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잡문집

나의 글을 쓴다는 것

민망함보다 강렬한 것은 그리움이다

by 시언


"너는 글을 잘 쓰니 작가가 되면 좋겠구나"


새로 부임하신 초등학교 6학년 담임 선생님은 내가 쓴 독후감을 보며 그렇게 말했다. 철 모르던 시골 소년이 세상으로부터 처음 받은 칭찬이었다. 방과 후 집으로 달려가 엄마를 붙잡고 "나는 작가가 될 거야 엄마!"라고 외쳤던 기억이 아직까지 생생하다. 엄마는 흙이 말라붙은 두 손으로 내 어깨를 감싸며 빙그레 웃으셨다. 그 날 이후 작가가 정확히 뭐하는 사람인지도 몰랐던 소년의 꿈은 작가가 되었다.

돌이켜 보면 참 열심히도 썼다. 꾸준히 글을 쓰다보면 어느 순간 작가가 되어 있는 줄로만 알았던 시절이었다. 어린 나는 하루 빨리 작가가 되기 위해 키보드에 비해 턱없이 작은 손으로 집 홈페이지에 꾸역꾸역 글을 썼다. 민망한 말이지만, 저땐 내 글이 썩 잘 쓴 편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어렴풋이 아는 사자성어를 잘못 인용했다가 망신을 당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그림자 제왕님을 생각할 때마다 정말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도 작가가 꿈 입니다.

그 꿈을 위해 많은 책을 읽었지만 제왕님의 이야기가 가장 동경되고 동정이 됩니다.

항상 동경하며...'

- 2006413, 소설 <꿈 꾸는 책들의 도시> 서평 중


당시 내가 선택한 글의 장르는 '서평'이었다. 접할 수 있는 글이라곤 주일마다 읍내에서 사왔던 소설책 몇 권이 전부였던 내게 서평은 가장 진입장벽이 낮은 작문법이었다. 좀 더 대단한 서평을 써야 한다는 생각에 <파우스트>, <신곡>, <황야의 이리> 등 난해한 책들과 매일 밤 씨름했다. 미련할만큼 순진했지만 그만큼의 치열함이 공존하던 때였다.


허나 어느 순간부터 나는 작가가 되기 위한 글쓰기를 놓아 버렸다. 나의 글쓰기는 단순 비평에서 창작으로 넘어가지 못했다. 내 예상과는 달리 나보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은 차고 넘쳤고, 그간 어른들이 보낸 박수와 격려도 '나의 글'이 아닌 '내가 읽은 책'에 보낸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시간은 날 어른이 되게 했지만, 강해지게 하지는 않은 것 같아.

시간은 날 어른이 되게 했지만, 그만큼 더 바보로 만든 것 같아.'

- 넬(Nell), <청춘연가>


잘써야 한다는 강박이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텅 빈 모니터에 깜빡이는 커서를 감당하기 벅찼다. 비평 작품을 선정하는데 '대중적으로 호평 받은 작품인가'를 우선 고려하는 내 모습이 비루해 보였다. 읽은 사람들의 반응에 따라 하루에도 몇 번씩 우울과 행복을 오가길 반복했다. 난 이 정도 밖에 안되는 걸까... 간신히 탈고한 비평을 보고 있으면 내 의도와는 관계없이 태어난 사생아 같았다. 글을 쓰는 게 점점 두려워 졌다.


'13년 전에 쓴 자기의 글을 다시 읽는 것은, 마치 밤에 쓴 글을 낮에 읽는 것만큼이나 민망한 일이다. 감상적 어조로 쓴 부분은 특히 그러하다. 그 글을 쓰던 청년의 몸속에 지금은 중년의 사내가 들어앉아 있다. 옛 글을 다시 읽는 민망한보다 강렬한 것은 그리움이다.'

- 진중권, <앙겔루스 노부스>


문득, 한심해졌고 또 그리워 졌다. 나의 생활에서 직접 길어낸 소재들 대신 다른 예술가들의 창작물을 비평하는 것에 그치는 내가 한심했고,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내키는대로 나를 표현했던 어린 날의 내가 그리웠다. 물론 내 비평을 높게 평가해주신 분들을 잊거나 한 건 아니다. 내가 부끄러워 하는 건 비평마저도 자기 검열을 통한 후에야 안심하게 되는 무사안일함이다.

<출처=http://www.imgrum.net/tag/%ED%85%85%EB%B9%88%EA%B7%B9%EC%9E%A5>



그래서 다시 시작해 보려 한다. 정해진 형식도, 분량도 없다. 비평이 될수도, 엽편 소설이 될수도, 수필이 될 수도, 칼럼이 될 수도 있다. 그저 '잡문'에야 그치고말 글이라 해도 기어이 다시 써보려 한다. '쓰고 싶은 글을 쓴다'는 목적만이 최고의 윤리이던 그때 그 시절처럼. 다시 한번. 남들이 아닌 나를 위한, 내가 되고 싶은 뭔가를 위한 글을 써보고자 한다.


* 새로운 매거진 '잡문집'을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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