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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본위너 Apr 17. 2023

타지에서 심장이 쫄깃해지던 날

언제나 꽃 같은 날만 있는 것은 아니니까

새벽 1시 30분.

evacuate! evacuate!

띠이익~띠이익~띠이익~


뭐래? 이게 무슨 소리야?

자다 말고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문 밖으로 나가

비상구라고 쓰인 문을 열었다.

9층인 우리 집에서 내려가야 하는 계단이 생각보다 가파르다. 처음 들어보는 시끄럽게 울려대는 '대피하라'는 소리. 정신없이 비상구로 내려가며 꽉 막힌 회색공간에서 압박을 느꼈다. 

"왜 이렇게 미로야, 은 언제나와!"

다리는 후들후들 거리는데.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아파트.

나름 쾌적하고 깨끗하고 교통도 편리한 나무랄 데 없는 곳. 그러나 새벽에 무방비 상태로 자다가 뛰쳐나와야 하는 이 순간이 참 두려웠다.


외부로 나와보니 주민들이 어느새 대피해 있다.

집 주민들 전체를 자다 말고 처음 보게 되었다.

강아지, 고양이, 아기, 몸이 불편하신 분들까지.

시드니 치고는 세대수가 많은 고층 아파트라 누구 하나 실수를 해서 파이어 알람이 울린다면, 이렇게 모두가 뛰쳐나와야 하는 것이었다.

결국 소방차 몇 대가 긴급히 출동을 했지만, 이유는 딱히  밝혀지지 않았다. 그렇게 허무하게 잠을 설치고 하루를 보냈는데 얼마 지나지 않은 주말에 또,


evacuate! evacuate!

띠이익~띠이익~띠이익~


편한 차림으로 토요일을 보내고 있었는데,

아, 제발 피하고 싶던 그 알람소리.

투정할 새도 없이 반사적으로 몸이 튕겨 나갔다.

해외에서 별일 생기는 건 아닌지 상상하며 우왕좌왕 비상구로 대피하는 모습이란 너무 초라했다.

9층 밖에 안 되는 계단이 39층처럼 느껴지는 순간.


외부로 나와보니 우리 아랫집에서 연기가 가득했다.

발코니에서 고기를 구워 먹다가 기름이 튀며 불이 났다고 전해 들었다. 하필 우리 아랫집.


한 시간이 넘게 밖에서 대피하고, 경찰차도 몇 대오고, 누군가가 부축받고 나오는 모습도 어렴풋이 보였다. 일이 마무리되고 들어가서 저녁을 하는데 괜히 조심스러웠다. 밤에는 자다 말고 알람이 또 울리진 않을까 신경이 쓰여 늦게 잠을 청하기도 했다.


그 뒤로도 일 년 내 다섯 번 정도. 밤이건 저녁이건 울려대서 뛰쳐나간 적이 있다. 이 아파트의 문제인가 싶어 커뮤니티 사이트에 물어보니, 다른 아파트에서도 한 달에 한두 번씩은 이런 일이 생겨 노이로제 걸릴 것 같다는 답변.


우리 집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 고기 구워 먹는 연기에 조차 알람이 울려 당황하는 이가 많다는 것, 호주는 한국보다 파이어알람에 훨씬 민감하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한국에서 평생 몇 번 겪지도 않을 파이어알람을 호주에서 수시로 겪다 보니 아예 파이어알람이 울리면 들고나갈 짐가방까지 싸두었다.

현관 앞에서 착 낚아채서 가져갈 수 있게 배치.

정전도 잦은 편이라 가방에 조그만 플래시를 달고, 현금 조금과 신분증을 넣고 만반의 대비를 완료해 놓았다. 마음이 훨씬 편했다.


기분 내자고 모처럼 갔던 볼링장에서도 파이어 알람이 울려 대피하는 바람에 그대로 집에 간 적도 있다.


직접 겪기 전엔 몰랐던 사실이라 자다가 날벼락을 몸으로 받아낸 기분이었다. 시간이 지나 반복이 되다 보니 가방 싸서 대비를 해놓는 것, 이 나라의 상황을 빠르게 이해하는 게 차라리 도움이 되는 것이었다.


생각해 보니 인생도 비슷하다.

내가 다 알고 있는 일, 생각한 일만 일어나지 않는다.

피하고픈데 피할 수 없는 일, 불현듯 훅 하고 끼어들어오는 너무 싫은 일들이 한둘이랴. 실컷 기분 나빠하고 최대한 빨리 풀고 트라우마로 남지 않게 대처해야 할 뿐이다.


그리고 긍정적 생각으로 돌려야 한다.

쓸데없는 요소가 내 하루에 영향을 끼치지 않게.



예로

너무 싫은 파이어알람 때문에 수시로 뛰쳐나가다니.

->'자다가 뛰쳐나가는 실전대피 트레이닝, 이 민첩성으로 어디서든 살아남겠어!'라고 용기장착하며 위안하는 것이 남는 것이지 싶다. 해석하기 나름이라니까 내가 어찌할  없는 범위는 나에게 이롭게 해석해 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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