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의 철학적 질문에 관한 결론
To. 나는 누구인가라는 철학적 질문 앞에서 멍 때리고 있는 나와 누군가에게
법륜스님이 고등학교 시절 주지 스님께 들었던 말씀이다. 바쁘다고 핑계되는 법륜스님에게 일침을 가하신 것이다. 주말에 최진석 교수님과 법륜 스님의 유튜브를 보았다. 우연히 두 영상 모두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에 관한 화두를 던져주었다. 순간 멍해졌다. 선뜻 답을 할 수 없었다. 내가 소유한 것으로 나를 정의할 수 없다. 나의 이름은 내가 아니다. 나의 직위, 신체로도 내가 누구인가를 정의할 수 없다. 그것들은 모두 나로부터 떠나갈 수 있다. 그렇다고 내가 아닌 것은 아니다.
답답한 마음에 유튜브도 찾아보고, 블로그도 찾아보았으나 명쾌한 답은 없었다. "나는 누구인가?"는 고대부터 수행자, 철학자가 끊임없이 고민하고 사색하는 주제 중의 하나이다. 한두 시간 고민하거나 인터넷 검색을 한다고 답을 찾을 수 있는 주제는 아니다.
인터넷을 검색하다 흥미로운 주제를 발견하였다. 테세우스의 배에 관한 것이다. 테세우스와 아테네의 젊은이들이 탄 배는 서른 개의 노가 달려 있었고, 아테네인들에 의해 데메트리오스 팔레레우스의 시대까지 유지 보수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부식된 부품을 하나둘씩 갈게 되어 어느 순간 최초 배에서 사용한 부품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럼 이 배를 테세우스의 배라 할 수 있을까? 반대로 부식된 부품을 누군가 모두 모아 옛 테세우수의 배를 복원했다면 이것은 테세우스의 배인가?
테세우스의 배에 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지만 깊게 찾아보진 않았다. 다양한 견해가 있다는 것은 정답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것을 테세우스의 배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반대로 어떤 것을 테세우스의 배가 아니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많은 철학자와 수행자가 여전히 고민하는 문제에 건방진 결론을 내보았다. 내가 지금 누구인가(AS-IS)보다 내가 누구이고 싶은가(TO-BE)가 중요하다. 사람은 변할 수 있다. 사람은 선택할 수 있다. 변할 수 있고 선택할 수 있다면 지금 내가 무엇인가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 앞으로의 선택과 변화에 따라 지금의 나와는 전혀 다른 내가 될 수 있다. '현재의 나'가 앞으로 살아갈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되고 싶은 나'가 살아갈 방향을 결정해 준다.
어떤 내가 되고 싶은지,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지를 아는 것도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왜 태어났는지, 내가 누구인지, 내가 무엇인지 깊게 고민하지 말자. 우리의 미래는 이제까지의 나보다 앞으로의 내가 더 큰 영향을 줄 수 있다. 어떤 내가 되고 싶은지,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지, 어떤 꿈을 꾸고 싶은지를 고민하자.
그런 관점에서 테세우스의 배가 항해하고 싶어 하는 꿈을 가지고 있다면 부품이 다 교체되었다 한들 여전히 항해하는 그 배가 테세우스의 배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