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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본위너 May 28. 2023

유럽 8개국 여행 245만 원 하던 시절

그즈음 리얼한 세상을 더 많이 봤어야 했다.

내가 20살이 되었을 때, 

"이제 대학생이네, 유럽여행 가도 좋겠다!"

라는 주제가 가족들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유. 럽. 배. 낭. 여. 행.

아, 대학생들이 많이 간다는 그 여행.

학창 시절 내내 꽉 막힌 교실에 지내오다 보니 나는 내가 세상 밖으로 나간다는 것이 스스로 와닿지 않았던 모양이었는지 "국내도 갈 때가 많은데"라고 답했다. 우물 안의 개구리 같은 답을 하고 그 기회를 하마터면 만들지 못할 뻔했던 시절이 있었다.


40일 동안 유럽 8개국을 거쳐 오는 여행.

영국, 네덜란드, 체코, 오스트리아,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스위스! 떨리지만 말 나온 김에 가게 되었고 시 245만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자유여행은 아니었지만, 무엇보다 그 큰 짐들을 혼자 짊어지고 한국을 떠나갔다 온다는 것을 마음의 짐처럼 느끼며 설렘반 두려움 반, 그렇게 떠났다. 참으로 우왕좌왕하면서.


영어는 한국형으로만 배운 터라 하나도 들리지 않고, 영국에서는 집시가 칼로 크로스백을 찢어놓아 현기증이 났으며,  이태리에서는 체해서 호텔방에서 앓아누웠다. 어느 나라에서는 소매치기당했다는 학생의 이야기를 듣고 긴장해서, 밤기차를 타고 나라 이동을 할 때는 허리춤에 찬 복대의 돈은 잘 있는 것인지 신경 쓰느라 잠도 설쳤다. 초보도 그런 초보가 없었다.


붕 뜬 기분으로 내가 뭘 하는 것인지 잘 모르다가,

얼마간의 기간이 지나고 유럽의 아름다운 건축물들이 서서히 눈에 들어오면서 내가 드디어 이곳에 왔구나를 실감했다.

세계사 책에서 시험을 위해 암기만 하던 곳들을 눈으로 보고 있었고, 특히 스위스의 절경과 세계 유산들을 직면하면서 세상이 이렇게 크다는 것을 처음 느꼈다.


그때 난 처음 세상을 만났던 것이다.

큰 짐 어깨에 메고 힘들어도 아파도 내가 이고 지고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들을 책임졌고, 몸이 힘든 것은 새롭고 경이로운 세상을 마주하며 얻는 정신적 행복으로 덮어낼 수 있는 경험을 하면서.


겨우 40일 다녀왔던 그 순간을 마치 군대에 다녀온 여자처럼 20년 넘게 "그 유럽여행 때 말이야.."라고 말하고 살아왔다. 

고작 40일이지만, 매일 똑같은 것을 하는 40일과 20년 살며 몰랐던 각종 감정을 다 갖게 되는 40일의 차이가 너무 놀라웠다.


유럽여행 이후, 이렇게 큰 세상을 많이 보고 살 것이라 다짐했는데 어느새 현실에서 대학 학점을 채우고, 한국에서 커리어를 쌓는 것을 선택하게 됐다. 안정적으로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20대를 보냈.




나는 내가 안정만을 추구하는 사람인지 알았다.

근데 점점 내 안에는 죽을 때까지 끝없는 배움과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어 꿈틀거리는 한 공간도 아주 크게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내가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것에만 충실했던 나의 20대에게 미안한 마음도 들곤 한다.


젊은 날 더 많은 세상을 만나볼걸.

대체적으로 세상에 부딪혀 본 경험치가 많은 사람들이 가장 중요한 순간에 과감한 선택을 하고, 그것이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임을 점점 깨닫는다. 


앞으로 커나갈 우리 아이를 비롯해서,

20대의 젊은 이들은 내가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뿐만 아니라 내가 불가능할 것 같다고 느끼는 것들도 의도적으로 많이 도전해 보면 좋겠다.  

성향차이도 있겠지만, 내향적이라면 '남들 한번 하면 될걸 나는 열 번 하면 좀 되더라' 라는 열린 마음으로 그 시기를 보내주면 좋겠다.


그 시기에 그릇에 내가 만든 것 차곡차곡 잘 담아놓는 것보다, 그릇을 깨트리는 실수를 하며 크기를 크고 단단하게 만들어 놓는 사람들이 발휘하는 뒷심 얼마나 강한지 생각이 드는 요즘이라서. 



(사진: 24년 전 찍었던 이태리 트레비분수의 한 부분/ 코닥필름 사용하던 그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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