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어머니는 이제까지 내가 익숙히 알고 지내던 인간형과는 거리가 멀다.
나에게 익숙한 인간형이란 대체로 불만이 많고 까다로우며 계속 발전하려고 하는 유형인데, 대표적으로 내가 그렇다.
어디에 가든 무엇을 먹든 우선 투덜거리고 본다. 깨알 같은 것 하나까지 비판하고 어떻게 하면 나아질지 원치 않는 컨설팅을 (남편에게만) 늘어놓는다. 또한 불이익과 불편함을 잘 참지 못한다. 나에게 손해를 끼치는 대상은 결코 그냥 지나가지 않는다. '손해보지 않겠어. 날 건드리면 배로 갚아주겠어' 하는 무언의 암시가 눈빛에서 쏟아진다. 그러니 피해를 보는 일은 적은데, 인간관계가 좁고 각자의 바운더리를 절대 넘지 않는다. 미국에 있을 때도 나를 조롱하던 보스에게 바로 메일을 보내 정식으로 사과를 받아냈고, 신혼여행에서 과잉청구된 해외전화요금도 귀신같이 잡아내 돌려받았다. 전세보증금을 안 돌려주려는 임대인에게 내용증명을 보내고 심리적으로 압박해 제 날짜에 보증금도 오롯이 받아냈다. 수도꼭지에 물 한 방울이 떨어져도 당장 스스로 손보지 않으면 다른 일을 못한다. 집 밖에서도 불편하고 부당한 일 역시 웬만해선 참지 않는다. 포트홀, 망가진 보도블록, 꺼진 가로등에 불법 현수막도 하나하나 신고해서 바꾼다. 최근에는 청소년수련관에서 요가를 배우는데 셔틀 시간 앞뒤로 대기 시간에 있을 곳이 없어 쉼터를 만들어 달라고 게시판에 장문의 글을 올렸다. 오늘 수일 내로 로비에 테이블을 놔주겠다고 약속을 받았다. 그게 나다.
그렇다면 나의 시어머니는 어떤 사람인가?
식당에서 왕바퀴벌레 한 마리가 지나가는 것쯤은 쿨 패스다. 패키지여행에서 가이드가 옵션을 강매해도 , 크루즈라고 알고 간 여행에 한강에나 뜰 것 같은 유람선이 나와도 참으신다. 부엌 바닥이 꺼져서 기울어져도, 아버님이 춥다고 창문을 플라스틱 가림막으로 가로막아 여름에 바람이 안 들어와도 불평을 안 하신다. 최근 어머님 동네에 대형쓰레기장이 들어섰는데 평온하신 것을 보고 용서고속도로 난간 따위에 흥분했던 나를 반성했다.
어머님은 웬만해서는 인간관계를 손절 치는 일이 없는데, 그녀에게 짤린 사람이라면 살인정도는 했다고 봐야 한다. 어머니가 웃으면서 옆집 아줌마가 어머니 댁에서 깨를 한 자루를 훔쳐갔다는 거다. 한두 번이 아니라서 여차저차 CCTV를 달았고, 그 아줌마에게 우리 집에 CCTV가 달려있다고 분명히 알려주셨다는 거다. 그 후로도 그냥 잘 지내신다. 수십 년 알고 지낸 뒷집 아저씨는 허락도 없이 어머니 뒷마당의 오래된 두릅나무들을 뭉텅 잘라버리셨고, 소울메이트라는 친구는 여행에 가서 어머니에게 막말을 하셨지만, 모두 용서해 주셨다. 다시는 안 만날 거라고 하신 경우 없는 친구들도 그들이 연락하면 언제나 또 받아주신다. 그래서 한동안 어머니는 용서의 아이콘이셨다.
지난주에 어머니가 백내장 수술을 하셨다. 자식들은 눈이 그렇게 까지 안 좋은 지도 올해가 되어서야 알았다. 어머니 말씀을 들어보니 텔레비전의 자막이 안 보인 지 꽤 오래되셨다는 것이다. 왼쪽눈을 먼저 수술하고 다음 주에 오른쪽 눈을 수술하는데 한쪽 눈만 수술하시고 바로 다음날 대만족을 표현하셨다. 워낙 시력과 눈 상태가 안 좋으셔서 다초점은 못하고 의료보험이 되는 단초점 렌즈를 넣어 수술을 하셨는데도 그렇게 좋아하셨다. 수술 끝나고 전화를 드렸는데 너무 잘 보인다며 무려 20분 동안 전화로 행복해하셨다. 주변에 백내장 수술을 한 지인과 지인 부모님 중 어머님처럼 단시간에 대 만족을 느끼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언제나 그랬다. 이게 진짜 괜찮은 일인가? 싶을 때도 웃고 계셨다. 한 해 동안 뼈가 닳도록 지은 옥수수나 사과, 벼와 오이가 풍년이면 풍년인대로 똥값이고, 흉년이면 가격이 올라도 팔게 없어 손해를 보는데도 크게 낙담하지 않으셨다.
농사가 다 그렇다. 인생이 다 그렇다. 가족들 건강하고 오늘 먹을 거 있으면 된다.
라는 것이 어머니의 기본적인 믿음이라고 생각한다.
최근 지식인사이드에서 코미디언 이경규 옹이 나와 소확행은 지고 대확행이 온다고 주장했다. 대확행! 크고 확실한 행복! 비싼 디저트 따위가 아니라 프랑스 본토에 가서 바게트 정도 와그작와그작 씹어야 대확행인가 하고 영상을 시청했다. 하지만, 대확행은 본질적인 것에 만족하고 감사하는 삶이었다. 예를 들어, 엄마가 싸준 도시락을 먹으며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느끼는 것도 좋지만, 사실 더 큰 행복은 '엄마가 곁에 있다는 것' 그 자체라는 것이다. '대기업 직장에서 연봉을 많이 받고 있다, 그래서 행복하다'가 아니라, '일을 하고 있다는 자체가 행복'이라는 것이다.
다소 식상한 얘기에 실망한 면도 있다. 일희일비의 대명사인 내가 품기에는 너무 큰 생각은 분명하다. 소확행이 가고 대확행이 온다기보다, 오랜 시간 이미 있던 지혜이지만 그렇게 생각하기가 참 쉽지 않았을 뿐이다. 다시 말하면 안분지족(제 분수를 알고 만족할 줄 아는 모습) 하는 삶인데, 나의 한계를 계속 갱신하고 싶어 하는 나는 그렇게 생각하기가 좀처럼 쉽지 않았다. 하지만 어머님은 나와 달리 더 나아지는 것을 바라시는 것이 아니라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감사하셨다.
재밌는 것은 나이가 들다 보니 나도 점점 대확행을 향해 가긴 간다는 거다. 가다 말다 가다 말다 하긴 하지만 말이다. 물론, 크게 한방으로 확실한 행복을 가지고자 통장을 헐어낼 궁리도 하면서 말이다. ㅎㅎ
분명한 것은, 행복의 강도는 모르겠지만 그 빈도에서 만큼은 대확행을 하는 어머니가 월등히 우세할 것이란 거다. 어머니는 분명 자식이 공부를 잘 하든 못하든 돈이 많든 적든 건강하면 됐다고 행복해하는 분이시니 말이다. 눈은 보이면 행복하고 다리는 걸을 수 있으면 행복하고 팔은 펴지면 행복하니 어머니 인생은 행복이 넘친다.
화요일의 감사
- 어머니의 왼쪽 백내장 수술이 잘 되어 이제 텔레비전 자막도 보이신다니 참 감사하다.
- 서울깍쟁이 큰 며느리 때문에 서운한 일도 엄청 많으셨을 텐데 잔소리 한 번 안 하시고 너희 부부끼리 잘 살면 됐다고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어머니 같은 성품의 아들이 나의 남편이라 감사합니다.
* 제목의 그림은 오마이뉴스 기사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107708 )에서 가져왔습니다.
* 옹졸한 쫄보의 감사일기가 30회로 마감되어 새로운 브런치북을 만들면서 글이 중복발행된 점 양해부탁드립니다.
* 댓글 달아주시고 하트 눌러주신 독자 분들 감사합니다. 딴짓님, 쉽지않지만 대확행 함께 노력해보아요~ Alice in the Smart City 님 응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