였다. 거기에는 1파트의 생존 전략은 물론, 서종엽조차 손을 놓고 포기했던 2파트의 결함과 그에 대한 정밀한 처방전이 소름 끼칠 정도의 완성도로 정리되어 있었다. 서종엽이 훔친 것은 껍데기뿐이었으나, 우진은 그 껍데기 아래에 서종엽을 단죄할 독을 심어두었던 것이었다.

대회의실의 차가운 정적은 이내 압도적인 경탄으로 변했다. 사업부장은 스크린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다시 서종엽을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더 이상 ‘젠틀한 중년 부장’은 없었다. 숙주를 잃고 말라 죽어가는 비참한 기생충만이 땀에 젖은 채 벌벌 떨고 있을 뿐이었다.


“이래서 내가 정우진, 정우진 하는 거야.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군.”

대형 스크린에 투사된 마지막 ‘보안 슬라이드’를 한참 동안 응시하던 이주형 사업부장이 마침내 굳게 닫혔던 입술을 떼며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조금 전까지 서종엽을 단숨에 집어삼킬 듯했던 살벌한 기류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회의실의 공기는 우진의 압도적인 지략 앞에 굴복하며 순식간에 정돈되었다.

“내일 사장님 보고는 1파트장이 정리한 이 마지막 장표를 메인 전략으로 간다. 자네들이 며칠 밤낮을 헤매던 답이 여기 다 들어있지 않는가? 그리고 2파트는 지금 직면한 공정 유지 실패 위기와 향후 대응 방안, 특히 신규 진입 공정의 마진 확보 전략을 이번 주 내로 전면 재검토해. 차주 화요일 오전까지 내 책상 위에 직접 보고해. 알겠어?”

지옥의 문턱에서 간신히 목숨줄만 붙잡고 살아 돌아온 서종엽 부장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고개를 꾸벅였다. 셔츠는 이미 식은땀으로 비칠 만큼 젖어 있었고, 그의 자존심은 회의실 바닥의 먼지보다 못한 처지로 짓밟혔다. 기민하게 분위기를 감지한 손용대 팀장이 재빠르게 끼어들었다.

“네, 사업부장님! 2파트는 미팅 종료 즉시 제가 직접 붙어서 수정 작업에 착수하겠습니다. 차주 화요일 오전까지는 완벽하게 보완된 사업계획 최종본을 보고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좋아, 오늘 미팅은 여기까지 하지. 1파트장은 병상에서도 고생 많았네. 몸조리 잘하고, 내가 따로 사람 보내겠네.”

이주형 사업부장의 퇴장과 함께 폭풍 같았던 1차 미팅이 끝났다. 회의실을 빠져나가는 30여 명의 핵심 인력들은 마치 전염병 환자를 피하듯 서종엽의 곁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들의 시선은 여전히 땀에 젖어 떨고 있는 서종엽의 뒷모습을 비웃고 조롱하며 날카로운 파편처럼 그에게 박혔다. 서종엽은 그 자리에서 한참을 움직이지 못했다. 그것은 승자가 없는 게임에서 유일한 패배자로 남겨진 자의 비참한 기색이었다.

며칠 후, 병마를 털고 일어난 우진은 마치 긴 휴가를 다녀온 사람처럼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사무실로 복귀했다. 그의 안색은 여전히 창백했지만, 눈빛만은 전보다 더 서늘하게 빛나고 있었다. 우진은 단 하루 만에 영업팀 사업계획의 모든 논리적 허점을 보완해 냈고, 서종엽 부장은 우진이 던져준 가이드라인 아래에서 겨우 숨을 헐떡이며 보고 절차를 마쳤다.


해는 바뀌었고, 우진이 내놓았던 예언은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적중했다. 반도체 시장은 가혹했고, 2파트는 우진의 분석대로 기존 공정 유지에 처참하게 실패하며 막대한 매출 타격을 입었다. 하지만 영업팀 전체의 성적표는 화려했다. 1파트가 2파트의 천문학적인 적자를 메우고도 남을 만큼 압도적인 성과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우진은 목표 대비 140%라는 기적적인 숫자를 달성하며 경영진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었다.

그해 말, 인사 발령 공지란의 최상단에는 ‘정우진’ 세 글자가 선명하게 박혔다. 사상 최연소 영업 팀장 발령이었다.

팀장 자리에 앉은 우진의 책상 위로 가장 먼저 올라온 서류는 ‘경영 효율화에 따른 권고사직 대상자 명단’이었다. 명단의 가장 윗자리에는 서종엽 부장의 이름이 죽음의 낙인처럼 새겨져 있었다. 실적 부진, 과거의 성과 도용 전력, 그리고 조직 내 신뢰 상실까지. 서종엽은 도저히 빠져나갈 구멍이 없는 완벽한 퇴출 대상이었다.

하지만 우진은 무표정한 얼굴로 서종엽의 이름 위에 빨간 줄을 그었다. 그는 서종엽을 명단에서 제외했다.

그 결정에 서종엽은 눈물까지 쏟아내며 우진의 팀장실을 찾아와 무릎을 꿇었다.

“우진아, 아니, 팀장님…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비굴하게 고개를 숙이며 바닥을 기는 그를 향해, 우진은 과거 서종엽이 자신에게 했던 것처럼 아주 신사적이고 젠틀하게 웃어 보였다. 그 미소는 용서가 아니라, 더 잔인한 사육의 시작이었다.

퇴출의 공포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서종엽은 광기에 가까운 생존 본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해외 의대생 딸의 살인적인 등록금, 고등학생 아들의 뒷바라지, 그리고 대기업 부장이라는 유일한 자부심을 지키기 위해 그는 영혼의 마지막 한 조각까지 갈아 넣었다. 그는 우진의 발밑에서 구르며, 우진이 가리키는 곳이라면 지옥이라도 뛰어들 기세로 일했다.

그 해, 서종엽은 자신의 커리어 역사상 역대 최고의 매출 실적을 올렸다. 그는 자신이 우진의 '충복'이 됨으로써 다시 살아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회사 창립 이래 최고의 매출을 기록한 영업팀 회식 날, 공기는 축하의 환호와 알코올 향으로 뜨거웠다. 손용대 사업부장이 술기운을 빌려 우진의 외모를 품평하며 농담을 던졌다.

“우진아, 너는 이 얼굴에 이 피지컬이면 여자가 줄줄 따르겠다. 저 서늘한 턱선 좀 봐라. 남자인 나도 이렇게 홀리는데, 여자들은 오죽하겠냐? 너 솔직히 말해봐, 회사 안에 숨겨둔 애인 있지?”

그 곁에서 서종엽은 마치 주인을 따르는 사냥개처럼 비굴한 웃음을 흘리며 거들었다.

“에이, 사업부장님 말씀이 맞습니다. 우리 팀장님 정도면 아마 줄을 섰을걸요? 솔직히 숨겨둔 오피스 와이프 한 명쯤은 있을 것 같은데, 아닙니까?”

“제 취향이 아닙니다.”

우진의 대답은 단호했고, 얼음물처럼 차가웠다. 좌중에는 찰나의 정적이 흘렀으나, 눈치 없는 서종엽은 아랑곳하지 않고 아부를 이어갔다.

“역시 우리 팀장님! 외모, 능력, 인성까지. 아주 빈틈이 없으셔.”

술자리가 무르익자, 손용대 사업부장이 서종엽의 어깨를 툭 치며 물었다.

“서 부장, 아까 너 술자리 초반에 말하려던 그 ‘오피스 와이프’ 이야기나 마저 해봐. 아까 아주 감질나게 끊더구먼, 누구야? 우리 팀 사람이야?”

“아, 사업부장님! 그건 진짜 무덤까지 가져가야 하는 비밀이라니까요.”

“아, 좀 해봐. 우리 팀장님도 궁금하시다잖아. 안 그래, 우진아?”

“…”

침묵을 지키던 우진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취기에 완전히 절어버린 서종엽은 그 침묵의 의미를 읽지 못했다. 그는 우진의 무표정과 침묵을 동의로 착각했다. 권력자의 관심에 고무된 그의 안면 근육은 추잡하게 실룩거렸고, 그는 마침내 스스로 자신의 파멸을 불러올 지옥의 문을 열어젖혔다.

“아, 정 팀장님도 계시니까 특별히 푸는 겁니다.”

서종엽은 비밀스러운 보물을 꺼내놓듯 몸을 앞으로 쓱 내밀었다. 그에게서 풍기는 역한 알코올 냄새와 니코틴 향이 우진의 코끝을 찔렀다.

“다른 건 아니고 재무회계팀에 김유정 과장 있지? 그… 왜, 존나 쌔끈하게 생긴 애 있잖아. 걔 사실 내 ㅈ집이야. 겉으론 고상한 척해도 침대 위에선 아주 죽여주거든.”

그 순간, 우진의 세계에서 모든 소음이 단절되었다. 가게 안의 시끄러운 음악 소리도, 서종엽의 역겨운 웃음소리도 진공 상태처럼 사라졌다. 우진이 이직한 지 4년. 그 긴 시간 동안 가슴 깊은 곳에 날카로운 가시처럼 박혀 있던 그 이름, ‘유정’이 마침내 서종엽의 추잡한 타액과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우진은 유정의 외도를 확신했던 그날 이후, 단 한 순간도 평온한 적이 없었다. 회사를 옮긴 후, 그는 하루에도 수만 번씩 스스로를 고문했다.

‘왜 하필 저런 몰상식하고 천박한 인간이지? 고작 저런 쓰레기 같은 놈 때문에, 우리 가정을, 아이를, 그리고 나를 배신한 건가?’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우진의 영혼을 갉아먹었다. 아이의 해맑은 웃음을 볼 때마다 ‘모른 척 넘어가야 하는 걸까’라는 나약한 타협안이 고개를 들었고, 퇴근 후 마주하는 유정의 정갈한 모습을 볼 때면 ‘내가 오해한 것은 아닐까’라는 헛된 희망에 매달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 모든 번민과 망설임은 서종엽의 입에서 유정의 이름이 나오는 찰나, 차가운 얼음물처럼 씻겨 내려갔다.


“몇 년 전이었나, 설계팀 예산 문제로 재무팀이랑 붙어 있을 일이 많았거든. 그때 마침 신입 하나가 들어왔는데, 아주 물건이었어. 그래서 내가 바로 자빠뜨렸지.”

서종엽은 멈추지 않았다. 주변의 눈치를 살피는 척 목소리를 낮췄지만, 그의 눈은 성취감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저지른 범죄에 가까운 행위를 마치 무용담이라도 되는 양 늘어놓기 시작했다. 낄낄거리며 유정의 신체 부위를 묘사하는 동안, 우진의 뇌내 시스템은 이미 이 ‘오류’를 수정하기 위한 가장 잔인하고 완벽한 알고리즘을 계산하고 있었다.

“애가 성욕이 얼마나 강한지 점심시간에 다들 밥 먹으러 간 사이에 회의실에서 문 잠그고 그 짓을 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야. 심지어 주말에도 맨날 출근한다고 거짓말하고 나와서 나랑 붙어 있었지. 한 몇 년 그러다 보니 좀 시들해져서 내가 적당히 쳐냈는데, 요새 다시 보니까 또 눈길이 가네. 다시 연락해 볼까?”

우진은 들고 있던 술잔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잔 속의 투명한 액체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저 잠깐 바람 좀 쐬고 올게요.”

더 들어줄 가치가 없었다. 우진은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으나, 흥미진진한 표정의 손용대 사업부장이 우진의 소매를 붙잡았다.

“아, 팀장님! 왜 벌써 일어나. 하이라이트는 시작도 안 했는데. 서 부장, 끊지 말고 계속해 봐.”

“아, 사업부장님, 이거 진짜 무덤까지 가져갈 비밀이라니까요.”

서종엽은 신이 난 듯 말을 이어갔다. 우진의 존재가 자신의 목을 조르는 밧줄이라는 사실도 모른 채, 그는 파멸을 향해 입을 놀렸다.

“이건 진짜 어디 가서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이년이 얼마나 독하고 지독한지, 자기 애를 가졌을 때도 나를 찾아왔다니까요. 임신해서 배가 조금씩 불러오는데, 그 불룩한 배를 하고서도 호텔 방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더라고요. 나도 처음엔 사람 새끼가 이래도 되나 싶어 죄책감이 좀 들긴 했는데, 웬걸요. 그게 또 금기를 범하는 스릴이 기가 막히더라고요. 임신한 여자랑 하는 게 그런 맛인 줄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이건 진짜 우리끼리만 아는 비밀입니다, 아시죠?”

서종엽의 목소리는 가게 안의 끈적한 공기를 타고 뱀처럼 기어 다녔다. 가장 소중히 여겨야 할 생명을 품고 있던 그 숭고한 시간조차, 천박한 서종엽의 입안에서는 한낱 저급한 유희의 도구로 전락해버렸다.

“와, 이건 진짜… 완전 미친년 놈들이네, 이것들.”

도덕적 결벽증과는 거리가 먼 손용대 사업부장조차 예상치 못한 수위에 헛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룸 안에 모인 이들의 반응은 가관이었다. 누군가는 조소 섞인 감탄을 내뱉었고, 누군가는 저급한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웅성거렸다. 그들의 웃음소리와 웅성거림은 날카로운 파편이 되어 우진의 귓가를 어지럽게 맴돌았다.

하지만 우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평소와 다름없는 무표정 뒤에 숨겨진 그의 내면은, 이제껏 본 적 없는 차갑고 거대한 심연으로 변해 있었다. 그는 경악하지도, 분노를 표출하지도 않았다. 인간이라면 당연히 느껴야 할 그 어떤 감정의 파동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대신, 서종엽이 뱉어낸 모든 단어, 문장, 비열하게 웃던 입 모양, 심지어 그가 낄낄거릴 때마다 미세하게 떨리던 눈가의 주름까지 단 하나의 오차도 없이 뇌리에 새겼다.


회식을 마치고 돌아온 집은 고요했다. 현관 센서 등이 켜지며 우진의 그림자가 거실에 길게 드리워졌다. 거실 불을 켜자마자 안방에서 나온 유정의 날 선 목소리가 화살처럼 날아와 박혔다.

“왜 이렇게 늦었어? 애가 아빠만 찾으면서 계속 우는 바람에 겨우 재웠단 말이야. 나 지금 회계감사 기간이라 할 일이 산더미인데, 이럴 때는 회식 좀 알아서 피해주면 안 돼?”

우진이 이직한 후 처음으로 가진 회식이었지만, 유정에게 그런 상식적인 배려 따위는 없었다. 그녀는 지금 자신의 사회적 성공과 성취에 취해 있었다. 감사 자료 작성부터 대표이사 보고용 발표까지 자처하며, ‘완벽한 커리어 우먼’이라는 허상을 지키기 위해 우진의 희생을 당연하게 요구하고 있었다. 우진은 자신을 몰아세우는 유정의 얼굴 위로, 조금 전 서종엽이 묘사했던 ‘임신한 채로 호텔에 있던 여자’의 실루엣이 겹쳐 보였다.

우진은 대꾸 없이 욕실로 향했다. 몸에 밴 서종엽의 구역질 나는 천박한 웃음과 언어들을 씻어내듯 오래도록 물줄기를 맞았다. 피부가 벌겋게 달아오를 때까지 씻어내도, 귓가에 들러붙은 서종엽의 목소리는 좀처럼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임신한 여자랑 하는 맛’이라며 낄낄대던 그 소리가 샤워실 벽면을 타고 메아리쳤다.

샤워를 마친 우진은 조심스럽게 아이의 방문을 열었다. 곤히 잠든 아이의 속눈썹이 꿈을 꾸는지 파르르 떨렸다. 우진은 침대 곁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아이의 작은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가슴 한구석이 날카로운 송곳에 찔린 듯 지독하게 저려왔다.


주변 사람들은 우진이 아이를 품에 안은 뒤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입을 모았다.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던 차가운 AI 같던 남자가, 비로소 붉은 피가 흐르고 온기를 지닌 '인간'의 범주로 들어섰다며 신기해했다. 우진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마치 게임 속 캐릭터가 레벨을 올리며 새로운 스킬을 습득하듯, 그는 아이를 통해 ‘감정’이라는 미지의 영역을 하나씩 채득해 나갔다.

아이가 울면 마음 한구석이 찌릿하게 저려왔고, 아이가 맑게 웃으면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충만함이 전신을 감쌌다. ‘아이가 행복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은 우진의 뇌를 지배했다.

그는 아이와 함께하는 단 1초의 시간도 헛되이 쓰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부모와의 목욕이 아이의 정서 발달과 유대감 형성에 결정적이라는 육아 서적의 문장을 읽은 후로는, 아무리 피곤한 날에도 아이와 함께 욕조에 몸을 담갔다. 따뜻한 물속에서 아이의 작은 손발이 자신의 피부에 닿을 때마다, 우진은 형용할 수 없는 행복을 느꼈다. 부모가 아이 앞에서 싸우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아이에게 평생의 트라우마로 남을 수 있다는 어느 전문가의 의견에 우진은 어떤 상황에서도 유정 앞에서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아이가 눈을 맞추고, 말귀를 알아듣기 시작한 순간부터는 '사랑한다'라는 말을 단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처음에는 학습적으로 하던 사랑한다는 말을, 이제 자신의 진심을 담아 할 수 있게 되었다. 어느새 우진은 더 이상 육아 서적의 페이지를 떠올리지 않고도 아이를 향해 웃고 있었다. 인위적으로 쥐어짜 내던 애정은 실핏줄을 타고 흐르는 진심이 되었고, 우진은 이제 자신의 모든 논리를 초월하여 아이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다.


그렇게 우진은 변했다.


그런 아이를 두고 유정이 했던 행위들은 우진에게서 절대 용서받지 못할 것들이었다.


새벽의 푸르스름한 한기가 아직 거실을 떠나지 않은 아침, 우진은 평소와 다름없는 시각에 눈을 떴다. 샤워를 마친 그는 주방으로 향해 유정을 위한 정갈한 아침 식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식탁 너머 거실 책상에는 유정이 밤새 미팅 자료와 씨름하다 지쳐 쓰러진 듯 엎드려 잠들어 있었다. 우진은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죽인 채, 그녀의 구부정한 등 뒤로 얼음장보다 차가운 시선을 던졌다. 이윽고 유정이 부스스한 모습으로 일어나 뻐근한 목을 문지르며 우진을 향해 건조하게 말했다.

“오늘 아침은 안 먹을래. 오전 내내 중요한 미팅이라 괜히 먹었다가 탈 날 것 같아.”

유정이 씻으러 욕실로 들어간 사이, 거실에는 우진과 그녀가 남겨둔 노트북만이 남았다. 자료는 한눈에 봐도 유정이 얼마나 이 미팅에 자신의 커리어를 걸었는지 알 수 있을 만큼 공들인 흔적이 역력했다. 유정은 대학 시절부터 PPT 제작에 독보적인 재능을 보였다. 각종 공모전과 경연 대회를 휩쓸었던 그녀의 전매특허는 바로 ‘애니메이션 기능’의 절묘한 활용이었다. 자칫 수치와 도표로 가득해 지루해질 수 있는 기업 보고서에, 그녀는 시선을 가로채는 타이밍과 화려한 화면 전환 효과를 집어넣어 청중의 의식을 완벽하게 옭아매곤 했다.

이번 자료 역시 서론부터 마지막 결론 슬라이드까지 유정의 치밀한 설계와 욕망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우진은 그 화려한 화면 전환 뒤에 숨겨진 추악한 진실을 생각하며 조용히 노트북을 닫았다.


오전 11시.

평온하던 사내 인트라넷과 메신저는 비명 지르듯 울려댔고, 서종엽 부장과 김유정 과장의 불륜 스캔들은 건조한 숲에 떨어진 불씨처럼 사내망을 타고 들불처럼 번져 나갔다. 사람들의 눈동자에는 경악과 흥분, 그리고 추악한 호기심이 뒤섞여 번들거렸다.

이 거대한 폭발의 도화선은 엉뚱하게도 영업팀이 아닌 재무팀 한가운데, 서종엽의 아내이자 재무팀의 실무 수장인 신은미 부장의 손에 쥐여 있었다. 신은미는 지난 20년의 결혼 생활 동안 서종엽이라는 남자가 보여준 온갖 인간 이하의 본성을 묵묵히, 어쩌면 죽은 듯이 견뎌온 인물이었다. 남편의 상습적인 외도, 밑 빠진 독 같던 도박, 그리고 술에 취해 휘두르던 폭력까지. 그녀는 그 오물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가정을 지탱해 왔다.

그녀는 서종엽의 본성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그가 부서를 옮길 때마다 주변에 보이지 않는 ‘스파이’를 심어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해 왔다. 이것은 자신과 아이들의 미래를 지키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의 일환이었다. 과거에는 가정을 지키기 위해, 혹은 아이들의 아버지를 사회적으로 매장하지 않기 위해 문제를 덮어주기도 했다. 하지만 5년 전, 막내까지 대학에 보낸 그날부터 그녀의 목표는 단 하나로 좁혀졌다. 재산 분할 한 푼 없이, 단 1%의 유책 사유도 남기지 않고 이 부패한 남자와 완벽하게 결별하는 것. 법적인 자유와 경제적 독립을 쟁취하는 것이 그녀의 유일한 목표였다.

서종엽이 영업팀으로 쫓겨나듯 옮겨갔을 때도 그녀는 치밀했다. 평소 친분이 두터웠던 영업팀의 방기홍 대리에게 조용히 감시를 의뢰해 둔 상태였다.

“방 대리, 무리한 부탁인 거 알지만… 그 인간이 술 먹고 무슨 추태를 부리는지 좀 알려줘. 녹음이든 영상이든 상관없어.”

신은미의 촉은 틀리지 않았다. 서종엽은 어제 회식 자리에서 기고만장해져 차마 인간의 입으로 담지 못할 추잡한 발언들을 배설물처럼 쏟아냈다. 방 대리는 이를 빠짐없이 녹음해 그녀에게 전달했다.

신은미는 그날 밤 한숨도 자지 못했다.

남편이라는 이름의 악몽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환희와, 동시에 자신이 가장 아끼고 신뢰했던 후배 김유정에게 배신당했다는 참담함이 뒤섞여 그녀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특히 그 상대가 자신이 직접 뽑아 동생처럼 아꼈던 후배 김유정이라는 사실은, 그녀의 마음에 회복 불가능한 깊은 균열을 일으켰다.


오전 9시.

출근하자마자 유정이 밝은 미소를 띠며 신은미의 자리를 찾아왔다. 그녀는 단아한 정장 차림으로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부장님, 10시 대표이사님 보고용 최종 자료입니다. 검토 부탁드립니다.”

“응, 내가 보고 특이 사항 없으면 비서실로 넘길게.”

“네, 부장님! 저 어제 이거 만드느라 정말 죽는 줄 알았어요. 새벽까지 잠 한숨 못 자고 매달렸거든요. 여기 다크서클 좀 보세요, 부장님~ 저 오늘 끝나고 맛있는 거 사주셔야 해요!”

유정은 평소처럼 신은미에게 애교를 떨며 웃어 보였다. 어제 남편의 입을 통해 확인한 그 ‘질척한 관계’의 주인공이 내뱉는 천연덕스러운 연기에 신은미는 치가 떨렸다.

“…그래, 고생했어. 나가봐.”

유정은 자리로 돌아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평소 같았으면 농담 섞인 칭찬을 건넸을 신은미 부장이 오늘따라 유독 서늘했다. '갱년기인가? 아니면 어제 잠을 좀 설쳤나?' 유정은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키보드를 두드렸다. 그녀에게 신은미 부장은 이미 손바닥 안의 사람이었고, 그 권위는 자신이 마음껏 휘둘러도 안전한 방패막이에 불과했다.

반면, 신은미는 유정의 자료를 검토할 정신이 아니었다. 9시 30분까지 비서실에 자료를 넘겨야 했지만,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렸고, 모니터 속 글자들은 비릿한 욕설처럼 일렁였다.


오전 10시.

대회의실의 거대한 방음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회의실 내부의 공기는 문자 그대로 질식할 듯 팽팽했다. 이번 회계감사 오류는 단순한 실수를 넘어 기업의 존폐, 그리고 주주들의 신뢰와 직결된 사안이었다. 타원형의 거대한 테이블 주위로 각 사업부장과 CFO, 그리고 얼음처럼 냉철한 눈빛의 CEO까지, 이 조직을 지탱하는 모든 권력자가 자리를 채웠다.

곧이어 유정의 발표가 시작되었다. 그녀는 평소보다 더 생기 넘치는 목소리와 단정한 몸짓으로 좌중을 압도했다. 호감을 주는 단아한 외모와 청중의 시선을 자석처럼 옭아매는 화법은 오늘따라 유독 눈부시게 빛났다. 복잡한 수치들 사이로 핵심 지표를 날카롭게 짚어낼 때마다, 까다롭기로 유명한 임원들의 고개가 긍정적으로 끄덕여졌다. 유정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완벽한 무대를 만들고 있다고 확신했다.

발표가 중반으로 치달았을 때, 유정의 전매특허인 ‘Refresh’ 영상 슬라이드가 나타났다.

"잠시 머리를 식히는 의미에서 준비한 영상입니다."

유정이 상냥하게 웃으며 리모컨을 눌렀다. 회의 간사가 그에 맞춰 스피커 볼륨을 최대치로 높였다.

하지만 화면에 뜬 것은 평온한 풍경이 아니었다. 비릿한 술집의 소음과 함께, 누군가의 껄껄거리는 웃음소리가 회의실 전체에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이건 진짜 비밀인데… 지 애 가졌을 때도 나랑 그 짓을 했다니까. 나도 죄책감이 들었는데, 그게 또 스릴이 기가 막히더라고.”]

서종엽의 음성이었다. 유정을 자신의 노리개처럼 묘사하며 무용담을 늘어놓던 어제의 그 적나라한 녹취록. 음성이 끝날 때까지 회의실은 유황불이 떨어진 소돔과 고모라처럼 고요해졌다. 마지막 한 문장이 비수처럼 공간을 난도질한 뒤에야,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슬라이드가 넘어갔다.

유정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하얗게 질린 그녀의 얼굴 위로 프로젝터의 푸른 빛이 사정없이 쏟아졌다. 테이블에 앉은 모든 임원이 사형을 선고하는 판관처럼 그녀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 시선은 경멸을 넘어, 벌레를 보는 듯한 혐오로 가득 차 있었다.

“…죄송합니다.”

유정은 찢어지는 비명 같은 사과를 남기고 대회의실을 뛰쳐나갔다. 미팅은 잠정 중단되었고, 뒤이어 들어온 재무팀 이창섭 대리가 발표를 이어받아 겨우 마무리했다.


폭로는 단 찰나였으나 그 파장은 영원할 것처럼 집요했다. 사내 인트라넷을 타고 흐르는 소문은 신경독처럼 전 직원의 뇌를 마비시켰다. 사람들에게는 이제 누가 그 치명적인 녹취를 했는지, 혹은 어째서 신성해야 할 공식 발표 자료에 그런 추잡한 음성이 섞여 들어갔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진실의 출처를 따지기에는 그들이 마주한 배설물 같은 진실 자체가 너무나도 자극적이고 적나라했다.

단아하고 유능한 업무 처리로 모든 이의 신망을 받던 ‘김유정 과장’이라는 우상은 단 한 순간에 박살 났다. 그녀는 자신의 뱃속에 새 생명을 품고서도 다른 남자와 금기를 탐닉한, 차마 입에 담기조차 민망한 존재로 전락했다. 사람들은 그녀의 이름 뒤에 ‘창녀’라는 낙인을 찍으며, 자신들의 도덕적 우월감을 만끽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소문은 생물처럼 움직이며 스스로 흉측한 살을 붙여나갔다. 복도를 스쳐 지나가는 눈빛 하나, 탕비실의 짧은 속삭임 하나가 거대한 괴물의 먹이가 되었다.

“그 집 아이 말이야, 서 부장을 쏙 빼닮았다는 소문 들었어? 유전자 검사라도 해봐야 하는 거 아냐?”
“신 부장님한테 복수하려고 일부러 접근했다는 얘기도 있더라고. 그 정도로 독한 여자라니까.”

온갖 추측과 악의적인 비난이 사내 익명 게시판과 직원들의 단톡방에 도배됐다. 사실 여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대중은 이미 유정을 단두대 위에 세웠고, 그들은 각자의 정의감이라는 이름의 돌을 던지며 즐거워했다.

미팅이 참담하게 끝난 직후, 이금희 CFO는 신은미 부장을 자신의 집무실로 긴급 호출했다. 무거운 정적이 감도는 방 안에서 이금희는 서류 뭉치를 테이블 위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자료 검토 미흡에 대한 책임은 피할 수 없을 겁니다, 신 부장.”

형식적인 문책이 이어졌으나 이금희의 목소리에는 힘이 실리지 않았다. 그것은 조직의 기강을 잡기 위한 최소한의 절차일 뿐이었다. 질책의 끝에서 이금희는 안경을 벗어 지친 눈가를 만졌다. 그녀는 20년 지기 남편의 추악한 배신과, 친동생처럼 아꼈던 후배의 기만을 한꺼번에 목도해야 하는 동료를 향해 짧고 무거운 위로를 건넸다.

“…하지만 신 부장, 나도 한 사람의 아내로서 당신이 겪은 이 지옥을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네요. 오늘은 일단 들어가 봐요. 남은 건 내가 수습할 테니.”

그 위로는 따뜻했으나, 신은미의 가슴 속에 이미 타버린 잿더미를 되돌릴 수는 없었다. 문을 닫고 나오는 신은미의 뒤로, 사무실 가득 찬 비릿한 시선들이 그녀의 등에 꽂혔다.


사내의 모든 손가락질이 자신을 향해도 서종엽은 기이할 정도로 당당했다. 아니, 그것은 인간의 품위를 지닌 당당함이 아니었다. 벼랑 끝에 몰린 짐승이 내지르는 비열한 비명이자, 어떻게든 타인의 살점을 물어뜯어 제 목숨을 부지하려는 추악한 생존 본능에 가까웠다.

“그년이 먼저 작정하고 꼬리 쳐서 이렇게 된 거라고! 젊고 예쁜 여자가 작정하고 덤벼드는데, 이 세상에 안 넘어갈 남자가 어디 있어! 나도 피해자야, 피해자!”

그는 사무실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며 모든 책임을 유정에게 전가했다. 핏발 선 눈으로 주변을 훑으며 내뱉는 그의 궤변은 비릿했다. 혼자서는 절대 죽지 않겠다는 듯, 자신의 천박한 행위에 '불가항력적인 남성성'이라는 허울 좋은 정당성을 부여하는 모습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헛구역질을 불러일으킬 만큼 비루했다..

“올해 마가 끼었나, 되는 일이 하나도 없네. 씨발, 재수가 없으려니 별일이 다 생겨!”


유정은 그날 이후 회사에 나타나지 않았다. 집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는 증발하듯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텅 빈 거실에서 유정을 찾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진도, 심지어 그녀의 전부라 믿었던 아이조차 유정의 부재를 눈치채지 못한 듯 평온한 일상을 살고 있었다. 유정이라는 존재 자체가 그들의 삶에서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일주일이 흘렀을까. 우진 앞으로 두꺼운 종이봉투 하나가 배달되었다. 유정의 마지막 흔적이었다. 정갈하게 써 내려간 글씨체는 역설적으로 그 안에 담긴 절망을 더욱 날카롭게 드러냈다. 흔들림 없는 획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붙잡고 있었을 서늘한 이성이 묻어 있었다.

To. 우진
"무슨 말이 필요하겠어. 다 내가 잘못한걸. 변명하자면 당신과 살면서 매 순간 숨이 막히고 답답했어. 마치 정교하게 프로그래밍 된 로봇과 한집에 사는 기분이었달까? 우리가 단 한 번이라도 진심으로 감정을 교류했던 적이 있었나 싶어.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차분하게 해결하는 당신이 멋져 보인다고 말했지만 사실 나는 당신이 무서웠어. 기쁠 때 웃지 않고 슬플 때 울지 않는 당신을 보며 보통의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확신이 들었어. 당신한테 군대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정말 소름이 돋았어. 그리고 내 확신은 굳어졌어. 당신은 우리와는 다른 존재라는걸."

우진은 미동도 없는 무표정한 얼굴로 문장을 읽어 내려갔다. 시선이 활자 위를 스칠 때마다 귓가에는 유정의 떨리는 목소리가 환청처럼 감돌았다. 울먹임을 참으며 내뱉었을 서늘한 원망들이 정적을 깨고 입체적으로 살아났다.

우진의 손가락 끝에 힘이 들어가며 빳빳하던 종이 귀퉁이가 비명 없이 짓이겨졌다. 머릿속에서는 지독한 불협화음이 몰아쳤다. 군 시절의 트라우마를 털어놓았을 때, 젖은 눈으로 손을 맞잡으며 위로하던 유정의 얼굴이 잔상처럼 겹쳐졌다. 그때 그녀가 보여준 눈물은 연민이었을까, 아니면 완벽한 연출이었을까. 가장 깊은 상처까지 열어 보였던 자신의 무방비함이 수치스러웠다. 따뜻했던 숨결도, 어깨를 감싸던 온기도 모두 기만이라는 단어 아래 차갑게 식어갔다.

"당신은 평생 숨바꼭질을 하고 있는 거야. 그 끔찍한 본능을 깊숙이 숨기고 살아가지만, 누군가 신경을 조금이라도 거스르면 술래에게 덜미를 잡히듯 그 본능이 튀어나오지. 상대를 잔인하게 파괴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괴물 같은 본능 말이야."

편지는 비명 같은 간절함과 저주로 가득 찼다. 우진은 문장들을 하나하나 곱씹으며, 자신이 그토록 숨기고 싶어 했던 심연 속 괴물과 눈이 마주치는 기분을 느꼈다.

"제발 우리 기준이에게는 그러지 말아 줘. 회사에 아이가 당신 자식이 아니라는 소문이 나돈다는데, 설마 그걸 믿는 건 아니지? 당신이라는 인간을 알기에 그 소문만으로 아이에게 어떤 일이 생길까 봐 너무 불안해. 조금이라도 의심된다면 당장 친자확인을 해도 좋으니까, 기준이에게는 어떤 나쁜 짓도 하지 마. 내 마지막 부탁이야."

이어지는 문장들은 눈물 자국으로 얼룩져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번져 있었다.

"만약 이 약속을 어긴다면 난 죽어서라도 당신을 지옥으로 끌고 갈 거야. 당신이 기준이 옆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제대로 눈을 감을 수 없을 것 같아. 분명히 말하지만, 당신 곁에 있으면 그 아이는 당신과 똑같은 삶을 살게 될 거야. 부디 아이만은 당신처럼 살지 않길 바래."

우진은 편지를 덮었다. 집 안의 모든 소음이 잦아든 듯 정적이 내려앉았고, 시계의 초침 소리만이 메스로 공기를 가르는 듯 날카롭게 고막을 때렸다.

유정은 끝내 우진을 이해하지 못했고, 우진 또한 그녀를 용서할 수 없었다. 유정은 우진을 괴물이라 불렀지만, 정작 아이를 품고 다른 남자와 몸을 섞은 괴물은 그녀 자신이었다. 유정의 마지막 저주가 담긴 편지는 우진의 손안에서 무참히 구겨진 채 쓰레기통으로 향했다.


며칠 뒤, 눅눅한 빗줄기가 쏟아지던 오후에 경찰서에서 연락이 왔다. 휴대폰 너머 낯선 형사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한 여자가 강물에 투신했다는 신고가 접수됐고, 하류 인근에서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신분증 확인 결과, 유정이었다. 형사는 병원 영안실로 와달라는 짧은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우진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창밖을 보았다. 비에 젖은 아스팔트 위로 붉은 자동차 후미등이 번지고 있었다.

그로부터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유정의 장례는 고요 속에 치러졌다. 부고를 접한 회사 사람 중 누구도 선뜻 조문을 나서지 못했다. 직계 가족만 참석한다는 공지가 있었기 때문인지, 그녀의 마지막 길은 그 어느 장례식보다 쓸쓸하고 초라했다.

우진은 개인 사정을 이유로 일주일간 휴가를 내고 묵묵히 상주 자리를 지켰다. 결국 회사 사람들은 두 사람이 부부였다는 사실을 끝내 알지 못했다.


복귀 첫날, 우진의 행보는 거침이 없었다. 그는 마치 오랫동안 멈춰있던 정밀 기계를 다시 가동하듯 차분하게 집무실 의자에 앉아, 사전에 은밀히 호출했던 업체 대표들과 차례로 미팅을 진행했다. 집무실 안에는 낮게 깔린 긴장감이 감돌았다. 우진의 맞은편에 앉은 이들은 서종엽과 리베이트 커넥션이 의심되던 총 4개의 핵심 협력업체 관계자들이었다.

우진은 어떠한 감정도 섞이지 않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준비된 서류를 내밀었다. 압박감에 못 이긴 한 업체 대표가 결국 마른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네, 맞습니다. 숨길 수가 없군요. 원래 저희가 제안했던 적정 견적은 세트당 100만 원이었습니다. 하지만 서종엽 부장이 직접 연락해 견적서를 300만 원으로 부풀려 다시 작성해 오라고 강요했습니다. 그렇게 발행된 300만 원짜리 세금계산서로 대금이 지급되면, 차액의 50%인 150만 원을 지정된 차명 계좌로 즉시 송금하라고 지시했죠. 저희 같은 하청업체 입장에서는 그 지시를 거부하는 순간 거래 절벽이라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사 결과, 서종엽의 수법은 대담하고도 반복적이었다. 그는 동일한 수법으로 이 4개 업체를 갈취해왔으며, 지난 1년간 챙긴 뒷돈만 무려 2억 원에 달했다. 회사의 이익을 좀먹으며 자신의 배를 불려온 파렴치한 행각이었다.

이 결정적인 단서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구매팀 석봉현 차장의 예리한 제보 덕분이었다. 경영 기조에 따라 원가절감 TF를 이끌던 봉현은 장비 재료비 리스트를 점검하던 중, 시장가보다 몇 배 이상 높게 책정된 특정 품목들을 발견하고 우진에게 은밀히 자료를 넘겼다. 우진은 이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달간 자금 흐름을 추적했고, 마침내 서종엽의 더러운 업적 리스트에 ‘횡령’이라는 확실한 한 줄을 추가할 수 있었다.

서종엽이 저지른 부정부패의 늪은 생각보다 훨씬 깊고 방대했다. 우진의 손에 들린 법인카드 사용 내역서는 단순한 지출 결의서가 아니라, 서종엽이라는 인간의 도덕적 파멸을 증명하는 고발장이었다.

우진은 형광펜으로 특정 대목들을 하나하나 그어 내려갔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회사 전용 대리운전 서비스의 이용 기록이었다. 업무가 한창이어야 할 오후 3시, 강남의 유흥가 밀집 지역에서 호출된 기록이 한두 건이 아니었다. 이는 서종엽이 대낮부터 회사 공금을 사용하여 술판을 벌였다는 명백하고도 빼도 박도 못할 물증이었다. 비즈니스 미팅이라는 허울 좋은 핑계는 데이터 앞에서 무력하게 바스러졌다.

그의 방종은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강남의 화려한 조명 아래 숨겨진 고급 요정에서의 거액 결제는 물론이고, 백화점 명품관과 고가의 전자기기 매장에서 개인적인 욕망을 채우기 위해 긁어댄 카드 전표들이 우진의 책상 위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서종엽은 회사의 공금을 마치 자신의 비밀 비자금이나 주머니 속 쌈짓돈처럼 여기며 거리낌 없이 휘둘러온 것이었다.

기업 내 투명 경영과 윤리 의식이 그 어느 때보다 강조되는 시기에 이러한 행태는 단순한 징계를 넘어 사법 처리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우진은 서류 끝에 적힌 총합계를 보며 차갑게 냉소했다. 탐욕에 눈이 멀어 자신이 밟고 선 땅이 무너지는 줄도 몰랐던 서종엽의 끝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우진 서종엽을 호출했다. 공교롭게도 그날은 연간 최종 성적표가 발표되는 날이었다. 지난 1년 동안 서종엽은 마치 자신의 생존을 증명하려는 듯 광적으로 실적에 집착했다. 그는 자신이 과거에 저질렀던 과오나 타인에게 안겼던 상처 따위는 까맣게 잊은 채, 오로지 숫자가 주는 권력에 취해 있었다.

서종엽은 문을 열고 들어오며 승리자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는 이번 성적표가 높은 고과와 막대한 인센티브는 물론, 탄탄대로의 미래를 약속하는 ‘절대적인 보증수표’가 되리라 굳게 믿었다. 기고만장한 태도로 우진의 맞은편에 앉은 그의 얼굴은, 자신을 부른 이유가 당연히 찬사와 보상일 것이라 확신하는 아이처럼 환하게 들떠 있었다. 하지만 우진의 손에서 종엽에게 건네진 것은 두툼한 봉투가 아닌, 단 세 장의 종이로 이루어진 ‘해고 통보서’였다.

“부장님, 지난 1년간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덕분에 팀 실적이 역대 최고치를 경신했네요. 이제는… 정말 편히 쉬셔도 될 것 같습니다.”

우진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차분하고 부드러웠다. 그러나 고정된 시선과 흔들림 없는 눈동자에는 일말의 연민이나 인간적인 감정이 소거되어 있었다. 서종엽은 눈앞의 서류를 믿을 수 없다는 듯 손을 떨었다. 그는 최고 매출을 근거로 이것은 명백한 부당해고이며, 회사의 기여도를 무시하는 처사라고 고성을 지르며 항변했다.

우진은 광분하는 서종엽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서류 한 뭉치를 더 내밀었다. 그 안에는 서종엽이 실적을 쌓는 과정에서 자행했던 법인카드 오남용, 거래처 리베이트 수수, 부하 직원들에 대한 직장 내 괴롭힘 등 그를 법적으로 매장할 명분들이 차고 넘치게 정리되어 있었다.

서종엽은 그제야 깨달았다. 지난 1년 동안 피를 말려가며 일궈낸 그 ‘역대급 실적’은 자신을 구원할 동아줄이 아니었다. 그것은 우진이 서종엽의 고통을 극대화하기 위해 그의 마지막 한 방울의 생명력까지 정교하게 짜내어 만든 '단두대의 발판'에 불과했다. 우진은 서종엽이 가진 탐욕과 생존 본능을 정확히 계산에 넣고 그를 조종했다. 절망의 끝에서 보여준 아주 작은 희망이라는 미끼를 물고, 서종엽은 제 발로 맷돌 속으로 들어가 스스로를 갈아 넣었다. 우진은 그저 그 맷돌의 손잡이를 차분히 돌리고 있었을 뿐이다. 우진은 처음부터 그를 용서할 생각도, 동행할 의지도 없었다. 그저 서종엽은 우진에게 에너지가 남아있는 동안 가장 효율적으로 부려 먹어야 할 ‘단기 소모품’이었을 뿐이었다.

우진은 서종엽을 기계처럼 혹사하며 조직의 이익을 극대화했고, 부품이 다 마모되어 쓸모가 없어지기도 전, 즉 서종엽이 자신의 성공을 확신하며 가장 기고만장해진 바로 그 찰나에 ‘용도 폐기’의 낙인을 찍었다.

서종엽의 파멸은 회사 밖에서도 기다리고 있었다. 해고 통보를 받은 지 불과 몇 주 뒤, 그의 손에는 아내 신은미로부터 온 이혼 소장이 들려 있었다. 서종엽이 가정에 소홀하며 밖으로 나돌았던 기간 동안, 그간 숨겨왔던 과거의 외도 증거와 술에 취해 휘둘렀던 가정폭력의 기록들이 정교하게 수집되어 칼날이 되어 돌아왔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는 재산 분할에서 단 한 푼도 건지지 못한 채 맨몸으로 집에서 쫓겨났다. 평소 그를 '가정폭력범'으로만 보던 자식들은 냉담하게 등을 돌렸고, 법원은 그의 귀책 사유를 근거로 자식들과의 접견권마저 박탈했다. 서종엽은 이제 이름만 남은 가장이자, 사회적으로도 가정적으로도 완전히 거세된 존재가 되었다.

자신이 이룬 가짜 성취감에 취해 오만함이 하늘을 찌를 때, 서종엽은 모든 것을 잃고 깊은 절망 속에 빠졌다. 그곳에서야 비로소 그는 자신이 그동안 다른 사람들에게 주었던 상처의 무게를 깨닫게 되었다. 고통은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닌, 자신의 몫이 되었다.


우진과 유정, 그리고 서종엽. 얽히고설켰던 그 지독한 악연의 끈은 마침내 그렇게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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