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울에 즐기는 여름철 별미
오디오에서 커스텀이라는 단어는 조금씩 다른 의미로 사용됩니다. 커스텀 이어폰은 세상에서 오직 나의 귀만을 위해 제작하는 맞춤 제작의 의미를 가지고요. 커스텀 케이블은 이어폰의 기본 구성품에 포함되지 않은 별매의 케이블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의미들을 조금 더 넓은 의미 속에 포괄한다면 ‘주문 제작’ 정도로 묶어볼 수 있겠습니다.
오디지 LCD-24는 주문 제작을 통해서만 구입이 가능한 커스텀 헤드폰입니다.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LCD-24는 커스텀 이어폰처럼 나에게 맞추기 위해 특별히 제작하는 제품도, 그렇다고 커스텀 케이블처럼 무언가 다른 제품과 함께 사용할 요량으로 별도 구매하는 제품도 아닙니다. 단지 주문 후 제작 방식을 통해 꼭 이 제품을 사야겠다고 의뢰한 사람에게만 만들어서 판매합니다. 대체 왜 그럴까요?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디자인과 스펙은 별 차이가 없다
여느 오디지 플래그십 제품과 마찬가지로 LCD-24는 큼지막한 트래블 케이스에 담겨져 옵니다. 사실 겉으로 보기에는 여느 LCD 제품들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이어컵 바깥쪽의 내부 그릴 색상에 차이가 있을 뿐 LCD-4Z와 굉장히 유사한 모양새입니다. 참고로 LCD-24의 공식 무게는 540g으로 600g인 LCD-4Z보다 살짝 가벼운 수준입니다. 요전 LCD-1을 다루면서 오디지가 이제 유저들의 목 건강도 생각을 해주나 싶었는데 그건 제 착각이었나 봅니다.
스펙만 봐서는 도대체 LCD-24가 왜 다른 제품과 달리 특별 대우를 받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제껏 오디지가 자랑하던 기술들을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그래서 이번 리뷰에서는 굳이 LCD-24의 스펙 설명에 지면을 낭비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래도 궁금하신 분들은 여느 LCD 제품들의 리뷰를 찾아보시면 매우 상세하게 다루어져 있을 테니 참고하시면 되겠습니다. 과감하게 패스하고 다음으로 넘어갑시다.
오디지 사운드란?
결국 LCD-24의 제작 방식에 대한 궁금증을 풀 단서는 딱 하나, 제품의 소리를 통해서만 찾을 수 있을 듯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기존 오디지 제품들이 쌓아온 전형적인 오디지 사운드를 짚을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오디지’하면 머릿속에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시나요? 당연히 ‘평판형 헤드폰’이 떠오를 테고요, 제 머릿속에서 오디지는 '남성적인 섬세함’이라는 소리 성향을 띄는 브랜드로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오디지 외에 평판형 헤드폰으로 유명한 브랜드가 몇 있지요. 하이파이맨과 전 미스터 스피커즈, 현 댄클락 오디오입니다. 오디지까지 포함하여 이 세 브랜드는 자사의 주력 헤드폰으로 평판형 방식을 사용합니다. 하지만 세 브랜드의 소리 성향은 극명하게 나뉘는데 소리의 성향을 기준으로 나열시킨다면 오디지는 두 브랜드의 중간에 위치시킬 수 있을 듯합니다.
댄클락 오디오는 전형적인 아메리칸 스타일에 가깝습니다. 마치 머스탱처럼 남성적이고 저돌적인 성격으로 밀도 높고 묵직한 소리를 들려줍니다. 이 반대쪽에는 하이파이맨 제품이 위치합니다. 고운 비단결 같은 섬세한 입자감으로 하늘하늘한 소리가 매력적이지요. 이에 비한다면 오디지는 박력과 섬세함 둘 사이에서 균형을 잘 잡고 나아갑니다. 국내에서 상대적으로 오디지 제품의 인지도가 높은 이유 중 하나도 아마 어느 한 쪽에 특별히 치우치지 않은 밸런스 잡힌 사운드 덕분에 보다 많은 유저층의 호응을 이끌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아, 오디지가 밸런스를 무시하는 부분이 하나 있긴 합니다. 무게요.
좋은 소리를 위해선 어느 한 부분 부족함이 없어야 하겠지만 개인적으로 소리를 판단하는 데에 저역의 표현력이 굉장히 큰 부분을 차지한다고 생각합니다. 소리의 재생에서 저역은 건축으로 치자면 기반에 해당합니다. 바닥을 단단히 다지고 그 위에 기둥을 세우지 않으면 이후 아무리 치장을 한다 해도 그 건물은 사상누각과 같습니다. 저역이 아래에서 듬직하게 중심을 잡아주어야 그 위에서 중역과 고역이 춤을 추고 멀리 뻗어나갈 수 있습니다. 2015년 말 출시된 LCD-4가 여전히 최상위급 사운드라는 평을 받으며 자리를 지키는 이유도 바로 질 좋은 저역을 바탕으로 밀도와 공간감을 모두 잡았기 때문일 겁니다.
물론 LCD 시리즈 사이에서도 제품에 따른 소리차가 존재합니다. 하지만 큰 틀에서 보자면 이 녀석들은 비슷한 노선을 밟아 나갑니다. 질 좋은 저역과 어느 정도의 밀도감, 그리고 공간감. 제가 앞서 오디지를 두고 남성적인 섬세함이라 표현한 것은 여기에 기인합니다.
반짝이는 별들이 쏟아지다
LCD-24는 무언가 좀 다릅니다. 기존의 오디지 사운드를 생각하고 LCD-24를 들으면 당혹스러운 느낌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리뷰를 준비하면서 곰곰이 생각해본 결과, 저는 LCD-24가 오디지에서 내놓은 별미 같은 제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LCD-24 제품 소개 페이지에는 이 제품을 오디지의 CTO가 특별히 기획하는 Pet Project 중 하나라 설명합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LCD-24가 대중적인 기호를 위해 만들어진 제품이 아니라는 추측을 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면 LCD-24는 자사의 기술력을 총동원하여 순전 오디지 최고 기술자의 입맛에 맞게 소리를 조율한 헤드폰인 겁니다.
그로 인해 LCD-24는 지금까지의 LCD 제품들과 토널 밸런스가 달라졌습니다. 기존의 듬직하게 무게를 잡아주던 저역의 존재감이 줄어든 대신 중고역이 한껏 화사해졌습니다. 단, 토널 밸런스가 달라졌을 뿐 소리의 밀도나 입자감은 기존 오디지 제품들과 궤를 같이 합니다. 앞서 저역이 부실한 경우 자칫 소리 자체가 무너질 수도 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LCD-24는 저역의 양감이 줄어들었을 뿐 저역의 밀도가 떨어진 것은 아닙니다. 저, 중, 고 전 음역대에 걸쳐 알맹이가 단단한 또랑또랑한 소리를 들려줍니다. 그래서 LCD-24를 단순히 중고역 성향의 가벼운 사운드라 치부하는 것은 적절치 않습니다.
올해는 1977년부터 이어진 스타워즈 시리즈가 9부작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 해입니다. 스타워즈 팬들 중에는 진정한 시리즈는 진작에 끝났다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계시지만..(저도 동의하지만..) 어찌 되었든 공식적인 마무리라 할 수 있으니까요. 스타워즈 하면 떠오르는 OST, 메인 타이틀은 만들어진 지 몇십 년이 지난 지금 들어도 우주를 배경으로 하는 SF 영화에 완벽하게 어울리는 멜로디와 곡 구성이라고 생각합니다. LCD-24로 듣는 스타워즈 메인 테마는 곡의 시작부터 귓속에 수많은 별들이 쏟아져 내립니다. 평소보다 무대가 조금 위쪽으로 올라가지만 마치 아이맥스 영화관에서 보는 것처럼 좌우로 넓게 펼쳐진 무대 속에서 찰랑거리는 고역의 질감이 선명하게 살아납니다.
LCD-24의 공간감은 좌우 폭과 무대 위쪽으로의 확장감에 있어서 장점이 있는 대신 전후의 깊이 표현이라든지 아래쪽으로의 깊숙히 떨어지는 안정감의 면에서는 한계가 있습니다. 하지만 LCD-24는 애초부터 무게감, 깊이감이라는 표현과는 거리가 먼 제품입니다. 이를 덜어낸 대신 나머지 부분을 극도로 갈고 닦은, 거칠게 말하면 소리 전반의 밸런스따위는 고려치 않고 스탯을 한쪽으로 몰아준 제품에 가깝습니다. 덕분에 곡에 따라선 하늘에서 중고역이 쏟아져 내려오는 듯한 황홀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제가 추천하는 앨범은 영국의 퓨전재즈 그룹 The Comet is Coming의 <The Afterlife>입니다.
하비 핸콕을 시작으로 재즈에 전자 악기를 섞어서 연주하는 퓨전 재즈가 몇 년 전부터 영국을 기점으로 UK 재즈라는 장르의 확립과 함께 한층 복잡해지고 다양해졌습니다. The Comet is Coming도 그 중 하나입니다. 색소폰과 드럼 등의 악기 연주와 함께 신시사이저 등 전자 악기를 활용하여 매우 복합적인 질감의 몽환적인 멜로디를 들려줍니다. LCD-24로 듣는 이 앨범은 보다 색다릅니다. 신시사이저의 전자음이 머릿속 온 공간을 돌아다니며 가득 채워주는 가운데 색소폰의 메인 선율이 도드라집니다. 평소보다 곡의 스케일이 크게 다가옵니다. 특이한 점은 좌우 공간이 매우 넓지만 그 끝에 탁 트인 듯한 느낌은 들지 않습니다. 만약 비정상적으로 공간감이 넓은 밀폐형 헤드폰이 있다면 LCD-24와 같은 공간 표현력을 가질 것 같습니다.
LCD-24는 동사의 플래그십 헤드폰 LCD-4처럼 음역대의 밸런스를 추구하는 헤드폰은 아닙니다. 그렇기에 잘 어울리는 곡이 있는 만큼 LCD-24가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는 곡도 분명 존재할 거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 녀석이 약점을 보일 만한 곡들을 일부러 찾아 들어봐도 LCD-24는 자기를 얕보지 말라는 듯이 자신만의 스타일로 바꿔 흠잡을 데 없이 소화해 내었습니다. 음역대 중 중고역이 강조된 성향인데, 저역 비트의 타격감으로 리듬을 살리는 팝이나 극저역의 배경음이 깔리는 OST 곡들을 들어봐도 부족함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토널 밸런스가 살짝 높구나, 음상이 평소보다 살짝 위쪽에 잡히는구나 정도의 느낌이 들지만 여전히 훌륭합니다. 이건 LCD-24가 재생하는 음의 밀도가 높은 덕분입니다. 저역의 양감이 살짝 줄어들었지만 존재감은 뚜렷합니다. LCD-24는 여느 LCD 제품들과 다르게 표현할 뿐, 표현의 결과가 틀리진 않습니다.
음악을 들으면서 저도 모르게 평소보다 볼륨을 자꾸 올리게 되더군요. 저는 평소 음악을 그리 크게 듣는 편이 아닙니다. 하지만 LCD-24로 들을 때만큼은 자꾸만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는 심정으로 볼륨을 올려서 들었습니다. 음압이 높아질수록 헤드룸의 여백은 줄어듭니다. LCD-24가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도화지는 굉장히 넓습니다. 볼륨을 올려 들을수록 LCD-24가 만들어내는 반짝이는 중고역의 음들이 마구마구 쏟아져 내립니다. 평소 자주 듣던 말러 6번 교향곡이 오늘따라 매우 화려합니다. 마음 같아서는 이 넓은 공간을 충분히 활용하고 싶은데, 그러기엔 제 귀가 감당이 되지 않아 아쉽습니다. LCD-24 유저 분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욕심을 부려 음악을 너무 크게 듣지 않도록 조심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귀 건강은 한순간입니다.
별미가 필요한 당신에게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매일 먹으면 질린다고 합니다. (정말 그런가요?) 이제껏 오디지는 맛있는 음식들을 꾸준히 제공했습니다. 시리즈가 발전할수록 상차림도 푸짐해졌고 식재료의 품질도 올라갔습니다. 어느날 문득 오디지의 최고 경영자는 이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아, 맛있긴 한데 좀 물리네. 뭔가 색다른 맛은 없을까?’ 그렇게 별미를 찾아 떠난 미식가가 만들어낸 음식이 LCD-24가 아닐까 합니다.
별미가 되기 위해선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먼저 평소에 자주 접한 음식과는 맛이 달라야겠습니다. 그렇다고 무작정 맛을 달리 만드는 데에만 집중해서 음식의 질을 떨어뜨리면 안 됩니다. 별미는 무조건 다른 맛이 아니라 ‘색다르게 맛있는 맛’입니다.
LCD-24가 그렇습니다. 평소 LCD가 들려주었던 무게감은 덜어내고 한여름의 더위를 식혀줄 만한 시원한 맛을 더했습니다. 이제 왜 오디지에서 LCD-24를 주문 후 제작 방식으로 판매하는지 알겠습니다. 원래 별미는 기간 한정으로 판매해야 제맛이거든요. 다행히 오디지 수입사인 셰에라자드에서 LCD-24의 청음기를 놓아 두어서 들어보지 못한 상태에서 거금을 들여 모험을 해야 하는 리스크가 사라졌습니다. 이 참에 많은 분들이 직접 들어보고 판단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분명 입맛에 맞는 분들이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이 글은 셰에라자드의 지원으로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