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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언 Jul 22. 2024

“K가 남긴 이야기들을 찬찬히 톺아보겠다고”

K에 관한 심리부검 보고서 3

검사님, 첫번째 조사 때부터 말씀드렸지만, 저는 이번 고소 건에서 저의 업무방해 혐의 전부를 인정합니다. 


맞습니다. 저는 자살방지위원회로부터 심리부검 인터뷰어직을 제안 받았고, 이 건으로 면접을 볼 때 죽은 K와 동아리 선·후배 사이였다는 사실을 숨겼습니다. 위원회 내규엔 ‘객관성의 담보를 위해 심리부검 인터뷰어는 망자와는 무관한 제3의 인물이어야 한다. 따라서 인터뷰어는 본 위원회와의 면접 과정에서 망자와의 친분 유무를 반드시 언급해야 한다’는 내용이 있었고요. 따라서 저는 위원회의 적법한 업무를 방해한 게 맞습니다. 지금도 저를 믿고 일을 맡겨주신 위원회 측엔 죄송스런 마음이고요. 검사님도 저 도와주려 이러시는 거 잘 압니다. 다만,


반성한다는 말씀을 드리긴 어렵다는 제 입장이 변하진 않을 것 같습니다. ‘반성한다’는 말은 과거로 돌아갔을 때 다른 선택을 할 용의가 있을 때 비로소 성립하는 문장이라 생각합니다.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 해도 아마 같은 선택을 할 거란 뜻입니다. 왜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심리부검이란 타이틀이 없었다면, 그간 인터뷰이 분들이 제게 쉽게 입을 여시진 않았겠죠. 그리고 무엇보다... 그냥 그땐 그래야만 직업인으로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가슴을 펴고 살아갈 수 있으리란 예감이 들었습니다. 아마,


6개월쯤 됐을 겁니다. 사무실로 K의 어머님이 전화를 주셨어요. K가 생전에 제 인터뷰집을 읽으며 같은 동아리 선배라고 자랑했던 걸 기억하고 계셨던 거죠. 아들의 심리부검을 맡을 사람을 찾는다던데, 제가 그 일을 꼭 맡아달라고. 아들의 고민과 고뇌, 인간적 약점 같은 것들이 낱낱이 드러날텐데 학교 선배인 제가 맡아야 안심하실 수 있겠다고요. 공교로운 날이었죠. 자살방지위원회로부터 K의 심리부검 인터뷰어 제안 메일을 받은 당일이었으니까요.


물론 저는 업계 종사자로서, 망자와 친분 관계인 사람이 심리부검에 참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사실, 세 학번 아래였던 K를 그리 잘 알지도 못했고요. 제안을 거절하는 메일은 단지 시간이 없어서 곧장 못 썼을 뿐입니다. 어머님께도 그렇게 말씀드리고 전화를 끊었어요. 근데요 검사님, 


집으로 돌아와보니 생전에 K가 읽었다던 제 인터뷰집이 책상에 펼쳐져 있더군요. 저자와의 만남 행사 전까지 책 스무 권에 사인을 해야 했거든요. 출판사에서 사인과 함께 요청한 친필 문구가 좀 길어서 며칠씩 애를 먹던 참이었죠. 제가 책 서문에 썼던 문장인데, 대강 이렇습니다. “모든 사람은 저마다의 내밀한 이야기를 갖고 있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한번쯤은,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을 자신의 대단치 않은 이야기를 말할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부끄러웠던 것 같습니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이야기를 말할 기회가 한번은 주어져야 한다면서, 그 폼나는 문장 옆에 평소 쓰지도 않는 영문 사인까지 휘갈기는 주제에, 정작 그 기회를 가져보지 못한 채 혼자 떠난 후배의 이야기는 저만치 내친 저 자신이요. 그날 밤 위스키를 반병쯤 비우고,


K 어머님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안 자고 우셨는지 목소리에 물기가 서렸던 게 기억납니다. 하늘에서 K가 답답하거나 부끄러워 할일 없도록, K가 남기고 간 이야기들을 찬찬히 톺아보겠다고 약속드렸어요. 제 범행 동기는 이게 답니다. 아 예, 괜찮습니다. 이제 정말 담배 끊어야죠.


K에 관한 인터뷰는 어제가 마지막이었습니다. 인터뷰 대상은 K의 어머님이셨죠. 제 검찰 송치 소식을 기사로 읽으셨는지 미안하다며 제 손을 꽉 잡고 우셨어요. 양 손목에 감으신 붕대에서 파스 냄새가 향수처럼 풍기더군요. 부군과 사별하고 줄곧 마트 캐셔로 일하셨다고. 때문에 K는 어릴 때부터 집에서 혼자 밥 차려먹고, 책을 읽으며 혼자 컸다고 하셨어요. 속 썩이지 않고 일찍 철든 아들을 자랑스러워하면 안 되는 거였다고도 후회하셨죠.


마지막으로 K에게 하고 싶은 말을 여쭙자 별안간 웬 소설책 하나를 꺼내 보여주시더라고요. K가 살던 원룸 침대 머리맡에 놓여 있었대요. 그 책의 딱 한 문장에만 밑줄이 진하게 쳐져 있었는데, 그걸 읽고 한참을 서서 우셨다고 해요. 그리고는 ‘엄마가 너한테 이런 존재가 돼 주지 못해서 미안해’라고 하셨어요. 아마 이런 문장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녀는 세상 사람들이 지적하는 예민하고 우울한 기질을 섬세함으로, 특별한 정서적 능력으로 이해해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아줌마의 애정이 담긴 시선 속에서 엄마는 사랑받아 마땅한 사람으로 보였다”

- 『쇼코의 미소』, ‘씬짜오, 씬짜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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