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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간이어서 부끄럽다

행복한 비관론자의 반성과 감사

by Lali Whale

세상이 변할까? 안 변할 것 같다. 인류는 결국 멸망할 것이다. 환경오염으로 인한 기후위기로 종말을 맞든, AI의 지배로 망하든, 핵폭탄이 터져 일순간 사라지든 난 어떤 경우에도 인간이 지금처럼 세상을 지배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심지어 그것이 지구에 공평하게 느껴지지도 않는다. 지구를 착취하고 오염시키고 병들게 한 인간이 그럴 자격이 있을까?


며칠 동안 경남 산청은 화재로 여러 사람이 목숨을 잃고 축구 경기장의 몇만 배 크기의 산이 불타고 있다. 묘지를 찾은 성묘객이 자신의 실수로 불을 냈다고 자수했다고 한다. 한 인간의 부주의함이 수천 년간 그곳을 지킨 땅과 나무, 풀을 태우고 있다. 그 안에 한 점 죄 없이 살아온 동물과 곤충,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생명체까지 태우고 있다. 나는 너무 가슴이 아파서 그 뉴스를 볼 수 없었다. 부디, 하늘에서 죄없는 생명들을 가엾이 여겨 비를 내려 주기를 빌었다.


일본 후쿠시마에서는 지난 3월 11일 원전오염수를 방류했다. 11번째 이고 이제까지 방류양은 8만톤 가량이라고 한다. 그 해악이 어느정도인지 의견이 분분하지만, 그것이 생명수가 아닌 오염수라는 것은 표현만으로도 정확하다. 우리는 모두 안다. 일본이 돈을 아끼고자 바다에 오염수를 방류하고 있고 다른 나라들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사실을 왜곡한다.


2023년 11월 24일 일회용품 사용을 규제하겠다던 정부의 입장은 규제 시행을 17일 앞두고 규제 완화로 입장을 바꿨다. 이번 정권은 그나마 법적효력도 주지 않았던 환경영향평가의 역할까지 축소했다. 편리와 개발, 효율을 위해 인간은 다시 지구를 더럽히는 선택을 서슴치 않았다. 서울과 경기도는 지역 개발을 위해 환경 보호의 마지막 저지선인 그린벨트를 지속해서 풀고 있고, 국토교통부는 도로를 넓히기 위해 수십년 된 가로수를 뽑고 산에 구멍을 뚫었다.


일요일에는 독서모임에서 유발 하라리의 넥서스를 읽고 토론했다. AI혁명으로 인간의 삶이 위협당하고 있으니 너무 늦지 않은 지금, AI를 규제할 수 있는 강력한 자정장치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니 행동하라고, "우리가 노력하면 더 나은 세계를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진짜 우리가 그 변화의 흐름을 되돌릴 수 있다고? NO. 나는 "불행히도 인간은 한 번도 단합한 적이 없다."는 저자의 말이 더 신빙성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모임에 참가한 다수가 '우리는 할 수 있다'는 기대를 가지고 있어 사실 놀랐다. 희망을 갖지 않으면 너무 불행할 것 같다고 했다.


나는 아니다.

나는 희망을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는 이미 꺾인 그래프의 흐름을 타고 있고 누구도 다시 되돌리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다만 완전히 소멸하는 때가 7년 뒤냐 70년 또는 700년 뒤냐의 차이일 뿐이다.


희망이란 누구의 희망일까?

지금도 길을 거닐다 보면 경제성장에 대한 정치가들의 공약이 재활용도 안 되는 플랜카드에 걸려있다. 도대체 얼마나 더 성장해야 인간은 만족할까? 얼마나 더 편해야 지구를 덜 괴롭힐까? 얼마나 더 지하에 굴을 파고 하늘에 도로를 세우고, 산과 들의 나무를 태우고, 바다에 폐기물을 버려야 그만할까? 로봇을 만들고 생성형 AI를 개발해서 손가락 하나 까닥해서 모든 것을 얻는 때가 되면 그때는 멈출까?


오늘 뉴스를 보니 일론 머스크의 뉴럴링크에서 뇌-컴퓨터 인터페이스((BCI‧Brain-Computer Interface) 기술을 개발하여 사지를 못쓰는 인간의 뇌에 컴퓨터와 연결된 칩을 이식해 손가락도 까닥할 필요 없이 생각만으로 컴퓨터를 작동시킬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 경과가 기대만큼 완벽하지 않아 실망했다는 내용이었다. (뉴럴링크 칩, 뇌 이식 후 1년..."게임실력 늘었다". 동아사이언스) 인간은 만족하지 못한다. 끊임없이 자신의 한계를 갱신하지 못하면 견디지 못하고 끊임없이 도전하고 그 도전을 자랑스러워한다.


경제는 왜 더 성장하지 않으면 안 될까?
인간은 얼마나 더 편해야할까?
그만 개발하고 더 보호해서 현재의 것을 유지하는데 집중할 수는 없을까?

아마 이런 주장을 펼치는 정치가가 선거에 나온다면 아무도 표를 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행복하다.


인류가 망한다고 믿으면서 어떻게 행복하냐고? 그럼 안 행복해야 하나? 내일 지구가 망해도 나는 오늘 사과나무 한 그루를 심겠다는 것이 아니다. 이미 주어진 삶이다. 나는 하루하루, 지금 이 순간이 행복해지는 선택을 할 수 있다. 그것은 내 역량 안의 일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


나는 지구에 해가 되지 않는 삶을 살려고 노력한다.

꼭 필요하지않으면 새로 사지않고 일회용기도 좀처럼 쓰지않는다. 여름엔 좀 덥게 겨울엔 좀 춥게 지내고 욕심내서 많이 먹지않는다. 동물과 곤충에게 친절하고 풀과 나무를 꺾지 않는다. 폭설에 꺾인 나뭇가지의 눈을 털어주고 아스팔트 위의 지렁이를 흙에 다시 넣어준다. 미안해서. 함부로 쓴 지구에 미안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사과의 마음을 담는다. 그 노력이 큰 의미가 있든 없든 나는 내 양심껏 산다. 그게 내가 지구에 갖는 염치다.

혼자 있으면 내가 좋아하는 글을 쓰고 책을 읽고 일을 하고 돈도 번다. 가족을 위해 밥을 하고 집을 치우고 빨래를 한다. 모두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다. 남편이 쉬는 날에는 바위에 붙은 따개비처럼 그와 딱 붙어 논다. 짜구와 산책을 하고 공원에 앉아 커피도 한 잔 마시고 차를 타고 여행을 가는 호사도 누린다. 친구도 만나고 개천에 버려진 쓰레기도 줍는다. 힘들 때도 있지만 그렇다고 불행한 것은 아니다.

남편하고 헤어질 때는 뽀뽀를 하고, 만나면 반가워서 꼭 안아준다. 그가 나에게 따뜻하게 말해주면 고마워하고 그가 아프지 않게 건강을 챙겨준다. 엄마가 가고 싶어 하는 여행을 함께 가려고 시간을 마련하고, 아빠의 병원을 함께 가주고, 시어머니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제사를 위해 내 시간을 양보한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친절하려고 노력하고 아들에게 하는 기대는 매일매일 줄이려고 노력한다.


어차피 짧은 인생 조금 더 행복한 쪽으로 선택하고 행동한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일. 희망이 없다고 불행하지는 않다. 그러니 나는 행복한 비관론자다.


인간은 그렇게 대단한 존재가 아니다. 지구라는 아름다운 행성을 두고두고 지배해도 되는 특권의 존재가 아니다. 슬프지만, 사실이고 우리의 시대는 저물고 있다.


나는 지구를 구할 힘은 없지만, 나를 행복하게 해 줄 힘은 가지고 있다.

인간이라서 다 가져야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이 지구를 공유하는 생명체 중의 하나로 염치 좀 있으라고... 너무 부끄러우니까.



화요일의 감사

- 아직도 지구가 염치없는 인간을 품어주는 것에 감사하다.

- 우리집 짜구는 그래도 엄마라고 인간인 나를 사랑해주고, 동네의 길고양이는 길고 추웠던 겨울을 살아내주어 감사하다.

- 폭설로 꺽인 나무가지에도 산수유꽃이 피고 얼음이 녹은 땅에는 냉이가 올라온다. 그렇게 괴롭혔는데 올해도 또 살아주어 감사하고 미안하다.


- 개천에는 다시 물고기가 헤엄치고 개구리가 알을 낳고 오리들이 그 위를 떠다니는 자연의 일상이 아직 있음에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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